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프레오나 제국, 로테 별궁에서 살다 (2)
“그럼 들어가시지요. 시간이 있을 때, 제 궁으로 초대하겠습니다. 같이 차 한잔하시죠.”
“네, 좋습니다. 그럼.”
황태자와 2황자에게 짧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별궁으로 들어갔다. 가깝게 따라붙은 텟이 나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타루스 황태자와 오스먼드 2황자에 대해 촉새처럼 떠들었다.
“타루스 전하와는 엮이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괴팍하시고, 오만하시고, 마음에 안 들면 다 치워 버리십니다. 그것이 사람이어도 치워 버립니다. 게다가 추문도 많아 대귀족들도 황태자 전하는 꺼려 하십니다. 저번에는 학술원에서 나온 학생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학술원을 부수지를 않나, 옛날에는 오스먼드 전하의 시종이 마음에 든다며 겁탈을 했다는 추문이 있었는데, 제 시종 동기가 황태자 전하의 방에서 그 아이의 옷을 봤답니다. 정말 무서운 분이시지 않습니까? 그에 반해 오스먼드 전하는 무예와 학식이 풍부하실 뿐더러 성품까지 완벽하십니다. 기사단을 이끄는 것으로 충분히 바쁘실 텐데, 이젠 위독하신 황제 폐하 대신 정치까지 하십니다. 정말 대단하시지 않습니까?”
“대단하시군.”
“예, 프레오나 제국의 모두가 오스먼드 전하께서 다음 황제가 되길 원하고 있습니다.”
“그렇군.”
귀가 아프다. 텟은 입에 모터라도 달렸는지 쉴 새 없이 조잘조잘거렸다. 게다가 이자는 뭘 믿고 내게 촉새질을 하는 거지? 방금 이야기한 모든 것이 황족 모독죄인데 텟은 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하긴커녕 해야 할 말을 했다는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볼모로 잡혀 온 4황자에게는 막 말해도 된다, 뭐 그런 건가. 무시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지? 난 아무 힘도 없는 볼모일 뿐이네.”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황자님께서 큰일 없이, 안전하게 지내셨으면 해서.”
“그렇군. 날 위해…. 고맙네.”
날 위해는 무슨, 2황자 끄나풀인가 보네. 그러니 황족 모독죄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볼모로 잡혀 온 내게 2황자를 두둔하는 거겠지. 아무런 힘도 없는 내게 2황자를 두둔해서 얻어질 이익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2황자는 내가 필요한가 보다. 내가 필요하니 이런 끄나풀도 달아 놓고, 아까 별궁 앞에서 타루스와 있을 때 갑자기 찾아온 거 아닐까. 지켜보고 있던 거겠지. 평화롭게 지내자는 의미면 좋겠다만, 목 댕강은 절대 사절이다.
“이 방이 황자님이 쓰실 방입니다. 이 로테 별궁에서 가장 크고 조경이 훌륭하지요.”
“고맙네. 아, 오늘은 너무 피곤해 아무것도 하지 않을 예정이니 식사도 필요 없네.”
“알겠습니다. 그럼 전 내일 아침을 올릴 때 뵙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황자님.”
“그래, 그대도 잘 쉬고. 아, 가기 전에 마린을 불러 줄 수 있나?”
텟은 마린을 불러 달라는 내 부탁에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곧이어 노크 소리와 함께 마린이 들어왔다. 마린은 별궁으로 들어오자마자 옷을 갈아입었는지 지저분하던 옷 대신 깨끗한 세네카 제국의 사용인 옷을 입고 있었다. 프레오나 제국에서 세네카 제복을 입어도 돼…?
“황자님, 부르셨습니까?”
“응. 마린, 나 따라와 줘서 고마워. 이제야 말하네.”
“제가 오고 싶어서 온 것입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마린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고 했다. 오히려 세네카 제국을 벗어나서 기분이 좋다고 위로도 해 줬다. 마린은 나랑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되게 점잖네. 생각하는 것도 어른스럽고. 어른이지만 생각이 어린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타루스와 퍼디스 같은 놈들. 퍼디스한테선 벗어났다지만 타루스가 걱정이다. 그 관상이 딱 나 힘들게 할 관상이던데.
