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프레오나 제국, 로테 별궁에서 살다 (7)
그가 풍기고 있는 검은 분위기 때문인지 그 말이 마치 천국으로 보내 준다는 소리로 들렸다. 찝찝한 마음에 표정을 굳히니 자신의 말이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살벌해진다는 걸 인지했는지 부가 설명을 해 줬다.
“프레오나 제국의 북쪽은 땅이 비옥해 농민들이 살기에 좋은 곳이지. 일평생 화려한 세네카 제국에서 자란 그대에겐 불편하기야 하겠지만, 이곳보다는 낫다 생각하는데.”
“….”
“어떤가.”
네가 불편할 곳으로 귀양을 보내겠다는 오스먼드의 귀한 뜻에 말문이 막혔다. 귀양을 보낼 바에야 그냥 세네카 제국으로 다시 돌려보내는 게 화친에 좋겠지만, 프레오나 제국 귀족들의 눈치도 보일 테니 돌려보낼 수는 없을 거다. 그러니 거슬리지 않게 눈앞에서 치워 버린다는 거고.
오스먼드는 곱게 자란 4황자가 아무것도 없이 평민의 땅으로 가면 적응을 못 해 힘들어하고, 제풀에 지쳐 알아서 세상 하직할 거라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나한테는 감사한 제안이다.
세네카 제국으로 돌아가는 것도 불편하다. 퍼디스한테 멋지게 지랄을 떨고 왔는데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면 일주일 안에 뒤질 미래가 보인다. 그렇다고 프레오나 제국에서 지내기에는 오스먼드가 신경 쓰여 맘 놓고 지낼 수가 없을 거다. 야밤에 발코니로 막 들어오는 황제가 있는 땅이라니, 암살과 심장 마비로 죽을 게 뻔하다.
지금의 오스먼드는 타루스를 몰아내고 프레오나 제국의 황제가 되는 것에 집중해야 했다. 대륙 하나뿐인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황제부터 돼야 하니까. 그러니 현재 타루스에게 영향력이 있는 나를 잡고 휘두르려 하지만 황제가 되고 난 후의 오스먼드는 가차 없이 나를 버릴 것이다. 하나뿐인 황제가 된다 했으니 나를 죽여서라도 세네카 제국과 갈등을 빚어 전쟁의 씨앗을 뿌리겠지. 그와 협상을 하려면 나의 가치가 살아 있는 지금밖에 없다.
협상할 시간이다. 곧 황제가 될 사람이 내가 거슬려서 버리겠다는데 ‘네, 그러십시오. 여기 있기 싫었는데 보내 주신다니 아주아주 좋습니다!’라고 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 순순히 가는 것도 싫다. ‘난 가기 싫은데, 너 때문에 가 준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어야 했다. 북으로 가는 대신 내가 얻는 게 필요하다. ‘목숨 보장’,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거 하나면 된다.
“무슨 이유로 보내실 겁니까?”
“글쎄, 요양이 어떤가?”
“전 아픈 곳 없이 멀쩡합니다.”
“아픈 곳이야 만들면 되지 않나.”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망할 놈. 잘생긴 얼굴 말고는 볼 게 없는 놈. 하나도 져 주려고 하질 않는다. 내 쪽에서 먼저 거래를 하자 말하는 게 빠를 것 같았다. 어떤 제안을 해야 오스먼드를 낚아낼 수 있나 생각할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황자님, 마린입니다.”
아.
오스먼드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앉아 있던 곳에서 몸을 떼곤 가벼운 몸짓으로 소파 뒤편으로 넘어갔다. 숨어 있을 테니 알아서 잘 보내라는 무언의 손짓과 함께.
“응, 들어와.”
들어와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마린이 액체가 들어 있는 컵과 귀리로 만든 쿠키를 올린 작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마린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심장이 요동쳤다. 숨어 있는 오스먼드가 금방이라도 마린에게 살수를 던질 것 같았다.
“응? 평소보다 색이 연하네?”
“항상 드시던 것과는 다른 보리주입니다. 로테 궁의 시종이 말하길, 이쪽이 조금 더 맛있다고 하더군요.”
“아하, 그랬구나. 항상 고마워.”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눈치 빠른 마린이 눈치채지 못하게 평소처럼 행동해야 했다. 설사 마린이 눈치챈다 하더라도 마린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요즘 독학하는 암살 기술도 황자를 향해서는 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러니 마린이 걱정하지 않게 이 일은 아예 몰랐으면 했다.
