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자님 먹고 싶어요-1화 (1/227)

1. 볼모로 끌려가다

평소와는 다른 천장을 보며 잠에서 깬 나는 처음 보는 여성들의 억센 손길에 맡겨져 두 시간 동안 치장을 하고, 한 시간 동안 엉엉 울고 있는 남성을 영문도 모른 채 달래다 황제의 응접실로 끌려갔다.

온갖 보석과 고급스런 장식품들로 꾸며진 응접실에는 나와 같은 화려한 복장을 입은 남성 세 명과, 그들의 앞에 앉아 있는 가운 하나를 걸친 미중년이 있었다.

“화,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구나. 어서 앉거라.”

달랑 가운만 걸친 황제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에 벌벌 떨며 비어 있는 자리에 앉자, 중후한 황제의 목소리가 응접실을 울렸다.

“2황자부터 말해 보거라.”

“예, 폐하. 저 메이븐 세네카, 아스본 왕국의 테코 철광 채굴권 계약을 진행해야 합니다. 아스본 왕국의 콜란 공작과 성사한 계약인지라 제가 아닌 다른 이가 손을 댄다면 테코 철광은 프레오나 제국으로 넘어갈 것입니다. 또한 로이븐 형님께서 맡겨 주신 가타나 상단의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현재 가타나 상단은 세네카 제국의 40퍼센트 상당의 물류가….”

“그만. 2황자는 그만하면 되었다. 다음 3황자가 말해 보거라.”

“폐하, 우선 저의 무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전쟁에서 패배한 저희 세네카 제국의 여론이 많이 좋지 않습니다. 수도 귀족들은 겸허히 받아들이는 듯하나 몇몇 귀족은 프레오나 제국의 귀족과 접선했다는 첩보를 얻었습니다. 세가 기울지 않게 그들이 관리하는 지방 귀족들을 처리해야 합니다.”

“그렇군. 잘 알겠다. 그 건은 3황자에게 맡기지. 다음 4황자.”

“….”

“도브로미르, 네 차례다.”

내 이름이다.

그동안 헬조선을 버텨 온 눈칫밥으로 돌아가는 상황은 대충 알겠다. 이곳 세네카 제국은 적국(敵國)인 프레오나 제국과 전쟁을 치렀다. 결과는 아주 처참하게 발리는 바람에 적국으로 볼모를 보내야 했고. 이 자리는 세네카 제국의 황제가 황자들 중 누가 볼모로 갈 건지 고르는 자리다.

1황자인 로이븐 세네카는 황태자의 신분이니 당연히 남아 있어야 했고, 2황자인 메이븐 세네카는 영리한 사람이라 자신의 쓸모를 주장했다. 3황자인 퍼디스 세네카는 귀족들과의 연결선으로 황제에게 일거리를 받았고. 바로 몇 시간 전에 4황자가 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4황자는 지금 당장 프레오나 제국으로 가거라.”

“….”

“대답.”

“예, 폐하. 명에 따르겠습니다.”

빙의하자마자 적국으로 끌려간다. 이런 개좆같은 경우가 있나.

* * *

소문은 삽시간에 번졌다. ‘4황자께서 볼모로 끌려가신대.’ ‘도브로미르 님이 가신대.’ 황궁의 모든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한다. 18세의 나이로 프레오나 제국으로 끌려가는 가련한 황자님, 그게 나다.

황궁의 모든 사용인들은 내가 물 한 잔을 마셔도 눈물을 흘렸고, 눈만 깜박여도 입을 가리며 무릎을 꿇었다. 한두 번이야 감동이지 몇 번 반복되니 짜증 나더라. 그래, 나 끌려간다. 내가 뒤지는 것도 아닌데 뭐 그렇게 슬퍼하냐, 라고 말할 순 없었다.

‘도브로미르 세네카’ 4황자는 고운 심성과 상냥함으로 세네카 제국의 보물이라 불리며 모두에게 사랑받았으니 저들의 반응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나는 억지로 하하 웃으며 눈물을 쏟는 이들을 달래 줘야 했다.

