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자님 먹고 싶어요-6화 (6/227)

6. 프레오나 제국, 로테 별궁에서 살다 (5)

우연히 왔다거나, 지나가다 보았다거나, 4황자에게 드릴 게 있어 왔다는 진부한 변명을 하던 2황자가 처음으로 황제의 명을 변명으로 사용했다. 다 죽어 가는 황제가 무슨 일로 자신을 부르는지 모르겠는 황태자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2황자에게 반문했다.

“무슨 일 있느냐?”

“글쎄요, 전하가 정무를 내팽개치고 유희를 즐기고 계시는 걸 폐하께서도 아시나 봅니다.”

“….”

“농담입니다. 이번 탄신일 연회 때문에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 봅니다. 가시지요.”

“4황자, 미안하네. 가 봐야 할 것 같아.”

좋은 시간을 방해받아 짜증이 난다는 표정과 함께, 미안한 연기를 하려는지 눈꼬리를 내린 황태자는 내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난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고 폐하께 얼른 가라고 대답을 하려 할 때, 잠자코 있던 2황자가 끼어들었다.

“이런, 그래너스 차를 꺼내셨군요. 4황자, 제가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꽤 괜찮은 이들이니 같이 시간을 보내 주십시오.”

“괜찮….”

“이름난 귀족으로 태어나도 한번 마실까 말까 한, 귀한 차입니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기 아까울 테니 4황자와 어울려 줄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네, 배려 감사합니다.”

자기가 감시를 못 하니 제 사람을 보내겠다? 텟으로는 만족을 못 하나 보다. 거절하려 했지만 2황자의 눈빛이 요상해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하면 바로 목 댕강할 것 같은 눈빛이었다.

2황자는 기다리면 제가 보낸 사람이 올 거니 이것이라도 읽으며 시간을 보내라고 품에서 녹색의 부드러운 천으로 감싸진 책을 꺼내 건네줬다. 책은 제목도 안 쓰여 있고, 엮은 지 얼마 안 된 듯 빳빳했다.

차를 내리는 시종만을 남긴 채 황태자와 2황자가 떠났다. 시종은 예의를 아는 사람인지 내가 물어보는 것을 제외하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2황자가 건네준 책을 폈다. 대륙 공통어로 쓰인 책은 그냥 평범한 동화책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내게 이 책을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허투루 준 것은 아닐 거다. 그 2황자가 평소에 책을 들고 다닐 일은 없으니, 이 책은 내게 주기 위해서 가져온 것이다.

동화책이라곤 하나, 내가 아는 희망차고 교훈이 담겨 있는 그런 내용은 아니었다. 보물을 찾기 위해 광활한 사막으로 가는 어느 소국의 왕자 이야기다. 왕자는 혼자 사막으로 향하다 여러 사람들을 만난다. 낙타를 판매하는 상인, 약한 자들이 가진 것을 빼앗는 도적들, 길을 안내해 주는 묘령의 여인, 통행료를 받는 마을 사람들. 왕자는 결국 보물을 찾아내고 왕궁으로 다시 돌아가지만, 돌아간 왕국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2황자가 어떤 이유로 내게 이 책을 건네준 건지 모르겠다. 어떤 깊은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 단순한 내 피해망상일지도 모른다. 사람을 의심하고 사는 것만큼 불쌍한 인생도 없다는데, 이곳에선 말 못 하는 짐승도 의심해 봐야 한다.

“세네카의 4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세네카의 4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보내 준다던 2황자의 사람이 찾아왔다. 한 명만 올 줄 알았더니 두 명이나 왔다. 한 명은 백금발의 화려한 차림을 한 남자였고, 또 한 명은 검은색의 머리카락과 같은 색의 고아한 드레스를 입은 굉장히 예쁜 여자였다. 여자는 테이블 위에 놓인 그래너스 차를 힐끔 보고는 놀랐는지 살짝 입을 벌렸다. 진짜 귀한 차였나 보다.

“반갑네.”

“몰베인 공작가의 레이가라 합니다. 편히 레이라 불러 주십시오.”

“한나 이프리트라고 합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귀동냥으로 얻어들은 귀족들의 정보 중, ‘몰베인’ 공작가는 없었지만 ‘이프리트’라는 이름은 들어 본 적 있었다. 나이가 찬 주인이 혼인을 하지 않아 남색가라는 소문이 도는 그 백작가다. 백작가의 주인은 젊은 나이로 후계에 올랐다는데 아마 저 여인의 동생이거나 오라비일 것이다.

“그대들이 2황자께서 보내신 이들인가?”

“네, 황자님의 대화 상대를 찾으시기에 지원했습니다.”

“전 제 오라버니인 젠 이프리트 백작 대신으로 왔습니다.”

“그대의 오라비는 많이 바쁜가 보군.”

“송구하오나, 이프리트 영지에 마물 떼가 나타났다 하여 어젯밤 급하게 나가셨습니다.”

“저런,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겠네. 아,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앉게나.”

방금까지 황태자가 앉았던 자리에 레이와 한나가 앉았다. 황태자가 앉았던 자리가 상석이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황태자는 장미를 배경으로 앉은 내 모습이 보고 싶어 앞에 앉은 걸 테니 애초에 상석의 의미가 없는 티타임 자리였다.

안내받은 자리에 앉은 레이와 한나는 황태자의 에테네 궁 정원을 둘러보았다. 프레오나 제국과는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성채와 잘 가꾸어진 나무, 그리고 내 뒤에 있는 장미까지 꼼꼼히 본 뒤, “이곳은 참 아름다운 곳이군요.”라는 짧은 감상평을 남겼다. 곧이어 시종이 따라 주는 그래너스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순수한 감탄을 했다.

