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프레오나 제국, 로테 별궁에서 살다 (6)
그들과 이야기하는 건 편했다. 레이는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어 줬고, 한나는 도움이 될 만한 귀족들의 이야기를 넌지시 전해 줬다. 2황자의 사람이라 생각해 수작을 부리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들은 단순한 대화 상대가 되어 줬다. 그들에게 의심병이 돋지 않아서 다행이다.
평소 차에 관심이 많은 한나가 말하길, 그래너스 차는 4년에 한 번 수확하는 희소한 찻잎이라 돈으로 살 수 없을뿐더러, 프레오나 황실에서만 마실 수 있단다. ‘황제의 차’라고 불릴 정도로 귀하다고. 황태자는 그런 차를 나한테 내놓은 거다. 미친 거 아니야? 내가 많이 튕기긴 했지만 남자 하나 꼬셔 보겠다고 별짓을 다 하네.
귀한 차는 맛있었고, 대화 상대는 좋았다. 차를 내준 황태자에게 감사를 해야 하는지, 사람을 보내 준 2황자에게 감사를 해야 하는지, 나를 이곳에 버린 세네카 황제에게 감사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날 이곳에 보내 준 악마에게 감사해야지. 땡큐 소 마치다.
* * *
야심한 시각에 2황자가 찾아왔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날은 황태자와의 티타임을 파훼하고 레이와 한나를 보내 준 날이었다. 그것이 무려 2주 전이다. 그가 날 찾아올 거란 건 알고는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찾아올 줄은 몰랐다.
그는 호위 하나만을 대동하고 정문을 통해서가 아닌, 내가 지내고 있는 방의 발코니로 들어왔다. 그가 들어왔을 때 온몸을 검은색 천으로 가리고 있어 암살자인 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는 자신이 이렇게 쉽게 들어올 수 있는 만큼 언제든지 나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주려는 것 같았다.
“밤늦게 미안합니다.”
“무슨….”
“별일은 아닙니다. 그저 4황자의 이야기를 들어 보려 왔습니다. 제가 앞으로 큰일을 도모할 예정이라.”
“…그것이 저와 관계된 일입니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2황자는 호위를 물리고 방 주인인 나의 허락도 없이 한가운데 놓인 테이블로 가 앉았다. 그냥 막 나가겠다 이거구나. 타루스 황태자의 막 나가는 성격이 어디에서 온 건가 했더니, 형제가 쌍으로 막무가내였다. 황제가 문제였구만. 초장부터 기를 잡겠다는 뜻은 알겠으나 꼴 보기 싫어진다.
“말하세요. 듣고 있습니다.”
얼굴을 가리던 검은 복면을 벗은 오스먼드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겁을 먹었는지 아닌지, 놀라 있는 나의 의향을 살피려는 듯했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이 그의 벽안으로 스며들어 밝게 빛났다. 너도 네 형처럼 잘생겨서 봐주는 줄 알아라.
오스먼드는 침묵하며 나를 살피던 눈을 떼었다.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이 열렸다.
“전 황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시지요.”
어쩌라고. 솔직히 너네 제국 망조 길 걷지 않으려면 양심적으로 황제는 네가 되어야 하는 거 아니냐? 네 형이 황제가 되면 강력한 제국이고 뭐고 삽시간에 망할 거다, 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이어지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이 대륙의 하나뿐인 황제가 될 겁니다.”
“….”
대륙의 하나뿐인 황제, 대륙에 있는 두 개의 제국을 하나로 만든다는 뜻이었다.
세네카 제국은 전쟁에서 패배했지만 제국의 칭호는 유지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세네카 제국엔 드물다는 마법사들이 많았고, 자원이 풍부했다. 또한 광산이 있어 다양한 광석으로 부를 축적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바다가 있어 해상과 해저의 자원을 이용했다.
그 부를 통해 전쟁 패배에 대한 공물을 배로 바치고 볼모를 보내는 것으로 제국을 유지했다. 프레오나 제국도 그 이상 전쟁을 이어 간다면 좋게 끝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그것으로 그친 것이다. 오스먼드는 그런 제국을 상대로 하나뿐인 황제가 된다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칭호의 강등입니까, 제국의 합병입니까.”
“세네카 제국의 뜻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저는 전하께 해 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아닐 겁니다. 4황자는 여러모로 쓸모가 많거든요.”
오스먼드의 신랄한 눈빛에 난 입을 다물었다. 이미 나의 모든 쓰임새를 생각해 놓았는지 높게 올라간 입꼬리가 여상스러웠다. 평소처럼 담담해 보이는 것이 내가 무슨 대답을 하든 상관없어 보였다.
“무엇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말해 주면 내 뜻대로 움직이시겠습니까.”