“그런 의미에서 한 잔 더.”
“안 됩니다. 곧 주무셔야 할 시간이니 한 잔만 드세요.”
“알았어.”
“그럼 가 보겠습니다.”
“응. 잘 자, 마린.”
마린은 특유의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짧게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가져온 접시와 컵은 내일 아침에 나를 깨우러 올 때 치우라는 뜻으로 잘 자라는 인사를 했으니 이제 안 들어올 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난 뒤, 소파 뒤에 숨어 있던 오스먼드가 나왔다.
“잠에 들기 전 술이라니, 술을 좋아했나?”
“그냥 습관입니다.”
“보리주면 강한 술도 아니니 괜찮겠군.”
“하던 이야기 마저 하시죠. 한두 시간 후면 그릇을 가지러 다시 올 겁니다.”
오지 않을 테지만 온다고 말해 놨다. 그래야 저놈이 일찍 나가지.
오스먼드는 마린이 가져온 귀리 쿠키를 하나 집어 들었다. 쿠키의 단면을 돌려 보다 금세 질렸는지 다시 내려놨다. 집었으면 먹어야 하는 거 모르냐. 우리 마린표 귀리 쿠키가 얼마나 맛있는데. 평범한 귀리 쿠키랑은 차원이 다르다고. 네가 쿠키 맛을 알아?
“다시 묻지. 북쪽으로 가는 건 어떤가?”
“제가 그렇게 해서 얻는 이익이 무엇입니까.”
“이익이라. 목숨이 붙어 있는 걸로는 만족을 못 하는 건가?”
아무리 황제가 되었다 해도 볼모를 이리 보내고 저리 보내고 할 수는 없다. 오스먼드의 말대로 요양이든 뭐든, 볼모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 황궁에서 벗어날 수 있다. ‘거슬리니까 보내 버릴 거다.’라는 억지스러운 이유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볼모 본인과 제국의 최고 결정권자인 황제가 서로 동의한다면 못 보낼 것도 없다. 오스먼드의 입장에선 서로 동의하는 게 일을 처리하기 편하니 내게 협박 비슷하게 물어보는 거다.
그리고 목숨이 붙어 있기는 개뿔. 누굴 바보로 아나. 내가 황궁에서 죽으면 일이 복잡해지니까 시골로 보내서 죽인다는 거 아냐.
내가 황궁에 머물 때 죽게 되면 논란이 클 거다. 아마 제일 간단한 독으로 죽일 테지만, 보통 황족은 독에 내성이 있어 독을 사용하지는 않을 거다. 종반에는 암살자를 보내겠지. 그렇게 되면 제국의 명성이 떨어지고, 황궁 경비가 엉망이다, 책임을 물어야 한다, 누가 죽인 거냐 등등 일이 복잡해질 거다. 그러니 시골로 보내서 산에서 구르다 죽었다, 바다에 빠져 죽었다, 마물을 만나서 죽었다, 뭐 그런 평범한 사고사로 위장할 것이다.
“목숨이 잘 붙어 있을지 모르겠군요.”
“하긴, 사람 일은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니.”
“하아, 서로의 속을 다 알고 있는 마당이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제가 안전하게 살아 있는 편이 전하께는 도움이 될 겁니다.”
“도움? 그대가?”
하찮은 생물을 보는 듯한 눈빛이다. 자신에게 있어 내 쓸모는 없다는 듯 경시하는 그의 얼굴에, 망가지려는 표정을 가다듬고 침착하게 말했다.
“전 세네카 제국의 4황자입니다. 버려진 몸이라 하나, 제가 프레오나 제국에서 죽으면 전쟁이 다시 시작될 텐데, 그것을 원하는 것입니까?”
“이미 이긴 전쟁, 또 치른다 해도 이길 자신이 있네.”
“아뇨, 이번엔 어려울 겁니다. 전하도 아시다시피 저희 세네카 제국은 마법사의 제국이라 불릴 정도로 마법사가 많습니다.”
마법사들은 독립적인 성정을 가지고 있어 국가가 전쟁을 치르든, 고사를 지내든, 자신의 일이 아니라면 관심도 갖지 않는다. 프레오나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마법사에 연연하지 않았던 걸 테다.
“그깟 마법사 몇 명….”
“예, 그깟 마법사가 딱 스무 명 참전했었습니다. 군사는 3만 명이 채 안 됐었고, 마법사는 아주 소수였습니다. 제 아버지인 라이언 황제는 그것으로도 이길 수 있다 생각했을 겁니다. 그 오만과 자만심이 저희 세네카 제국의 패배의 원인입니다.”
