소설리스트

12화 (12/170)

가장.

김상구 pd님의 멘붕 때문에 카메라 감독님이 지휘를 하여 촬영을 마무리 지었다. 카메라 감독님은 김상구 pd님을 끌고 나가시면서 나한테 엄치 척을 해주셨다.

요즘은 살만하다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통장에 소속사 계약금과 너튜브 수익금이 들어와서 든든했다.

‘이정도 돈이면 부모님 빚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갚을 수 있겠지?’

빚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전화를 받았으니, 또 전화가 오면 빚이 얼마 남았는지 확인해 봐야겠다.

더 많이 남았어도 이제는 돈을 벌 수 있으니 걱정 없이 같이 살 수 있을 것이다.

조금만 더 노력해서 작은 전셋집이라도 구해야겠다.

지금까지 이 원룸에서 버틴 것은 돈도 돈이었지만, 혹시나 부모님이 무슨 일이 생기셔도 찾아오실 수 있게 돌아올 곳을 지켜야한다는 생각이 커서였다.

‘이제는 작은 집이라도 구하자. 다 같이 살 수 있게.’

집은 송이 학교 근처로 구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띠리링!]

‘응? 033? 강원도 번호네. 부모님이신가보네.’

아직 이번 달 전화 오실 때까지 시간이 남았는데, 무슨 일이신지 모르겠다. 어쨌든 물어볼 것 도 있고 해서 얼른 받아보았다.

“여보세요. 아버지?”

[운아. 엄마야. 잘 지내고 있지? 송이도 잘 지내고 있고?]

“응. 우리는 잘 지내고 있어요. 요즘에 저희 하는 일이 잘 되서 돈도 조금 벌었어요. 우리 빚이 얼마나 남았어요?”

[빚은 어제 다 갚았어...]

“어? 정말요? 그럼 이제 다 끝난 거예요? 우와! 이제 우리 다 같이 살 수 있는 거예요?”

[운아.. 놀라지 말고 잘 들어..]

무언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평소처럼 아버지가 먼저 전화하지 않고, 엄마가 전화를 한 게 조금 이상하기는 했었다.

“아버지 어디 아프신 거예요? 병원에 입원하셔야 한데요?”

[흑...흑... 너희 아빠... 오늘 아침에... 돌아가셨다..]

무언가 잘못 들었나보다. 이제 다 같이 살 수 있다고 부모님이 장난 치시나보다.

“에이. 장난치지 마시구요. 옆에 아버지 계신 거죠? 전화 좀 바꿔주세요. 엄마”

[흑..흑...흑... 여기 강릉 장례식장이야.. 송이랑 같이 와.. 주소 보내줄게..]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전화가 끊긴 줄도 모르고 앉아만 있었다. 온갖 생각이 휘몰아쳤다. 실감이 나지 않아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우선 송이한테 연락해야겠다. 검정색 양복이 없으니 내거하고, 송이 것도 사야지.’

혼란스러운 마음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니, 현실적인 부분들을 생각하고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내가 너무 냉정하고 비인간적인 건 아닌가라는 자괴감이 들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해도 슬픈 마음이 크지 않았다. 그냥 내가 해야 하는 일들만 생각났다.

집 근처의 옷가게에서 나와 송이의 옷을 사고, 택시를 잡았다. 택시를 타고 가며 송이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송이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어. 오빠.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오늘 수업 많이 남았니?”

[수업은 이제 다 끝났고, 레포트 하려고. 무슨 일인데?]

“그럼 2박 3일정도 어디 가야하니까 짐 챙겨서 준비하고 있어. 지금 택시타고 가고 있으니까 도착하면 연락할게.”

[아싸! 여행가는 거야? 오늘 금요일이니까 2박 3일! 딱 좋다!]

기뻐하는 송이의 전화를 끊고 조용히 앉아있었다.

“어디 좋은 곳으로 여행 가시나 봐요? 부럽습니다. 하하하. 좋을 때네요.”

택시 기사님의 말에 가볍게 어색한 미소를 지어 드렸다. 내 분위기가 말을 걸면 안 될 것 같아서인지, 기사님도 조용히 운전에만 집중하셨다.

“기사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미터기는 계속 켜두시고요.”

“네. 천천히 오셔도 됩니다.”

송이에게 전화를 해서 택시 쪽으로 불렀다.

기숙사 입구에서 송이가 커다란 캐리어를 들고 신나는 표정으로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걸어오고 있었다.

캐리어를 받아주고, 택시에 실었다.