“전하의 제안이 마음에 든다면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는 순순히 긍정을 표한 나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적국의 황자가 자신의 제국을 무너트린다는데 화를 내거나 거절하진 못할망정 제안을 들어 본다니, 내가 생각해도 이상해 보일 것 같긴 하다.
“세네카 제국에 큰 애정은 없습니다. 그저 나고 자란 곳이라 생각할 뿐입니다. 그러니 2황자의 제안이 제게도 도움이 된다면 못 받아들일 게 뭐 있겠습니까.”
“….”
“볼모로 온 몸입니다. 이변이 없다면 늙어 죽을 때까지 프레오나 제국에서 살아야 하는데, 세네카 제국의 굳건함이 제게 무슨 소용입니까.”
“그대 생명줄의 발판이 되겠지.”
“어차피 버려진 몸입니다. 어느 발판을 밟아야 살 수 있는지는 잘 압니다.”
“버려지다니, 그대는 세네카 제국에서 사랑받고 자랐다 알고 있는데.”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군.”
4황자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았지만 그만큼 많은 사람에게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었다. 퍼디스는 말할 것도 없고, 미혼의 귀족 영식들과 심지어는 황제도 4황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황제는 자신의 모든 자식들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러니 볼모를 보내는 제안도 덥석 받고, 쓸모가 있느냐 없느냐로 구분해 쓸모가 없는 나를 고민도 하지 않고 보내 버렸지 않은가.
“하긴, 마냥 사랑만 받은 이의 성격은 아니라 의아했었지.”
“예?”
“적응을 너무 잘했더군. 눈치도 꽤 좋은 것 같고. 사랑받고 자란 고귀한 이는 그대처럼 행동하지 않아.”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내가 2황자를 분석한 만큼 그도 나를 분석했다. 그렇겠지. 텟이 옆에서 항시 주시하고 있었을 텐데. 난 명배우도 아니고, 천재도 아니다. 매번 2황자의 눈치를 보며 이런저런 변수를 생각하고 행동할 수는 없으니,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가장 안전한 선택지와 피해가 조금이라도 덜 오게 행동했었다. 오스먼드의 눈엔 그런 내 행동이 모두에게 사랑받던 황자로는 보이지 않았나 보다.
프레오나는 전쟁의 제국이라고도 불린다. 과거 프레오나와 전쟁을 치렀던 많은 왕국 중, 항복을 선언했던 왕국은 전쟁을 멈추는 대신 왕이 제일 아끼는 왕자를 보냈다고 한다.
왕자는 나같이 사랑받으며 자랐다 알려졌지만, 그 본질은 망나니였다. 왕자를 담당했던 시종과 시녀들은 그를 보필하며 그가 던지는 물건에 상처를 입고, 목이 잘리기 일쑤였고, 별궁은 무너졌다고 했다. 왕국에서 온 왕자도 그 모양이었는데, 하물며 제국에서 온 황자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거라 생각했단다.
“사랑받고 자란 것과, 막 자란 건 다릅니다. 제가 그 망나니와 같다 생각하신다면 큰 오해입니다.”
“비교 대상이 그 왕자밖에 없었으니 그대도 비슷할 줄 알았다.”
세네카 제국의 4황자는 사랑받고 자란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순한 황자입니다. 그저 사랑만 받고 자란 황자가 아닙니다. 소문은 마지막까지 잘 주워 드셨어야죠. 할 말은 많지만 괜히 말해서 말꼬리를 잡히고 싶지 않았다. 진지하게 들어 주지도 않을 것 같고.
적당히 높임말을 쓰던 2황자는 어느 순간부터 내게 명백한 하대를 했다. 그는 나를 꺼리는 듯한 눈빛을 보내면서도 그 속에선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저런 놈을 제일 조심해야 한다. 권력도 있고, 재력도 있고, 미모도 있고. 없는 게 없는 놈인데 속은 꺼먼 놈. 형제가 쌍으로 검다.
그의 흥미로운 시선에 본능적으로 떨리는 손가락을 쥐어 잡았다. 강자를 앞에 둔 약자의 모습이다. 그가 보게 되면 더욱 얕잡아 볼 테니 긴장했다는 것을 숨겼다. 어색하지 않게 망가진 표정을 조심스레 갈무리하고 이야기의 주제를 바꿨다.
“해 보십시오, 제안.”
“프레오나의 황제는 곧 죽을 거다. 빠르면 이틀 뒤, 늦어도 일주일 안에는.”
