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자님 먹고 싶어요-9화 (9/227)

9. 프레오나 제국, 로테 별궁에서 살다 (8)

“글쎄, 그자의 생각이 내게 중요한가?”

“다시 묻지요. 그가 왜 저를 이곳에 보냈다 생각하십니까.”

“….”

“전하는 제가 세네카 제국민의 사랑을 받고 자랐다 들으셨다죠? 그것만큼 제국민을 도발하기 쉬운 명분이 없겠군요.”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황제라는 족속들은 생각하는 게 다 거기서 거기인가 봅니다. 제 아버지도 전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계실 테니까요.”

2황자가 생각하듯 라이언 황제도 생각하고 있을 거다. 4황자는 제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자랐고, 그 황자가 죽으면 제국민들은 분노할 거라고. 2황자의 입장에선 도발을 하려는 이유로 그것만큼 편하고 효과가 좋은 게 없을 거라 생각할 테고, 라이언의 입장에선 평화를 지향하는 제국민을 납득시켜 전쟁을 다시 일으키는 이유로 그것만큼 좋은 이유가 없을 거라 생각할 거다.

둘의 목적은 전쟁을 다시 치르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시기가 다르다. 라이언 황제는 가능한 빠를수록 좋을 것이고, 오스먼드는 황제가 되고 나서 안정이 된 이후를 노리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그 둘의 차이이자, 이 차이가 날 살게 할 것이다.

“제 아버지는 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국가가 패전국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

“제가 죽으면 곤란한 사람은 전하뿐입니다. 황제가 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고 싶진 않을 테지요.”

“너….”

“냉정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죽으면 세네카는 프레오나를 공격할 것입니다. 이번엔 만반의 준비를 했을 테지요. 그런 세네카 제국을 당신의 프레오나가 이길 수 있습니까? 아마 힘들겠지요. 시기가 좋지 않습니다. 늙은 황제가 죽었고, 새 황제가 생길 것이며, 그 황제가 교체될 것인데 전쟁까지 일어나다니요. 그것은 프레오나 제국의 악재입니다.”

담담했던 그의 표정에 희미한 균열이 일었다. 그래, 계속 그렇게 초조해져 봐.

“지금의 전하는 절 건드려서 좋을 것이 없습니다.”

타루스를 배제하는 것에 시간을 쏟고 황좌에 올라 때를 기다리며 제 목을 치시든, 살아 있는 저를 이용해 타루스를 배제하고 황좌에 빠르게 올라 제국을 안정시킬 시간을 벌어 세네카를 치시든, 전하께 있어 확실한 이익을 취하십시오.

확실한 이익, 오스먼드가 가장 원하는 것이다.

“저와 거래를 하시지요. 제가 전하를 빠르게 황좌로 올려 드리겠습니다. 대신 전하는 저를 건들지 마십시오.”

“그대가 얻는 이익은 목숨이고, 내가 얻는 이익은 프레오나 제국의 황좌뿐이니 거래의 수지가 맞지 않는군.”

“아니죠. 제가 얻는 이익은 목숨이 아닌 그저 목줄을 벗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선 빠르고 안전하게 황좌로 올라가시는 겁니다.”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아니, 넌 절대 못 해. 네 사람을 쓴다는 것 자체가 네가 죽였다는 꼴이 되니까. 타루스가 길 가다가 꽥 죽어도 다들 네가 한 짓이라고 생각할걸.

“황태자가 어떻게 죽든 귀족들은 전하를 의심할 것입니다. 친족을 죽이고 황좌에 오른 황제를 귀족들이 좋아할까요.”

“좋아하겠지. 황태자는 폭군이고, 나는 성군이니.”

“지금이야 그러시겠지요. 나중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귀족이 있을는지…. 황제는 모두의 시선이 가는 자리라 배웠습니다. 대귀족 모두가 전하의 편은 아닐 겁니다. 그때도 지금처럼 말씀하실 겁니까?”

“….”

“황태자를 죽일 정당한 이유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전하는 그저 황좌에 빠르게 올라, 저는 무시하고 세네카 제국을 칠 방법을….”

“수가 뻔히 보이는 거래를 할 만큼 나는 멍청하지 않아, 4황자.”

“전하는 그저 절 해하지 않는다는 맹세를 해 주시면 됩니다. 전하께는 남는 장사일 텐데요.”

오스먼드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거래를 받아들이기엔 나중에 있을 이득이 아쉽지만, 지금밖에 얻을 수 없는 이득을 거부하기엔 지금의 오스먼드는 부족한 것이 많았다. 나는 더욱더 오래 살기 위해 더 많은 변수를 생각해야 했다.

음습한 구렁이가 수백 마리 들어 있는 사람을 설득하는 건 어렵다. 높은 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천성이 그렇다. 사람에게 휘둘리고 싶어 하지 않고 사람을 휘두르며 사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원체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교활한 사람들은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오스먼드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했다.

“단순히 전쟁을 원하는 불씨로 절 사용하시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으나, 권하지도 않겠습니다.”

“왜지?”

“시간이 지나면 전 제국민들에게서 잊힐 것이고, 프레오나 제국에 회유당한 배신자라 불릴 수도 있겠지요. 사실이 아니더라도, 아버지는 세네카 제국의 여론을 그렇게 만들 것입니다. 그때 저를 죽여 봤자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세네카의 황제는 그런 짓을 할 정도로 그대에게 애정이 없는 것인가.”