빙의된 몸이지만 4황자의 기억과 기본 지식은 전부 가지고 있었다. 4황자의 마지막 기억은 볼모로 끌려가기 싫으니 누군가가 자기 대신 가게 해 달라며 끈질길 정도로 악마에게 사정을 하는 것이었다.

악마의 이름을 간절하게 부르면 그 악마가 영혼을 받으러 찾아온다. 4황자는 그런 무서운 리스크를 감수하고 악마를 불러 사정할 만큼 볼모로 끌려가기 싫었나 보다. 그 덕분에 내가 4황자의 몸에 빙의된 것이다. 아마 내가 만난 악마와 같은 악마였겠지.

“황자님, 프레오나 제국으로 함께 갈 시종과 시녀는 고르셨습니까? 만일 아직이라면 제가….”

“아닙니다, 황자님! 제가 따라가겠습니다!”

“황자님, 제가…!”

4황자 담당 시종과 시녀들은 프레오나 제국으로 끌려가는 4황자와 함께 가고 싶어 했다. 좌천되는 것과 마찬가지지만 여리여리하고 가녀린 4황자를 무자비하고 악독하다는 프레오나 제국으로 혼자 보내는 게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대충 자기가 돌봐 줘야 된다 뭐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나 데려가도 괜찮을 거다. 다들 4황자를 사랑하고 아껴 주니 뒤통수 처맞을 일도 없을 테고, 볼모로 끌려가는 상황에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닐 테니 말이다. 그래도 가능하다면 조용하고 과묵한 사람이 좋은데.

“마린, 나랑 같이 가 줄래?”

“네, 황자님.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4황자의 기억을 바탕으로 가장 얌전한 시녀를 떠올렸다. 마린은 4년 전에 황궁으로 들어와 3황자를 모시다 4황자의 궁으로 인사이동을 한 사람이다. 한때 왕의 스승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로테스 남작가의 핏줄이라 그런지 영리하고 생각도 깊다. 무엇보다 해야 할 말만 한다.

다른 시종과 시녀들은 ‘오늘 날씨가 좋아요, 황자님.’, ‘누구네 집 영식이 이랬대요.’, ‘누구네 집 영애가 누구네 집 영식이랑 야반도주를 했대요.’, 심지어는 ‘오늘 3황자님께서 4황자님께 꽃을 보냈어요!’라며 별로 궁금하지도 않고 쓸모도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가시가 그득하게 박혀 있는 장미를 보낸 이유를 짐작조차 못 하는 그들은 그저 해맑게 ‘황자님과 잘 어울리는 예쁜 꽃이네요~.’라며 내 방 화병에 장식했다. 그 장미꽃을 말없이 치운 것이 마린이다.

“그, 그럼 시종은 제가…!”

“트리티스, 말은 고맙지만 같이 갈 수 있는 사용인은 단 한 명뿐이야. 폐하께서도 그리 말씀하셨고.”

“흐…흐윽.”

“울지 마. 난 정말 괜찮아.”

괜찮기는 뭐가 괜찮냐. 볼모로 끌려가는 황자의 운명은 딱 하나다. 적국의 황궁 가장 깊은 곳에 가둬져 사람도 못 만나고, 햇빛조차 못 보며 늙어 죽는 것. 그나마 제국의 볼모라 그에 맞는 대우는 해 주겠지만… 글쎄, 잔악하고 악독하다 알려진 프레오나 제국의 황제가 나를 어떻게 대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가자마자 목이 안 잘리면 다행이지. 목 댕강은 절대 사절이다.

“황자님… 흑… 꼭 건강… 건강…. 흐어어엉.”

“응, 난 건강하게 잘 지낼 거야. 내 걱정 많이 하지 말고, 너희도 건강하게 잘 지내.”

“크흡…. 황자니임…!”

“부탁이야. 아프지 말고, 다들 행복하게 살아 줘.”

내가 황자라는 신분이 아니었다면 이 사람들은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같이 도망치자고 질질 짰을 거다. 내가 가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니까 말리지 못하는 거지. 아무리 사랑스럽고 안쓰럽다 해도 자신들의 가족과 이웃의 편안한 생활과 바꿀 만큼 소중하진 않나 보다.

