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프레오나 제국, 로테 별궁에서 살다 (1)
일주일하고도 반을 꼬박 달렸다. 걱정했던 퍼디스의 암살자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나타나지 않은 건지 못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국으로 가는 길은 생각했던 것보다 안전했다. 대신 피곤한 일들이 꽤 많았다. 마을이 없는 경우엔 숲에서 노숙을 했으며, 식량이 다 떨어졌을 땐 사냥을 나가 멧돼지를 잡고 불에 구워 먹었다. 한두 번은 캠핑 온 것 같아 재밌었지만 두세 번 노숙이 이어지자 불편한 땅바닥 때문에 허리가 끊어질 것 같더라.
“마린은 괜찮아?”
“네, 저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황자님은 괜찮으신가요?”
“참을 만해. 쿠나 경은 어떤가?”
“저는 익숙해져 있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닐세. 내가 힘이 없어 쿠나 경이 두 배로 고생하고 있지 않나. 면목이 없어.”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저는 황자님을 보호하기 위해 왔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딱 한 번, 마물 떼의 습격을 받았었다. 놀 몇 마리와 오크, 그리고 트롤이 습격했다. 놀은 처리하기 쉽지만 오크와 트롤은 무식하게 힘만 세고 회복력은 어찌나 빠른지 ‘4황자’는 검술과 연이 없는 사람이라 내가 도와줄 수도 없었고, 마린은 간단한 호신술은 가능했지만 나와 도긴개긴이었다. 덕분에 세네카 제국의 기사들과 쿠나 경만 죽어났다. 오크는 간신히 죽였지만, 트롤은 죽이지 못해 유인을 해 일행과 떼어 놨다.
원래 가야 하는 길은 이번 전쟁으로 인해 길이 사라졌다. 때문에 조금 돌아가는 길로 가기 위해 숲을 지났는데 운 나쁘게 마물 떼와 마주친 거다. 마물들은 종류에 따라 무리를 만들어 지내거나 홀로 지내며 인간 마을과 멀리 떨어진 어둑한 곳에서 살기 때문에 웬만하면 마주치지 않지만, 운이 없는 날에는 마주치기도 한다. 운이 없는 건지, 퍼디스의 저주가 먹힌 건지…. 어찌 됐건 살았다는 건 변함없다.
프레오나 제국은 화려한 세네카 제국과는 다르게 수수하게 아름다웠다. 나무와 흙으로 지어진 집들은 벽돌로 만들어진 것보다 단단해 보였고, 상점가로 보이는 거리에 포진해 있는 가게들은 손님들을 모으기 위해 열심히 홍보를 했다. 상점가의 모두가 밝은 에너지를 뿜어내며 활기차게 장사를 하고 있었다. 황궁도 상점가도 같은 사람이 사는 곳인데 이렇게 다르구나.
“황궁으로 들어가시면 바로 황제 폐하를 알현하셔야 합니다.”
“바로?”
“예, 황제 폐하께선 지병으로 몸이 약하십니다. 요양을 하셔야 하기에 알현은 오전에만 받습니다.”
“아… 그렇군. 알겠네.”
마을에 들르지 못한 며칠간 팔자에도 없는 노숙과 개고생을 한 내 상태는 더할 나위 없이 꼬질꼬질했다. 그런데 이 상태로 제국의 황제를 알현한다니… 망신 망신 개망신이다. 능력 없고 힘이 없는 4황자가 볼모로 버려진 것보다 더 큰 망신은 없다 생각했지만, 이건 너무한 거 아니야? 적국이긴 하지만 상대는 황제라고. 최소한 샤워는 하게 해 주지.
마린이 눈치껏 손거울과 물에 적신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덕분에 검댕이가 잔뜩 묻은 얼굴을 말끔하게 닦아 냈다. 찝찝한 냄새는 안 나는 것 같고, 마물 떼에게서 도망 다니느라 해진 옷은 불편해도 마차에서 갈아입었다.