“이것이 그래너스 차였군요. 이젠 보통 차들은 입맛에 맞지 않겠습니다.”

“4황자님 덕분에 귀한 경험을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가 주고 간 것이라네. 본래는 황태자 전하와 마셨을 차이지만, 이렇게 그대들과 마시니 좋군.”

그렇게 맛있나? 나도 그냥 마셔 볼까. 어차피 이젠 황태자도 없는데 황태자랑 마시는 것도 아니고.

보라색 차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을뿐더러, 레이와 한나가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차의 맛이 궁금했기에 나도 한 모금 마셨다. 처음 보는 색처럼, 한 번도 마셔 보지 못한 맛을 느껴 보고 싶었지만 단순히 따듯한 복숭아 차였다. 설탕과 얼음을 넣으면 영락없는 복숭아 아이스티다. 태우면 단 향이 나는 장작 연기에 말렸다고 했으니 조금씩 느껴지는 이 떨떠름한 맛은 훈연의 맛일 거다. 나쁘지 않았다. 단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가끔 즐겨 마시던 아이스티를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레이와 한나는 내가 심심하지 않게 다양한 이야기를 해 줬다. 레이는 최근 관심이 생긴 여성이 있는데, 그녀의 눈이 너무 높아 넘어오질 않는다며 상담을 했다. 프레오나 제국의 단 셋뿐인 공작이자 젊고 능력도 있는 자신을 간 보고 있다고. 잘생겼다는 말도 하고 싶은 것 같았지만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다고, 내 앞이라 참는 것 같다.

레이는 정말 모르겠다는 듯 고민하고 있지만 옆에 앉아 입을 다물고 있는 한나는 왜 그런 것인지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도 알 것 같다. 세상 그 어떤 여자가 정부인이 있는데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겠나. 자존심이 있지.

물론 공작가에 첩으로 들어가는 것은 좋은 기회지만, 레이가 관심 있다는 그 여자는 공작가에 첩으로 들어갈 정도로 권력욕이 있는 여자가 아닌 것 같았다. 대찬 성격에 영리하고 똑똑한 것 같은데 그런 여자가 뭐 하러 첩으로 들어가나. 그냥 백작가나 후작가의 정실로 들어가 귀족가를 쥐어 잡겠지.

“글쎄, 난 연정을 쌓아 본 적이 없어 좋은 대답을 해 줄 수 없겠군.”

말 그대로였다. 4황자는 연애를 해 본 적도 없을뿐더러 누굴 좋아해 본 적도 없었다. 나 또한 연애 한번 해 보지 못했다. 물론 바빠서.

레이와 한나는 연정을 쌓아 본 적이 없다는 내 대답에 놀란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이 외모면 한 번 정도는 해 봤을 거라 생각했겠지. 1황자도 아니고 비교적 자유로운 4황자니까. 4황자가 볼모로 프레오나 제국에 오지 않았다면 세네카 황제가 정해 주는 여자와 혼인을 했을 거다. 멍청한 놈이지. 어느 곳에 있든 이용만 당하고 죽었을 멍청한 놈.

내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레이가 퍼르르 놀라 위로 아닌 위로를 했다.

“괜찮습니다! 요즘은 선 혼인, 후 연애라고 합니다!”

“레이 경도 그랬나?”

“전 선 혼인, 후 전쟁입니다. 서로 원했던 혼인이 아닌지라 있는 듯 없는 듯 지냅니다.”

“아, 괜한 걸 물었군.”

“괜찮습니다. 알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테니까요.”

레이는 밝은 얼굴로 하하 웃으며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저 집도 복잡하네. 높은 사람들은 다 저러고 사는가 보다.

“아, 4황자 전하, 혹시 전하께서도 이번 황제 폐하의 탄신일 연회에 오십니까?”

한나가 물었다. 대답 못 해 줄 질문이 아니었기에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가기 싫다 해도 가야 하는 곳이었다. 세네카 제국의 패배, 그리고 프레오나 제국의 승리를 여실히 보여 주는 증거가 나였으니까. 프레오나 제국 황제의 탄신일에 볼모인 내가 있어야 황제가 더 빛나는 법이었다.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거지?”

“죄송합니다. 좋지 못한 질문이었습니다.”

“아닐세, 탓하려는 뜻이 아니었어. 그저 궁금해서 묻는 것이네.”

“주제 넘는 말이지만, 여러 사람이 모이는 자리인 만큼 황자님께서 곤란하실 것 같아 물어봤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레이 경의 곁에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무례를 무릅쓰고 여쭤봤습니다.”

“걱정 고맙네. 하지만 괜찮아. 얼굴만 비치고 돌아갈 예정이라 호위는 따로 필요 없네.”

얼굴만 비치고 빠르게 돌아갈 거라는 말에 레이와 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그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지 다른 사족을 붙이지 않았다. 늙은 귀족들은 내가 못마땅해 핀잔을 줄 수도 있단다.

내가 볼모라곤 하나 어엿한 제국의 황자인데 어딜 감히. 늙은 여우 놈들, 내가 4황자 같은 호구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세네카 황족에겐 가족의 정 같은 것도 없는데 나 건들기만 해 봐. 연회고 뭐고, 세네카 제국의 이름을 걸고 다 엎어 버릴 테니까. 같은 상상을 잠깐 했다. 쩌리가 뭘 하겠다고.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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