“내가 약한 말은 안 하려 했는데, 앞으로 힘들어질지도 몰라. 아까 보니 황태자랑 황자 놈 관상이 영 좋지 않더라.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 걔네가 너 괴롭히려 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 알았지?”
“괜찮습니다. 전 저보다 황자님이 더 걱정이 됩니다.”
“난 괜찮아. 굴려지다 버려지거나, 운 나쁘면 목 댕강이겠지.”
“그럴 일 없을 겁니다. 만일 있다 하더라도 제가 모시고 도망가면 괜찮을 겁니다.”
“하하하. 그래, 고맙다. 이만 나가 봐. 마린 너도 쉬어야지.”
“황자님 의복은….”
“정복도 아닌데 이 정도는 나 혼자 할 수 있어. 앞으로 간단한 건 내가 알아서 할게. 마린은 어려운 것만 도와줘.”
“네, 편히 쉬세요.”
가볍게 목례를 한 마린이 나갔다. 난 입고 있는 옷을 바로 벗었다. 황제 알현을 위해 정복까지는 아니지만 단정하고 깔끔한 옷을 입어야 했기에 입은 옷은 크게 움직이기 어려웠고, 답답하게 목을 조르는 크라바트도 불편했다.
벗은 옷은 바닥에 던져 놓으면 다른 시종이 정리할 테지만, 왠지 미안하니까 잘 개어 의자 위에 올려놨다. 알아서 가져가겠지. 아, 개면 안 가져가려나. 잘 개어진 옷을 다시 헝클었다. 내일 빨래는 어디에 내놔야 하는지 마린한테 물어봐야지.
아무리 4황자의 기억이 있다고 해도, 높은 사람들이 쓰는 말투는 어렵다. 오지고 지리고 렛잇고를 사용하던 평범한 대학생이 하루아침에 신분 차이가 있는 판타지 세상에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다.
4황자의 기억조차 없었으면 사람들은 어수선한 내 행동을 보고 악마의 손이 닿았다거나 악마라거나 그런 이상한 죄목으로, 볼모는 무슨 세네카 제국에서 목 댕강 되지 않았을까 싶다. 마신은 믿어도 악마는 싫어하는 사람들이니까. 사실 무슨 궤변인지 모르겠다. 마신이나 악마나 나쁜 놈들인데, 그게 그거 아닌가.
‘4황자’가 바라는 대로 생판 모르는 남인 내가 대신 볼모로 끌려왔고, 퍼디스한테서도 벗어났다. 악마에게 빌었던 4황자의 소원은 전부 이루어졌다. 성불해서 악마한테 먹혔을 4황자는 그렇다 치고, 이제 난 뭐 하냐. 앞으로 세네카 제국의 4황자로 살아가야 하는데 볼모로 끌려와서 하는 건 아무것도 없고, 힘도 없고, 돈도 없으며, 목숨 위협도 받아야 하고, 2황자한테 감시당하면서 살아야 해? 하아, 빙의 인생 진짜 착잡하네.
* * *
2황자한테 붙어 파리처럼 손 비비는 건 쉽겠지만, 나중에 쓸모가 없어지면 목 댕강 각이고. 황태자는 망조고, 황제는 다 죽어 간다. 귀족한테 붙으려 해도 귀족들은 세네카 제국의 사람인 나를 내키지 않아 할 테다.
완전한 고립이다. 2황자가 뭘 노리는지 알겠다.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유일하다는 것’, 그걸 알리고 싶나 보다. 그러니 아침부터 입에 모터를 단 텟이 열정을 가득 담아 2황자 자랑을 하는 거겠지. ‘오스먼드 황자님이 마물을 다 물리쳐.’ ‘오스먼드 황자님은 불세출의 천재.’ 그만 듣고 싶다.
“그래, 이만 나가 보거라. 마린은 남고.”
“네, 맛있게 드십시오, 황자님!”
텟이 나가고 남은 마린이 붉은색의 벨벳 케이스에서 은수저를 꺼냈다. 아직 2황자가 나를 필요로 하니 독을 쓰지는 않았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황태자가 돌아서 나를 죽이려 할 수도 있고, 2황자가 협박 의도로 독을 탈 수도 있다. 하아, 밥 먹는데 이렇게까지 피곤하게 먹어야 하나.