“오빠!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거야? 요즘 동해가 그렇게 좋대! 해변가 가는 거지? 숙소는 펜션 좋은 곳으로 잡았으면 좋겠다. 이럴 때 엄마, 아빠도 같이 가면 좋은데... 전화 오면 물어보고 그때 같이 갈까?”

“우선 택시 타. 기차표 예약해놔서 지금 바로 가야돼”

“넵! 알겠습니다.”

오른손으로 경례를 하는 송이를 보니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마음이 아파왔다.

나보다 송이가 더 걱정이다. 나는 고등학생 때 부모님과 헤어져서 그나마 낫지만, 송이는 한참 부모님이 필요할 때 헤어졌다.

내가 아무리 잘 해주었다고 해도 부모님만이 채워줄 수 있는 그 사랑을 못 받고 자라서 항상 걱정이 되었다. 송이는 이제 가족끼리 같이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부풀어서 부모님과 같이 할 버킷 리스트도 작성 중이었다.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뒷좌석의 송이에게 보이기 싫어서 잠시 창문을 열고 조용히 마음 정리를 했다.

송이는 신나서 콧노래를 부르며 열심히 친구와 톡톡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가 어디를 가는지, 왜 가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로.

서울역에 도착해서 기차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말을 해주어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송이야. 너무 놀라지 말고 잘 들어. 우리가 어디를 가냐면...”

내가 평소와 다르게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하니, 신나하던 송이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나를 똑바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눈에 맺힌 눈물이 흐르지 않게 하늘을 잠시 바라보고 송이를 똑바로 바라본 채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버지가 오늘 아침에 돌아가셨다고 하시네. 아까 엄마한테 전화가 왔어. 그래서 지금 아버지 장례식장 가는 거야.”

“에이. 장난이 너무 심하다. 아무리 그래도 아빠 가지고 그런 농담하면 안 되지! 장난 하지마!”

“강릉에 있는 장례식장이고, 엄마는 혼자 계실거야. 가면 너가 엄마 옆에 있어드려.”

이어지는 나의 말에 송이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한참을 둘이 그렇게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이윽고 기차가 도착을 하고, 나는 송이의 손을 잡고 기차로 이끌었다.

기차를 내려서 택시를 타고, 장례식장 이름을 이야기했다. 기사님은 우리를 보고, 힘내라고 한 마디를 하시고는 조용히 목적지까지 태워주셨다.

[故 천황규]

장례식장 복도에 설치된 모니터에 아버지의 이름과 사진이 나오고 있었다.

장례식장은 조용했다.

찾아온 손님들은 한 명도 없었고, 엄마만 멍하니 빈소 앞에 앉아있었다. 거의 10년만의 만남이 이런 식이라니.

엄마는 10년 전의 30대 후반의 예뻤던 모습이 사라져있었다. 머리는 흰머리가 가득하셨고, 많이 말라보였다.

중소기업 사모님에서 49세의 할머니가 되어버리셨다.

“엄마. 저희 왔어요.”

“엄마...흑...”

“우리 아들.. 송이야...”

엄마는 비틀거리며 일어서서는 우리를 향해 걸어오셨다. 엄마의 눈에 가득한 눈물이 또르르 흘러 내렸다. 손에 들고 계셨던 손수건은 이미 너무 많은 눈물에 축 젖어있었다.

“우리 아들.. 우리 딸... 엄마가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엄마...”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말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엄마. 이제 조금 쉬세요. 송이랑 저쪽 방가서 이야기도 좀 하시고, 주무세요. 제가 지키고 있을게요.”

“그래. 엄마 나 엄마랑 할 말이 정말 많아.”

“그래. 운이가 아버지 잘 모시고 있어. 부탁해.”

그렇게 아무도 찾지 않는 빈소를 지키고 한참을 앉아있었다.

저녁이 되어서야 한 무리의 손님이 찾아왔다. 결코 내가 잊을 수 없는 그 얼굴이었다.

아버지의 빈소에 절을 하고, 나한테 인사를 했다. 아버지 가시는 길에 큰 소리를 내고 싶지 않아 겨우 참았다.

“고인의 명복을 비네. 자네한테는 정말 미안하구먼. 워낙에 우리 하는 일이 그래서 그랬어. 미안하네.”

“밥 한 그릇들 하시고 조용히 돌아가 주세요.”

“그려. 미안하네. 그래도 내가 봤던 분들 중에서는 가장 책임감이 강하신 분이셨어. 이런 분은 우리도 처음이었다네. 그래서 우리도 원금만 받고 끝냈으니까 너무 미워하지...음.. 미워 안할 수는 없겠제? 미안하네.”