4황자는 겁쟁이다. 겁쟁이기 때문에 몸을 사렸다. 자신의 궁 안에서만 살며, 최소한의 교류와 최대한의 인품을 끌어내 사람을 대했다. 덕분에 ‘힘 하나 없는 사랑스러운 4황자’가 되었다. 명예롭던 외가의 가문은 누군가의 음모로 멸문했고, 어머니가 없으니 주어진 세력도 없다. 살아는 남았지만, 간신히 숨만 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놈이 볼모로 끌려간다니, 나 죽으러 갑니다~ 하는 거랑 다를 게 없다.

“아우야.”

“아, 형님. 오셨습니까?”

“그래, 짐은 다 쌌느냐?”

“제가 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시종들이 잘해 줬을 겁니다.”

“그래, 네가 할 일이 뭐 있겠느냐.”

3황자인 퍼디스 세네카. 어두운 야욕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이다. 겉으로는 똑똑하고 너그러운 3황자를 연기하지만, 실상은 겁쟁이 4황자 괴롭히기를 좋아하는 악질일 뿐이다.

황제가 되고 싶지만 평민인 어머니의 배에서 태어나 황궁에서의 입지가 좁은 퍼디스는 1황자의 세력과 정반대인 귀족들을 겨눠 사냥을 했다. 스스로 쟁취한 권력을 영리하게 휘두르는 놈이다. 내 외가의 가문을 멸문시킨 것도 이놈이다. 자신은 천하게 태어나 개고생하고 있는데, 네놈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편하게 살고 있구나, 라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4황자를 괴롭혔다.

시작은 장미꽃이었고, 점점 심해져 죽지 않을 정도의 독초와 독차, 아끼던 시종과 시녀들의 실종, 살해 위협과 심지어는 가문의 멸문까지. 겁쟁이에게 열등감 느끼는 사이코 새끼다.

“맞습니다. 제가 무슨 할 일이 있겠습니까.”

“내 아우 네가 참 걱정이다. 유약한 심성을 가진 네가 그 프레오나 제국의 볼모로 가다니.”

“….”

“걱정 말거라. 네가 내세울 것은 없지만, 네 어미를 닮아 그 낯짝 하나는 뛰어나니 객사하지는 않겠지.”

“그렇습니까. 그것 참 감사한 덕담이군요, 형님.”

“사랑스러운 아우가 타국으로 끌려가는데, 내 너에게 덕담 하나 못 해 주겠느냐.”

가증스러운 새끼.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 성질을 돋우는 퍼디스는 재수 없는 표정으로 씩 웃으며 자신에게 고이 당하고 있는 내 반응을 즐겼다. 이쯤이면 눈물 한 방울 떨궈 줄 타이밍이지만, 난 그 겁쟁이 4황자가 아니다.

“형님이 하시는 것 전부 잘되길 아딘께 기도하겠습니다.”

“고맙구나. 나도 아우 네가 잘 지내길 기도하겠다.”

“마벨에게 말입니까?”

“눈치가 많이 늘었구나.”

악신에게 기도하겠다는 퍼디스를 비웃어 줬다. 악신을 섬기는 것은 사람들에게 꺼려지긴 하지만 죄는 아니다. 간절한 사람은 뭐든 한다고, 악신 마벨에게 저주의 기도를 하는 것이 천신 아딘에게 기도하는 것보다 더 강력하다.

퍼디스는 지금껏 4황자를 저주했지만, 그 덕분에 4황자는 악마를 만나 원하는 것을 이뤘다. 퍼디스에게 벗어나는 것과, 볼모로 끌려가지 않는 것. 악마도 만능은 아니라 유능한 퍼디스를 볼모로 보내는 건 불가능했지만, 4황자가 볼모가 되지 않고, 퍼디스에게서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인 영혼을 바꿔치기 한 거다.

“형님과 지낸 세월이 있지 않습니까. 이제야 저를 벗어나게 되는 거니 힘 좀 푸시지요.”

“뭐라?”

“지금까지 많이 힘드셨지요? 아우가 언제 치고 올라올지 모르니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셨겠네요.”

“가소롭구나. 그래, 마지막이니 어디 더 지껄여 보거라.”

