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자님 먹고 싶어요-4화 (4/227)

4. 프레오나 제국, 로테 별궁에서 살다 (3)

온몸이 아리는 근육통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손발이 차고 몸이 으슬으슬한 거 보면 이 약한 몸뚱이로는 이번 주 내내 몸살을 앓을지도 모르겠다.

시종에게 의사를 부르고 약을 처방해 달라고 하면 되겠지만 이상하게 그러기가 싫었다. 난 볼모로 온 몸이고, 아무래도 타지에서는 조심해야겠지. 그럼 약을 어디서 구하지? 마린한테….

몸살이 났을 때 먹어야 하는 약을 생각하니, 4황자의 기억을 둘러볼 때와 비슷하게, 약에 관한 정보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에서 흘러넘쳤다.

마냥 쭈그리로 살지는 않았었나 보다. 조금은 쓸모가 있네. 덕분에 이런저런 처음 보는 약초를 조합해 몸살감기에 잘 듣는 약을 만드는 법을 알아냈다. 문제는 그 약을 만들 약초를 구하는 건데….

“제엔장….”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건 둘째 치고, 약초가 자라는 온실이 어디인지도 모르겠다. 시종인 텟에게 알려 달라 하기엔 조금 떨떠름하고…. 답답한데 그냥 혼자 나가 볼까. 이 근처만 돌아다니면 아무도 모를 것 같은데.

똑똑.

적막했던 방 안에 노크 소리가 울렸다. 곧이어 조심스레 문이 열리고 하얀색의 수건을 작은 트레이 위에 올린 마린이 들어왔다.

“안녕, 마린. 잘 잤어?”

“네, 저는 잘 잤습니다. 황자님께서는 어젯밤 불편한 곳은 없으셨습니까?”

있었지, 아무래도 잠자리가 바뀌니까 불편하더라고. 내가 쓰던 침대는 과학이었지만, 이곳의 과학은 그다지 발전되지 않아서인지 허리가 조금 아프네.

“잘 잤어.”

“다행입니다.”

마린은 인자하게 웃으며 적당한 온도로 데워진 젖은 수건으로 정성스레 내 얼굴을 닦아 주었다. 애기도 아니고, 세수 정도는 혼자 할 수 있는데. 혹시 맨날 이래야 해?

“괜찮아.”

“혼자 하시겠습니까?”

“응, 충분히 할 수 있어. 그나저나 조금 답답해서 나가고 싶은데… 괜찮을까?”

“그럼요. 텟을 불러 별궁의 산책로를 물어보겠습니다.”

“아니! 혼자 나가고 싶다는 소리였어. 이 근처만 돌다가 올게. 안 될까?”

비엔나소시지처럼 뒤꽁무니에 사람을 줄줄이 붙이고 돌아다니는 건 질색이다. 마린은 내 질문에 잠시 고민을 하다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세요. 이 별궁 근처라면 별일 없을 겁니다.”

마린에게 별궁 근처를 혼자 돌아다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마린에게 받으면 다 받은 거지 뭐.

“그럼 나 잠깐 나갔다 올게!”

“황자님, 환복은 하시고…!”

“아, 응.”

얌전히 마린이 가져다주는 옷을 입었다. 내 옷장에 있는 옷들은 레이스가 없으면 지옥 간대? 왜 항상 레이스가 달려 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어제 본 황태자와 2황자도 깔끔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왜 나만 레이스야, 왜! 누가 볼까 창피해서 나가지도 못하겠다.

“…다른 건 없어?”

“레이스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 겁니까? 황자님께선 선이 고와 레이스가 잘 어울립니다만,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새로 가져오겠습니다.”

그렇게 말해 주니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하긴, 이 얼굴로 안 어울리는 게 있겠어? 내가 입으면 거적때기도 명품 되고 그러는 거지.

“아니야, 계속 보니 예쁜 것 같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만 그 레이스 옷을 입어 주세요, 내일은 레이스가 달리지 않은 단순한 옷을 찾아보겠습니다.”

“응, 고마워. 그럼 나 얼른 다녀올게!”

아침은 넘어가고, 점심을 먹기 전까지만 돌아오면 된다고 했으니 시간은 충분하다.

로테 별궁 곳곳에 위치한 시종들의 눈을 피해 별궁 밖으로 나섰다. 도둑걸음으로 살금살금 걸어, 문을 지키는 기사의 눈을 피해 맞은편 정원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아무도 보지 못했겠지? 기사와 눈이 마주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착각일 거다.

정원은 작았지만 정원 나름의 로망이 있었다. 내 키를 조금 넘는 덤불은 풍성하게 자라 산책을 위한 길을 만들었고, 그 사이사이를 장식하고 있는 이름 모를 꽃은 어젯밤 정원사에게 짓밟힌 꽃과 같은 꽃이었다.

하늘색의 수술을 둘러싼 여덟 장의 노란 꽃잎이 하늘을 향해 있는 이 꽃은, 내가 살던 곳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꽃이었다. 다른 예쁜 꽃들과는 달리 가시도 없고, 향기도 없고, 색 또한 화려하지 않다.

왜 이런 꽃을 심었을까? 약초를 찾는 건 둘째 치고 이 꽃이 어디서 온 것인지 궁금했다. 마린한테 물어보면 알려 주려나?

땅에 떨어진 꽃이 없나 살펴보았지만 정원사가 다녀간 탓인지 지나칠 만큼 깨끗했다. 그렇다고 살아 있는 꽃을 꺾기는 싫고, 카메라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황태자 전하, 이쪽 길은…!”

“4황자를 만날 것이다.”

“하, 하지만 폐하께서….”