황궁으로 들어온 마차는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곧이어 마차가 완전히 멈추고 두 번의 노크 소리가 들린 뒤, 마차 문이 열렸다. 가까이 다가온 쿠나 경이 에스코트를 해 주었다. 볼모는 처음이라 어떤 태도를 고수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대충 예의 바르게 행동하면 되지 않을까.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몇십 명가량의 프레오나 기사들이 나를 포위한 채 황궁 앞까지 걸어갔다. 마치 죄인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포박 안 한 게 어디야.
그들은 황제가 있는 알현실로 나를 안내했다. 세네카 제국에서 보내는 공물은 미리 마중 나온 재무를 보는 귀족이 가져갔기에 공물도, 마린도 없이 혼자 황제를 보러 들어갔다.
보석으로 치장한 세네카 제국의 화려한 알현실과는 달리, 프레오나 제국의 알현실은 무(武)의 제국이라는 말이 어울리듯, 검을 모르는 내가 보아도 대단한 명검들이 줄기차게 늘어서 있었다. 위압감에서부터 세네카 제국의 패배다.
“세네카의 4황자 도브로미르 세네카, 프레오나 제국의 태양 스파딘 프레오나께 인사드립니다.”
“잘 왔소. 듣던 대로 고운 외관을 하고 있군.”
“감사합니다.”
지병이 있다는 황제는 누군가의 부축을 받으며 거대한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아파서 덜덜 떠는 노견을 보는 것 같았는데, 말 그대로 오늘내일할 것 같은 꼴이다. 아… 이거 잘못하면 역적 돼서 목 댕강 각인데.
“오는 길은 괜찮았는가?”
“예, 아무 문제 없이 잘 왔습니다. 걱정 감사드립니다.”
아무 문제가 없긴 개뿔, 마물 떼 마주쳐서 멘탈이 탈탈 털리고 왔습니다. 멀기도 오지게 멀고, 오는 길도 너무 불편했습니다. 부서진 길은 복구하고 부르시지 그랬어요. 덕분에 삥 돌아 와서 개피곤합니다. 게다가! 아무리 제가 볼모라 해도 호위 기사로 쿠나 경 하나만 보내는 건 어느 제국 예의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건 제가 죽길 바란 건지, 쿠나 경이 죽길 바란 건지 잘 모르겠군요. 제가 도착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쿠나 경은 무슨 죄야!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못 할 뿐이지.
“짐이 몸이 약해 그대의 말동무가 되어 주진 못하지만, 여기 있는 황태자가 잘 도와줄 것이다. 볼모로 왔어도 짐은 그대가 편하게 지냈으면 한다.”
“타루스 프레오나라고 한다.”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의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악독하다는 황제는 어디 가고, 눈앞에 있는 황제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유약한 황제였다. 덕분에 황궁 가장 깊은 곳에 가둬져 햇빛도 못 보고 늙어 죽지는 않을 것 같다. 다행인 건가.
이만하면 됐다며 나가 보라 손짓하는 황제와 황태자에게 인사를 올린 뒤, 조용한 걸음걸이로 알현실을 나갔다. 알현실 밖에선 고개를 빳빳하게 치켜 든 프레오나 제국의 기사들과, 그놈들과는 다르게 고개를 숙여 예의를 표한 쿠나 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에서 편히 쉬면서 온 나보다 쿠나 경이 더 피곤할 텐데 안내까지 하는 건가.
“여독을 푸셔야 하니 바로 거처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고맙네, 쿠나 경. 아, 그런데 마린은 어디에….”
“마린은 이미 거처로 가 쉬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쿠나 경을 선두로 안내받은 거처는 황궁과 멀리 떨어진 조금 허름한 별궁이었다. 별궁의 입구 앞에서 몇몇 사용인들과 마린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린의 뒤에 서 있던 젊은 청년이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걷는 나를 발견하고는 크게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와 인사했다.
“세네카의 4황자님을 뵙습니다. 저는 오늘부터 저하의 편의를 담당하게 될 시종 텟이라 합니다.”