텟이 가져온 아침식사는 나름 성의가 있었다. 옥수수를 잘게 갈아 버터와 밀가루를 섞은 콘 수프, 딱딱한 바게트 빵과 얇게 썰려 있는 고다 치즈, 곁들여 먹을 토마토와 바질 및 각종 허브로 양념을 한 두꺼운 스테이크가 예쁜 접시에 올려 있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고기라니. 이 세계 사람들은 어떻게 돼먹은 위장을 가지고 있는 거야.
“이거 먹고 뒤지라는 건가.”
“프레오나 제국은 사냥을 주로 하는 무(武)의 나라라서 사냥한 짐승의 고기를 매 식사마다 먹는다 합니다.”
“혈관 막혀서 일찍 죽겠네. 채소는 이 붉은 것뿐이니.”
“점심은 채소 위주로 준비하겠습니다.”
“부탁할게. 고기도 좋지만, 아침엔 빼 줘.”
“네, 알겠습니다.”
마린이 전해 준 은수저로 콘 수프를 떠먹었다. 수저가 멀쩡한 것을 보면 독이 들어 있진 않았나 보다. 맛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콘 수프다. 4황자의 기억에 세네카 제국의 황궁은 각종 향신료와 다양한 식재료를 이용해 최상의 요리를 내놓는다. 황궁 요리사의 봉급이 기사의 봉급과 비슷할 정도니, 세네카 제국의 음식에 대한 애정은 남달랐다. 그 남다른 음식 좀 먹어 보고 올걸 그랬다.
육해공의 다양한 음식을 먹는 4황자의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 음식의 특정한 맛에 대한 기억은 없다. 기억 속의 4황자가 아무리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먹고 있다 해도, 정작 난 그 맛을 모르니 이게 맛있는 건지, 그냥 예쁘게 꾸며 놓은 음식인 건지 구분을 할 수가 없다.
딱딱한 바게트는 한번 찢어 콘 수프에 담가 부드럽게 만들었다. 바짝 구워서 그런지 그대로 먹으면 치아가 깨질 것 같았다. 바게트 속의 부드러운 부분은 치즈와 토마토를 올려 카나페를 만들어 먹었다. 육즙이 가득한 스테이크는 적당히 썰어 두세 번 먹고 관뒀다. 품질 좋은 고기야 대충 구워도 맛있지만 기름이 좔좔 흐르는 스테이크는 역시 아침으론 무리였다.
아침에는 누룽지나 간단한 국에 밥 말아 먹는 게 최고인데. 콩나물국, 미역국, 된장국. 아, 된장국은 이제 먹을 일 없겠지….
“끔찍하다….”
된장, 고추장, 간장, 심지어 김치도 없다. 김치는 평소 안 먹었지만, 해외여행 가면 꼭 생각나는 게 김치다. 그 외에도 고추장, 된장은 한국인의 얼이 담긴 장(醬)인데 그걸 이제 먹지 못한다니. 비행기에서 괜히 고추장을 튜브에 넣어서 나눠 주는 게 아니다. 볼모가 된 것보다 한국 음식을 먹지 못한다는 게 더 슬프다. 앞으로 어떻게 버티지? 김치 없음 못 살아, 정말 못 살아.
“식사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다시 올릴까요?”
“아니야. 그냥 앞으로 이런 거 먹고 어떻게 살지 걱정한 것뿐이야.”
“…앞으로 제가 요리하겠습니다.”
“그런 게 아니야. 마린은 쉬어.”
“…네,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응, 그럴게.”
마린은 내가 얼마 손대지 않은 식사를 치우고 밖으로 나갔다. 이제는 먹을 수 없는, 좋아했던 한국 음식을 생각하며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정원사가 꽃이 가득 핀 정원을 손질하고 있었다. 주인이 없어 여태껏 버려졌던 별궁이라 오래 방치된 정원에는 이름 모를 꽃은 물론 잡초와 잔가지가 무성했다. 정원사는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을 단숨에 잘라냈다. 땅에 떨어진 꽃은 정원사의 발에 짓밟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