“그래서 평소보다 일찍 나온 게 아니겠느냐. 이 이상 그 입을 놀리면 내 친히 찢어 줄 테니 어디 한번 계속해 보거라.”

내가 입은 레이스 옷보다 훨씬 화려한 옷을 입은 황태자의 행렬이 눈앞에서 지나갔다. 덤불 속에 있지 않았다면 그가 날 보았을지도 모르는 거리였다.

망할, 저 새끼 설마 나 보러 온 거야? 왜? 우리 어제 처음 봤잖아?

로테 별궁을 나왔을 때처럼, 황태자의 행렬을 지켜보며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아무리 나보다 흉측한 옷을 입고 있다 해도, 난 이 레이스가 주렁주렁 달린 옷을 입고 누군가와 얼굴을 마주하긴 싫었다.

황태자의 행렬이 보이지 않게 되자 바닥에 주저앉아 긴장으로 멈추었던 숨을 다시 쉬었다. 그때, 바스락 하고 물리적인 힘에 의해 덤불이 흔들렸다.

“으악!”

긴장이 풀려 안심하고 있던 참에 깜짝 놀라 크게 소리를 질렀다. 헙! 황태자의 행렬이 근처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재빠르게 손을 올려 입을 틀어막았다.

덤불을 건드린 생물이 이쪽으로 올 것 같은 느낌에 정리되지 않은 말로 다급하게 제지했다. 제발 사람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존재였으면 좋겠다.

“스탑! 아니, 멈추시오!”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귀를 파고드는 부드러운 중저음에 순간 멍해졌다. 무슨 사람 목소리가….

“괜, 괜찮네. 난 멀쩡하니 오지 말고 거기에 있게나.”

“정말 괜찮으신….”

“정말 괜찮으니 그대는 그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말아 주게!”

이 레이스투성이 옷을 타인에게 보여 줄 순 없다고…!

“알겠습니다.”

건너편에 있는 그가 나를 따라 풀 바닥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덤불 하나를 사이에 두고 침묵하며 서로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근데 이 사람 왜 안 가…?

“그대… 혹시 갈 곳이 없는가?”

“잠시 쉬러 온 것입니다. 혹시 제가 이곳에 있는 게 불편하십니까?”

불편은 아니지, 여기가 내 집도 아니고.

그런데 저 사람은 내가 누군지는 알고 경어를 쓰는 건가? 황궁에 들어온 걸 보면 낮은 신분의 사람은 아닐 텐데, 내가 누군지 알고….

“그대는 내가 누군지 알고 있는 것인가?”

“짐작은 하고 있습니다.”

하긴, 로테 별궁 정원을 서성이며 하대를 쓰는 사람이 나 말고 더 있을까. 아, 하나 더 있겠네. 저 황태자 놈. 저놈 시키는 왜 남이 머무는 곳 앞에서 어슬렁거리는 거야?

딱히 내가 누구인지 감추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볼모로 온 4황자가 황태자를 피해 있다는 걸 알리면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할 테니. 말도 잘 통할 것 같은데 시치미를 떼자.

“…누굴 짐작하든 틀렸네.”

“네, 제가 틀렸습니다. 그러니 편히 계세요.”

반대편의 그는 내가 맞다며 걱정 말고 편히 있으라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정하게 말했다. 그 별것 아닌 말에 홀리는 기분이 들었다. 요물인가…?

“아, 고맙네.”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는 목소리인지, 아님 그가 그런 사람인 것인지, 뭐가 되었든 마음에 들었다.

바지에 풀물이 드는 줄도 모른 채 멍하니 앉아 하늘을 바라봤다. 푸르구나. 구름도 몽글하니 예쁘고, 햇살도 따스하니 기분이 가벼워졌다. 이름 모를 꽃도 예뻐 보일 정도니 이 정도면 기분 전환으로 충분하다.

“이 꽃의 이름을 알고 있는가?”

이슬이 매달린 꽃잎에서 시선을 떼 멍하니 그가 있을 덤불 반대편을 보며, 그에게 말을 걸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 물었다. 외로웠나? 소통이 하고 싶은 건 아닌데.

“제노아스입니다.”

“제노아스?”

“네, 프레오나에서만 자라는 꽃이라 당신에겐 낯설겠군요.”

그렇구나. 그래서 4황자의 기억에도 없었던 거고. 그가 말해 준 꽃의 이름을 속으로 나직하게 읊조렸다. 제노아스… 제노아스…. 예쁘다.

“이 꽃에도 꽃말이 있는가?”

“4황자! 여기 있다 들었네! 어서 나오시게!”

덤불 뒤의 목소리를 기다리다, 뜬금없이 들려오는 소음에 편안해졌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어느새 황태자가 정원까지 나를 찾으러 왔는지 가까이에서 우스스한 황태자 행렬의 발소리가 들렸다. 아까 나올 때 나랑 눈이 마주쳤던 문지기 기사 놈이 찔렀구나!

“아씨…!”

만나기 싫다! 절대 안 된다! 이 꼴로 황태자를 만난다면 하루 종일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있을 거다. 세수도 안 할 거고, 밥도 안 먹을 거고, 숨도 몰아서 쉴 거다!

“이 길을 따라 쭉 걷다 보면 별궁의 뒷문이 나옵니다.”

“어?”

“만남을 원하시지 않는 것 같아서요.”

“그, 그래. 고맙네! 이 은혜는 잊지…!”

“4황자! 내 그대를 찾은 것 같은데, 이만 나오는 게 어떤가!”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은 목소리에 이름 모를 그가 알려 준 길을 향해 달렸다.

아, 저 남자 이름을 안 물어봤네. 뭐, 운명이면 다시 만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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