쟤도 참 정 없다.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모르겠지만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이었을 텐데 그리 쉽게 죽음을 입에 담다니. 어쨌든 그건 내 알 바가 아니고, 다행인 건 내가 프레오나 제국에 오기 전부터 황제가 지병을 앓고 있었단 거다. 내가 오자마자 시름시름 앓았다면 아무리 의사가 지병이라고 한들, 볼모인 나는 황제 시해 용의자로 끌려갔을 거다.
“타루스는 이변 없이 황제가 되겠지.”
황제는 그저 장자라는 이유로 타루스에게 황태자의 자리를 내준 것이다. 정말 제국을 위하는 황제였다면 정통을 깨서라도 오스먼드에게 황위를 물려줬어야 했다. 비록 검은 놈일지라도 타루스보단 좋은 황제가 될 테니.
“황태자를 죽일 셈이십니까.”
그의 눈빛이 담담하게 날 바라봤다. 그러려나 보다. 오스먼드가 부처도 아니고, 황태자가 늙어 뒤질 때까지 기다려 줄 아량은 없을 거다. 그러니 죽여서라도 황좌를 가져야 할 것인데, 요점은 ‘어떻게’ 황태자를 물러나게 하냐다.
“생각해 놓은 것이 두 가지가 있지.”
“….”
“황태자가 그대를 퍽 아끼더군. 아낀다기보단 가지고 놀고 싶어 하는 것 같다만.”
“전 받아 줄 생각 없습니다.”
“잘됐어. 마음이 동했으면 어쩌나 걱정했네.”
“설마.”
“그래, 그대가 황태자를 궂히는 방법이 있지. 황태자가 그대를 겁탈하려 해 무서워서 그랬다. 깔끔하지 않나?”
오스먼드의 말대로 지금 상황에선 내가 황태자를 죽이는 것이 가장 깔끔할 것이고 또한 프레오나의 귀족들도 납득할 만한 상황일 거다.
내가 프레오나 제국에 볼모로 온 이후부터 황태자가 내게 관심을 가졌던 것을 모르는 귀족들은 없다. 황태자는 볼모를 챙겨 준다고 하기엔 지나치다 할 정도로 관심을 가졌다. 그에 남색이니 뭐니 망측한 추문이 돌아야 했지만 황태자의 기행은 귀족들에게 퍽 익숙한 터라 별다른 말은 없었다. 그저 ‘타루스 황태자가 이번에는 볼모 4황자를 어떻게 해 보려고 하더라.’라는 추문이 퍼졌을 뿐이다.
그 추문의 당사자인 4황자는 남색가가 아니었고, 외모로 보나 성격으로 보나 순진해서 건드리면 움츠릴 것 같다는 평가가 많았다. 그러니 순진한 볼모 황자가 황태자의 기행에 깜짝 놀라 살인을 저질렀다 하면 믿을 사람은 많았다. 그렇지만 난 황족 시해죄로 목 댕강이지.
“방조해 드릴 순 있으나, 제게 시키지는 마십시오.”
“그래, 유약한 4황자가 하기엔 무리가 있겠지.”
뭐가 웃긴지 실실 처웃는 그의 얼굴을 마구 때려 주고 싶다. 잘생겼어도 봐주지 않을 테다. 나한테 살인을 시키려 해? 아무리 사람을 죽이는 데 거부감이 크지 않은 세상이라 해도 이건 아니다. 넌 모르겠지만 난 법치주의 국가에서 살아온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두 번째는 간단해. 그대 대신 내 사람 하나가 희생하는 거지.”
“그걸로 하십시오.”
“….”
냉큼 그러라 했다. 말끔한 내 얼굴을 보는 오스먼드의 표정은 네가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는, 이상한 곳에 박혀 있는 톱니바퀴를 보듯 애매한 표정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꽤 단호한 성격이었군.”
“제가 위험한 것보단 남이 위험한 게 백배 낫습니다.”
“그래, 그렇지.”
“그럼 이제 끝났습니까?”
얼른 갔으면 좋겠다. 얼굴을 마주 보고 말할수록 이 사람이 무서워진다. 황제가 되기 위해 온갖 권모술수를 펼친다는 황궁이라지만 볼모로 온 힘없는 적국의 황자까지 자신의 패로 쓰려는 오스먼드의 냉정함에 치가 떨린다. 그동안 황태자와 살면서 미운 정이라도 들었을 것 같았는데 너무 냉정한 거 아니야?
얼른 가라는 의미로 시선을 피했지만 오스먼드는 나가지 않았다. 내가 시선을 피하며 대화를 단절하든 말든 그는 자신의 계획을 줄줄 늘어놓았다. 마치 인형에게 말을 거는 아이처럼.
“황제가 죽으면 그대를 귀양 보낼 생각이야. 황제가 데려온 볼모이니 내가 책임질 이유는 없거든.”
“….”
“걱정 말게, 좋은 곳으로 보내 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