“그래서.”
“다시 전쟁을 하게 된다면 라이언 황제는 마법사들을 모을 것입니다. 그때는 쉽게 지지 않겠지요.”
“그들이 다음 전쟁에 협조를 해 준다는 보장이 없지 않나.”
“아뇨, 이번엔 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숨죽여 먹이를 낚아채려는 타이밍을 재는 악어처럼, 그는 나를 조금씩 도발하며 정보를 빼내려 했다. 2황자의 대화 패턴을 알 것 같았다. 큰일을 먼저 말하고 작은 일은 대수롭지 않게 말해 큰일을 부각시킨다. 그리고 덫을 놓는다. 대상을 고립시키며, 도움을 줄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 생각하게 한다.
황태자가 내게 관심을 쏟았다는 것에서 망했겠지만, 지금같이 도망갈 곳 없는 데서 위협을 받으면 무서워서라도 정보를 다 불 줄 알았나 보다. 날 너무 우습게 보고 있었네.
“비록 정치 한번 해 보지 않은 애송이라 하나, 모국의 기밀 정보를 적국에 알릴 정도로 멍청하진 않습니다.”
“이미 알려 주지 않았나. 마법사가 그대들의 무기라고.”
“그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 않습니까.”
마법사가 세네카 제국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오스먼드가 모르고 있을 리는 없었다. 프레오나 제국은 검으로 유명한 제국이니만큼 마법사의 유입을 싫어했다. 오스먼드도 마법사를 싫어하는 부류일 것이다. 그런 오스먼드가 마법사의 정보를 몰랐다? 말이 안 된다. 그렇지만 마법사의 목적은 모를 테지. 마법사가 무엇으로 움직이는지도.
하지만 오스먼드는 마법사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이 마냥 무적이 아닌 걸 알고 있으니까. 프레오나는 검을 쓰는 제국이고, 그만큼 검의 귀재들이 많은 곳이니까. 마법사는 도움이 안 되는 이야기였군. 방향을 돌려야겠다.
“대륙의 하나뿐인 황제가 된다 하셨습니까. 그렇다면 프레오나 제국의 황제부터 되셔야 할 겁니다.”
“그대가 걱정하지 않아도 그리될 것이다.”
“이대로 제 목이 잘리기엔 저도 전하도 아쉬우니 저와 거래를 하시겠습니까.”
“거래라?”
무릇 거래는 내세울 것이 있는 사람과 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과 하는 거래는 거래가 아닌 강탈이다. 그렇지만 반대로 생각한다면 난 잃을 게 없는 사람이고, 오스먼드는 잃을 게 많은 사람이다. 난 돈도 권력도 명예도 없지만 오스먼드에겐 전부 있으니.
“귀양을 보내신다 하셨습니까. 전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세네카 제국을 건드리든 무엇을 하든 상관없습니다. 단, 제 목숨은 놓아 주십시오.”
“내 그대를 쓸 곳을 다 정해 놨건만.”
“너무 뻔하지 않습니까.”
무덤덤한 어조로 나의 쓸 곳을 정해 놨다 말하는 오스먼드에게 비소를 날렸다. 그는 기선 제압을 했다. 하지만 협박이 아닌 협상에서의 기선 제압은 하등 쓸모없다. 판은 뒤집는 사람에게 더 큰 힘을 가져다주니까. 나랑 거래를 하겠다 하는 순간, 넌 탈탈 털리고 돌아가게 될 것이다.
“뻔하다라.”
“전하가 황제가 되고 나면, 절 죽이고 세네카 제국에 도발과 선전 포고를 하시겠지요. 그것이 전쟁에 있어 가장 정석인 방법이니까요.”
“그래, 그러려 했지.”
“그게 뻔하다는 겁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라이언 황제가 왜 저를 볼모로 보냈겠습니까. 전 제 형님들과 다르게 세네카 제국에서 쓸모가 없습니다. 다르게 보자면, 이곳에 볼모로 와 죽는 것이 제 쓸모인 것이지요.”
지금쯤 오스먼드의 머릿속에선 작은 폭죽이 터졌을 거다. 쓸모없어 버리는 패로 사용하려 했던 4황자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으니. 내 발언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생각해 보기보다 내가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가 더 중요할 거다. 2황자는 이해 타산적이니 내가 자신에게 쓸모가 있다 생각된다면 태도를 바꾸겠지.
“라이언 황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