내 고등학교 생활을 지옥으로 만든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들이었다. 그래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장례식장을 처음으로 찾아온 사람들이 사채업자라니 아버지가 너무 불쌍하다.

10년에 걸쳐서 빚을 갚았으니 빌려주었던 사람들은 당연히 아버지가 미웠을 것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전부 다 갚겠다고 개인 파산도 안하신 분이신데, 어떻게 한 명도 안 올 수 있는지 너무나 화가 나고 억울했다.

‘아버지. 그런 분들에게 아버지는 그래도 의리를 지키셨네요.’

결국 발인을 하는 날까지 사채업자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화장을 하고, 집에서 가장 가까운 납골당에 모셨다.

어머니는 잠시 우리 원룸에서 지내시기로 하셨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나는 새로운 집을 알아보았다. 송이의 학교 근처에 작지만 깨끗한 전셋집을 계약할 수 있었다.

그동안 모아온 돈으로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집이었다.

전셋집으로 이사를 온 날 우리는 다 같이 끌어안고 울었다. 너무나 오랜 시간을 돌아서 이제야 겨우 다 같이 모이게 되었다. 벽에 걸려있는 아버지의 사진이 우리를 인자하게 바라보시고 계셨다.

엄마에게 들은 부모님의 삶은 정말 처절했다.

개인파산을 신청하지 못한 이유는 지인들의 빚 때문이 아니었다. 은행 빚을 탕감 받고, 회사를 정리하면 부족하지만 해결할 수 있는 정도 수준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렇게 하려고 했는데, 문제는 사채였다. 그 아버지 친구라는 사람이 회사 회계를 맡고 있었는데, 사채까지 빌려서 횡령을 하였다고 한다.

사채업자들에게 개인 파산을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을 받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법의 보호를 믿고 강행하시려고 하셨다.

그러나 이어지는 사채업자들의 협박에 개인 파산을 포기하셨다. 그건 협박의 대상이 부모님이 아니라, 나와 어린 동생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를 두고 떠난 건 우리를 위해서였다.

돈만 꼬박꼬박 갚으면, 우리를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라고 믿고, 몸을 숨기기로 결정하셨다고 한다.

사채업자들에게 반대로 협박을 한 것이다. 돈을 받고 싶으면 우리 아이들을 괴롭히지 말라는 협박을.

사채업자들을 피해 여관 달방에서 지내며 하루 종일 일을 하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식당에서 설거지와 요리를 만드셨고, 아버지는 새벽부터 우유배달, 건설현장 노무직, 택배 상하차, 목욕탕 청소까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모든 시간에 하셨다.

잠도 부족하셔서 쪽잠으로 버티셨다. 밥은 점심에 빵 하나로 버티시며.

그렇게 10년이었다.

우리에게 보내주시던 한 달에 100만원을 뺀 대부분의 돈을 빚을 갚는데 사용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돈을 입금 하시고는 엄마와 같이 펑펑 우셨다고 한다.

우리 아이들 보고 싶다고.

그날 10년 만에 처음으로 두 분이서 짜장면에 탕수육을 시켜 드시고는 손을 잡고 주무셨다고 하셨다.

그렇게 아버지께서는 얼굴에 눈물이 흐른 자국과 입가에는 웃음을 띠며 편안하게 주무시다 돌아가셨다고 한다.

아버지를 만나면 하고 싶었던 말들이 정말 많았다. 힘들었던 고등학교 시절에 대한 이야기. 그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송이와 같이 버틴 이야기. 송이가 한국대학교에 입학한 이야기. 너튜버를 하며 돈을 번 이야기.

이제는 혼잣말로 전해야하는 이야기들이 되었다.

매일 아버지가 모셔져있는 납골당으로 출근을 하였다. 내 혼잣말은 송이와 엄마와 함께 전셋집에 모여 사는 것 까지 이어지고 나서야 끝이 났다.

“아버지. 이제는 명절 때나 제삿날에만 와야 할 것 같아요. 이제 우리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 자리를 아버지한테 물려받아서 열심히 살아야 해서요. 그래도 가끔 올 테니까 너무 걱정마시구요. 제가 염라 대왕님과 친분이 있으니까 잘 해주실 거예요.”

아버지에게 내 인맥을 자랑하고, 납골당을 나왔다. 너무나 하늘이 맑았지만,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가장이라는 무게가 이렇게 무거운지 몰랐다. 아버지는 이 무게를 항상 어깨에 지고 살아 오셨다는 생각에 다시 울적해져왔지만, 애써 기운을 내보려고 노력하였다.

나는 이제 가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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