“반갑네. 앞으로 잘 부탁하지.”
“네, 성심성의껏 잘 모시겠습니다. 이제 방으로 안내해 드리게….”
“황자! 4황자!”
누군가가 별궁이 쩌렁쩌렁 울릴 만큼 큰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고개를 돌려 누군지 확인하니 알현실에서 보았던 황태자였다. 이름이 뭐더라. 타노스였나…?
“황태자 전하,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그대가 우리 프레오나 제국에 처음 온 날인데, 단출하게 밤 연회라도 열까 해서 불렀네.”
“감사한 말씀이지만 괜찮습니다. 볼모로 온 신분인 제게 연회는 과분합니다.”
저거 또라이 새끼 아니야? 볼모로 잡혀 온 사람을 위해서 연회를 열겠다는 것은 ‘내가 너 엿 먹인다.’와 같은 맥락이자, ‘너네 제국 우리 제국한테 개발림. 적국 공기 마신 소감은 어떰?’ 이 말이다. 눈치가 없는 건지, 멍청한 건지, 아님 자연스럽게 엿 먹이는 퍼디스 같은 놈인 건지. 저런 놈이 황태자라니, 프레오나 제국도 망조가 보이는구나.
“뭐 어떤가. 이렇게 만난 거 좋게 좋게 지내자고.”
“하하….”
“타루스 전하, 여기 계셨군요.”
“오스먼드, 네놈이 왜 여기에 있는 것이냐?”
아, 타노스가 아니라 타루스였군. 타루스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그보다 조금 더 순하게 생긴 남자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상대의 얼굴을 본 타루스는 그의 이름을 낮게 읊조렸다. 오스먼드… 오스먼드…. 아, 오스먼드 프레오나. 프레오나 제국의 2황자다. 내가 볼모로 끌려오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저 녀석의 존재 때문이다. 내 기준, 퍼디스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영리하다 알려진 이번 제국 전쟁의 최대 수혜자이자 공로자, 그리고 프레오나 제국의 실질적 지배자다.
타루스는 이름만 황태자일 뿐, 귀족들의 지지와 황실 업무는 전부 오스먼드가 맡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적국의 황자이자, 교류가 없는 4황자도 알고 있을 정도로 위험한 요주의 인물이다. 프레오나 대귀족가의 영애들은 황태자인 타루스가 아닌, 오스먼드를 최고의 신랑감이라고 생각한다나 뭐라나.
오스먼드는 어떻게 알고 이곳으로 왔는지, 억지를 부리려는 타루스를 달래는 척 찍어 눌렀다.
“타루스 전하, 행실을 바르게 하셔야 합니다. 그가 볼모라곤 하나 적국의 황자입니다. 전쟁에서 패하고 볼모로 끌려온 황자에게 연회라니요. 정말 잔인하십니다.”
“나는 그럴 의도가….”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해도, 폐하의 상태가 위중하신 이 상황에 연회를 열 정신이 어디 있습니까. 자중하십시오.”
“….”
“4황자, 제가 대신 사과하겠습니다. 타루스 전하의 무례를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지요.”
“…배려 감사합니다, 오스먼드 2황자 전하.”
오스먼드는 바다같이 푸른 머리칼로 얼굴을 가린 채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그것을 보았다. 내일이면 이 일이 황궁 전체에 퍼질 것이다. 내가 용서를 하든 안 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오스먼드에게는 ‘타루스가 볼모로 잡혀 온 4황자에게 무례를 저질렀고, 그것을 오스먼드가 나서서 사과하고 잘 해결했다.’라는 말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야 황제가 죽으면 귀족들이 자신의 편이 될 테니까. 저거 만만치 않은 놈이다. 생긴 것처럼 순한 성격이면 얼마나 좋아?
나도 모르는 사이에 프레오나 제국의 황좌 싸움이 시작됐다. 협상을 하려면 타루스 황태자보단 오스먼드 2황자와 하는 게 더 현명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