“혹시라도, 프레오나 제국으로 가는 길에 암살자를 심어 두셨다면 어서 빨리 명을 거두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제가 죽어 버리면 그다음은 형님이니까요.”

“….”

“제 어미는 멸문 당했고, 형님의 어미는 힘이 없지 않습니까. 지금의 형님은 황후를 이길 수 없습니다.”

“네가 감히….”

“전 형님의 머리가 있어야 할 곳에 온전히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형님 대신 가는 길이 꽤 멉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허락 없이 자리를 뜨는 것은 예법에 어긋나지만, 이제 퍼디스는 내게 함부로 할 수 없을 거다. 4황자의 다음이 자신인 걸 잘 알고 있을 테니.

“아, 형님께선 제 낯짝이 뛰어나다 하셨지요? 형님의 말씀대로 이 뛰어난 낯짝 잘 써 보겠습니다. 혹시 모르지요, 강국의 권력을 잡게 될지. 또 봅시다, 퍼디스.”

나와 퍼디스의 간극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봤을 마린의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짧게 고개를 숙여 기특하다는 듯 시선을 맞췄다.

“나 잘했어?”

“네, 제 속이 다 풀립니다.”

“그래도 불안하네. 죽이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어디 하나 부러트릴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프레오나 제국에서 황자님을 모실 사람을 보냈을 테니,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은 이상 황자님을 건드릴 수는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슬슬 가자.”

마린이 안내하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황궁 정문에는 화려한 마차와 그 뒤를 이어 프레오나 제국으로 보낼 공물을 가득 실은 당나귀와 말 여섯 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태자와 2황자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고, 황제는 보이지 않았다. 전쟁에서 져 기분이 저조한 건 알지만 지 아들이 팔려 가는데 얼굴도 안 보러 오고 대단한 부성애다.

“건강하거라.”

“네, 형님.”

“네가 많이 그리울 것이다. 프레오나 제국의 황제가 허락한다면, 내게 편지를 보내 주거라. 너의 소식을 듣고 싶구나.”

“상황이 허락한다면 노력해 보겠습니다.”

“편지를 한다면, 세 달에 한 번은 너의 벗인 에반스터 영식을 보내겠다. 그러니 너무 무서워하지 말고, 건강하고 씩씩하게 잘 지내거라. 알겠느냐?”

“네, 걱정하지 마세요. 전 잘 지낼 겁니다.”

“그래.”

황태자 로이븐은 퍼디스와 달리 착한 놈이다. 퍼디스보다 덜 영리해서 문제지. 그래도 2황자가 버티고 있으니 퍼디스로 인해 무너질 일은 없을 거다, 아마도. 이젠 내 알 바가 아니지만 내 소식이 궁금하니 편지하라는 형님의 말에 매정하게 굴 만큼 인성이 터지진 않았다.

“3황자를 조심하십시오. 욕심이 큰 인물입니다.”

“내 걱정은 말고, 네 걱정을 하거라.”

“네, 이만 가 보겠습니다. 형님들 무탈하십시오.”

황궁에서 나의 적은 퍼디스뿐이었다. 다들 이렇게 사랑해 마지않는 4황자는 어째서 퍼디스에게 그리 쩔쩔맸을까.

황태자와 2황자의 배웅을 마지막으로 마차로 다가갔다. 마차와 가깝게 서 있던 은색의 갑옷을 입은 여자가 내게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프레오나 제국의 제2기사단 단장 쿠나라고 합니다.”

“반갑네. 호위 때문에 온 것인가?”

“예, 그렇습니다. 황자님을 안전하게 프레오나 제국으로 모시기 위해 왔습니다.”

“그래, 잘 부탁하네.”

“넵, 맡겨 주십시오.”

마린은 말을 탈 수 없어 마부의 옆자리에 앉았고, 쿠나 경은 잘빠진 흑마 위에 올라탔다. 나는 세네카 제국 기사들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 탔다. 이젠 돌아올 수 없는 곳이니 마지막으로 눈에 담으려 황궁을 관망했다. 세네카 제국에서 마지막으로 보게 된 얼굴은 높은 발코니에서 무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는 황후의 얼굴이었다. 재수 없게.

“황자 전하, 출발하겠습니다.”

마부의 목소리를 끝으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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