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프레오나 제국, 로테 별궁에서 살다 (4)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별궁의 뒷문이 보였고, 식재료가 가득 든 나무 상자를 들고 옮기던 시종이 나를 알아보고 급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4, 4황자님을 뵙습니다!”
“수고하게!”
예의바른 시종을 빠르게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어느 쪽 길로 가야 할지 두리번거리다, 눈에 보이는 계단으로 올라갔다.
“황자님!”
“마린…!”
올라가던 계단에서 내려오던 마린이 나를 발견하곤 활짝 웃었다.
“황자님! 운이 좋으셨어요. 방금까지 프레오나의 황태자가 황자님을 내놓으라며 어찌나 수선을 떨던지.”
“응, 봤어. 정원까지 찾으러 왔던데. 이젠 갔어?”
“아직 정원을 살펴보시는 것 같습니다만. 괜찮습니다. 미리 언질을 주신 것도 아니고, 저렇게 찾다 돌아가셔도 황자님께선 잘못한 거 하나 없으십니다.”
단호한 마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갑자기 찾아온 저 새끼 잘못이지.
“후우…. 아침부터 뭐 좋다고 날 찾아온 건지….”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리 황자님이 아름답다고 해도, 어딜 감히…. 아무튼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마린 너도 이 얼굴에 진심이구나? 그래, 이 얼굴이 좀 그렇지.
“황자님, 허기지시죠? 곧 점심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응, 부탁할게.”
별로 허기진 느낌은 들지 않지만 준비해 준다니까 먹어야지.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 기대어 앉았다. 창문으로 보이는 정원에는 타루스의 행렬이 나를 찾았는지, 정갈했던 꽃나무들이 뒤집어져 있었다.
어차피 정원사가 와 치울 거라 어질러진 건 상관은 없지만, 활짝 펴 있던 제노아스가 꺾이고 밟힌 게 아까웠다.
* * *
두 번의 노크 소리가 들리며 텟이 들어왔다. 텟의 아침 인사는 항상 오스먼드 전하에 대한 찬양으로 시작했는데, 오늘은 평소와는 조금 다른 게 2황자의 찬양 8할, 나머지는 주절주절 날씨라든가 내 상태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오늘은 하늘이 푸르러서 사냥하기 딱 좋은 날이군요. 황자님이 계셔서 더 좋나 봅니다.’라며 구구절절 말을 늘어놓았다. 딱히 바쁘지도 않아서 그대로 내버려 뒀더니 2절을 시작하려 하길래 재빨리 용건을 물었다.
“타루스 황태자 전하께서 에테네 궁에 초대하셨습니다.”
보통 티타임은 예정일의 최소 이틀 전에 알리는 게 예의다. 당일의 초대는 초대가 아닌 통보다. 황태자 정말 못써 먹겠네.
2황자의 충실한 신하이자 끄나풀인 텟은 이 소식을 2황자에게 알려야 했기에, 내가 타루스에게 가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끌고 싶어 아침 인사를 구구절절 늘어놓았나 보다. 너도 나름대로 고생이구나.
“바로 가지.”
“따, 따로 준비는….”
“괜찮네. 준비는 눈을 뜨자마자 다 했으니 이대로 가도 뭐라 하지 않으시겠지.”
“그, 그럼 머리 손질을 해 줄 시녀를….”
“그것 또한 괜찮네. 나의 형님이 말하길, 내 낯짝 하나는 뛰어나니 따로 꾸미지 않아도 된다 하셨지.”
명목뿐이어도 텟은 나를 보좌해야 하는 사람인데, 내가 아닌 2황자를 향한 충성심이 갸륵해 조금 골려 주고 싶어 퍼디스가 한 말을 인용했다. 낯짝이 뛰어나다곤 했으나, 꾸미지 않아도 된다 하진 않았다. 애초에 비꼬려고 하는 말이었을 테고.
텟은 말문이 막혔는지 대답도 하지 않고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예쁜 건 알지만, 그렇게 쳐다보면 부담스러워.
“그대는 다르게 생각하는가?”
“아, 아뇨! 황자님의 미(美)는 대륙 최고의 미일 것입니다! 제가 장담합니다!”
“과장이군. 그리 말해 주니 내 걱정 않고 황태자 전하를 뵐 수 있겠어.”
“알겠습니다. 바로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아니, 마차는 괜찮네. 걸어갈 것이야.”
“아! 네! 길 안내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부탁하네.”
걸어가는 것으로 텟이 2황자에게 보고할 시간을 조금 벌어 줬다. 황태자와의 티타임 시간을 2황자가 어떻게 끼어들어 망칠 것인지 조금 궁금했다.
황태자는 내가 로테 궁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질리지도 않는지 하루가 멀다 하며 나를 불러냈고, 2황자는 그때마다 타이밍 좋게 끼어들어 훼방을 놓았다. 방해받은 황태자가 2황자에게 화를 내는 것도 많이 보았고, 그런 황태자를 언변으로 휘어잡는 2황자도 많이 보았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들의 개싸움을 멀리 떨어져 지켜보는 건 재밌을 거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했지만 그래도 황태자를 만나는 것이니 마린을 불러 간단하게 치장을 했다. 머리를 정돈하는 것 외에는 안 해도 된다 했지만 마린은 붉은색의 타렐트 부토니에를 내 가슴팍에 달아 줬다. 타렐트의 잘 알려진 꽃말은 ‘희생당한 죽은 친구를 슬퍼한다.’로 전쟁으로 희생된 모든 이들을 기리는 꽃이지만, 숨겨진 꽃말은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다.
텟을 따라 걷는 황궁 안은 굉장히 넓었다. 평일의 아침이라 그런가 간간이 귀족들도 마주쳤다. 날 알아본 그들 중엔 내가 눈치 못 채게 조용히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있었고, 대놓고 씹어 대는 사람도 있었다.
“저자인가 보군.”
“맞네, 세네카 제국의 4황자라지?”
“어허, 계집이었다면 오스먼드 전하와 혼인을 해도 좋았을 터인데.”
“그게 무슨 망발인가. 자네 수중에 여식이 없다고 그런 채신없는 소릴.”
“흠! 모두 소리를 낮추게.”
“괜찮네, 설사 듣는다 해도 볼모가 무얼 하겠나.”
내가 저 새끼 얼굴 기억했다. 배불뚝이 너 밤길 조심해라. 마린이 요즘 암살 수법 배우더라. 처음 프레오나 황궁을 산책했을 때, 귀족들의 험담을 같이 들은 마린은 그날부터 독학으로 암살 수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한 손에 들어오는 날카로운 단도를 손질하던 마린의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귀족들은 내가 듣는다 해도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남색이 취향이라는 이프리트 공이 참으로 좋아하겠소.’, ‘이프리트 공은 남색가가 아닐세. 혼인을 하지 않았다고 하나, 그것이 남색가라 할 순 없지 않나. 말을 삼가게, 그리만 공!’, ‘이프리트 공보다는 파이스 공이 더 좋아할 것 같습니다. 그의 영지엔 이미 여럿의 창놈들이 있지 않습니까?’ 등등 암암리에 도는 귀족들의 소문을 들었다.
텟에게 시간을 벌어 주려는 이유도 있지만, 마차를 타지 않은 진짜 이유는 이것이다. 귀족들은 내가 아무 힘도 없는 볼모라는 것을 알고, 나를 깔보고 낮추어 부르며 다른 귀족들의 험담을 했다. 나는 그 험담을 잘 듣고 피할 사람을 피하면 됐다. 한 달 뒤에 있는 황제의 탄신일 연회 때문이라도 프레오나 귀족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야 했다.
“소문에는 저 볼모 황자를 황태자 전하께서 아끼신다 합니다.”
“저도 들었습니다, 그 소문. 그러고 보니 저 황자의 동향은 황태자 전하의 에테네 궁인 것 같습니다.”
“어허, 저 고운 얼굴에 상처가 생기지 않게 기도해야겠군.”
“저런 얼굴에 생채기 한두 개야 괜찮지 않습니까.”
“뭘 모르는군. 백자는 깨끗해야 좋은 것일세. 흠집이 난 것은 깨어 없애지 않나.”
살벌한 소리들을 한다. 뒤에서 걷고 있는 마린의 이가 그득그득 갈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황태자는 프레오나 황궁에서 두 번째로 큰 별궁인 에테네 궁 정원에서 티타임에 필요한 여러 가지 채비를 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텟을 선두로 에테네 궁에 다다른 나를 발견한 황태자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구애를 하는 공작같이 어깨를 폈다. 어깨에 달린 금색의 견장이 찰랑- 흔들렸다.
“4황자!”
“좋은 아침입니다, 타루스 전하.”
“그래, 아침부터 그대를 봐서 기분이 좋군.”
네 기분 좋으라고 나를 여기까지 부른 거냐? 너 진짜 맘에 안 든다. 네가 그나마 사람처럼 생겨서 내가 참는 줄 알아라.
이상하게 신이 나 있는 황태자는 움츠려 있는 내 어깨를 잡아 자신의 곁으로 끌었다. 그러곤 시종이 보지 못할 각도로 몸을 틀어, 살짝 드러난 목덜미를 쓸었다. 갑작스레 닿은 손길에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안내하는 자리로 가 앉았다. 더러워.
정원에 가득 핀 붉은 장미가 퍼디스를 생각나게 했다. 그래도 저 장미는 가시가 없네, 마음에 안 드는 건 똑같지만. 이번 생은 장미와 연이 없나 보다.
황태자는 만개한 장미를 배경으로 그 앞에 나를 앉혔다. 그 맞은편 자리에 앉은 황태자는 뭐가 그리 좋은지 뿌듯하게 웃었다. 시종을 시켜 물을 데우고 회오리 모양으로 예쁘게 말린 검은색의 찻잎을 빻았다. 찻잎이 빻아질 때마다 은은한 훈연 향이 났다.
내가 그것을 신기하게 바라보자 그는 시종을 시켜 찻잎에 대해 설명했다. 그래너스라는 식물의 어린잎을 수확해, 온도가 높아지면 단 향이 풍기는 타르테 나무의 연기로 말린 찻잎이란다. 찻잎만 먹어도 좋다 하지만 차로 우려 마셔야 진정한 그래너스를 느낄 수 있다나 뭐라나.
찻잎을 한 움큼 올린 거름종이에 적당히 데운 물을 천천히 떨어트렸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차의 색은 투명한 보라색이었다. 저런 색은 처음 봤다. 한국에서는 본 적 없어 이곳에만 있는 차인 것 같았는데, 4황자의 기억에도 저런 색을 내는 차는 없었다.
“색이 희한하군요.”
“프레오나 제국에만 있는 차다. 아무나 마시진 못하지만 그만큼 아름답지.”
“그렇군요. 영광입니다.”
“그대의 눈동자와 닮아 있어 특별히 준비했다. 마음에 드는가?”
“네, 마음에 듭니다. 감사합니다, 전하.”
어두운 색의 테이블보로 가려진 공간에선 나의 다리를 찔끔찔끔 건드리는 황태자의 구두가 느껴졌다. 2황자 언제 와. 내가 당근이라도 흔들어야 올 거니? 얼른 와.
황태자는 나를 어떻게 해 보려는 것 같다. 정치적으로 말고 사적으로. 4황자의 기억 속에서도 가끔 이런 놈들이 있었다. 세네카 제국에서 열리는 큰 연회에서 다가오는 사람들. 그들은 4황자에게 친절하게 굴어 유혹했으며, 회유했고, 약을 써 홀리려 했다.
그때마다 나타난 게 로이븐 황태자, 첫째 형님이었다. 로이븐 형님이 바쁘실 땐 메이븐 형님이 나설 때도 있었다. 그에 반해 퍼디스는 절대 나서지 않았다. 그는 주도했으면 주도했지 말릴 사람이 아니었다.
타루스 황태자도 4황자를 유혹하려는 사람들과 같은 부류다. 진심은 아니지만 반반하니 한번 해 보려고. 재미로, 흥미로, 심심풀이로.
머릿속이 싸해졌지만 내색하지 않고 황태자가 내미는 찻잔을 받았다. 금색의 테가 그려진 흰 찻잔 안에는 투명한 보라색의 차가 담겨 있다. 이걸 마시면 황태자의 수청을 들어 줘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변 사또가 주는 차는 마시기 싫다.
“타루스 전하, 여기 계셨군요.”
“또 네놈이냐.”
“예, 폐하께서 저와 형님을 부르십니다.”
늦었지만 적절한 시간에 와 줘서 고맙구나, 2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