“네, 아버지는 자식도 재물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볼모를 보내라는 프레오나 제국의 제안을 덥석 물지 않으셨습니까.”

진실을 살펴보는 눈빛이 거칠었다. 넘어와라. 넘어와라.

“내가 그대를 지금 쓴다면 내가 얻는 이익은 안전하게 황좌에 오르는 것이고, 세네카의 황제가 손해를 보는 것은 무엇이지?”

“명분입니다. 전쟁을 다시 치르려는 명분. 명분을 잃은 아버지는 프레오나를 건드릴 수 없겠죠.”

“그대의 생각을 말해 보게.”

넘어왔다.

“황태자가 저를 겁탈했다는 소문을 퍼트리십시오.”

“그것이 세네카의 명분이 되겠지.”

“아뇨, 그 정도로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상스럽기는 하나, 옛 세네카 제국의 볼모는 물건과 다름없었습니다. 저도 알고 있는데, 아버지도 잘 알고 있겠지요.”

“그래서.”

“이프리트 경, 그자를 쓰십시오.”

“허.”

생각지도 못한 패였는지, 오스먼드는 헛웃음을 토해 내며 나의 발언이 어처구니가 없음을 여실히 표현했다. ‘맹랑한 것’, 딱 그 짝이다.

“남색가라는 추문이 있더군요. 절절한 사랑 이야기 하나 만들면 재밌지 않겠습니까.”

나의 생각을 훔쳐본 오스먼드의 입가엔 작은 꽃이 피었다.

“이프리트 경은 패로 쓰기엔 아까운 인물인데.”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그자가 가장 어울릴 것 같은데.”

나이가 찼는데도 혼인을 하지 않는 어린 백작, 단신으로 마물 떼와 싸워 살아남은 검의 귀재, 종파가 없다 알려져 2황자를 비롯해 황태자와도 안전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는 중립자. 오스먼드의 말대로 버리는 패로 쓰기엔 이프리트 백작은 아까운 사람이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기도 했다. 혼인을 하지 않은 남색가 백작, 황태자의 호위를 뚫고 그를 죽일 수 있는 무력을 가진 검사, 종파가 없음에 누구의 명령을 받지도 않는 중립자.

‘볼모로 온 4황자를 사랑하게 된 이프리트 경이, 4황자를 겁탈한 타루스에게 분노해 그를 죽였다.’

이 얼마나 진부한 사랑 이야기인가. 그렇지만 그런 사랑 이야기가 가장 잘 팔리지. 프레오나 제국민의 여론도 잡고, 타루스도 죽이고, 오스먼드는 황제가 되고, 나는 살고. 이프리트만 좆 되는 상황이다. 얼굴도 모르는 자에겐 미안하지만 내가 살기 위해선 어쩔 수가 없다.

“일이 잘 풀린다면, 세네카는 프레오나를 섣불리 건들지 못할 것입니다. 황태자가 죽은 원인에 제가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괜히 책잡히지 않게 몸을 사리겠죠.”

“버리는 것에 비해 얻는 게 너무 적어.”

“그럴 리가요. 이프리트 경과 저를 쓰는 것으로 세네카는 전쟁의 명분이 없어지고, 전하는 황좌에 오를 것이며, 흔들리는 민심과 귀족들의 여론도 잡으실 것 아닙니까.”

세 치 혀를 놀렸다. 헬조선에서 이렇게만 살았어도 이 달의 보험왕은 내가 되었을 것이다. 아, 그것과는 상황이 다르려나. 목숨이 걸려 있는데 못 할 게 뭐가 있어.

“…좋다. 그대의 의견을 수용하지.”

오스먼드는 훌륭한 인재가 아깝지만 어차피 자신의 사람도 안 될 것 같은 이프리트 경을 포기한 것 같았다.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가 내민 손을 맞잡고 조심스레 말했다.

“영혼의 맹세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마법사들이 한다는 그것 말인가.”

“네, 그것만큼 확실한 게 없습니다.”

마법을 싫어할 줄 알았던 그는 아무렇지 않게 팔을 내밀었다. 나는 그가 내민 팔의 손목을 감싸고 4황자의 기억 속에 있는 주문을 외웠다.

“<후멘토 비다>.”

“그대는 마법사였던 것인가.”

“친모가 마법사였습니다. 이런 유용한 마법 하나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며 알려 주셨습니다.”

“그랬군.”

“전 소질이 없어 다른 마법은 힘들지만, 간단한 맹세 정도는 가능합니다.”

그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맹세를 읊었다.

“나 세네카 제국의 도브로미르 세네카는, 프레오나 제국의 2황자 오스먼드 프레오나가 황제가 되는 것을 도울 것이며, 스파딘 프레오나의 죽음 뒤, 얌전히 황궁을 떠날 것을 맹세합니다.”

“나 프레오나 제국의 오스먼드 프레오나는, 세네카 제국의 4황자 도브로미르 세네카를 해치지 않을 것을 영혼에 맹세한다.”

작은 빛이 손목을 휘감으며 심장으로 파고들었다. 그 기분 나쁜 감각에 맹세의 주문이 끝나자 난 서둘러 오스먼드와 떨어졌다.

“신기하군.”

“맹세를 지키지 않으면 심장에 무리가 갈 겁니다. 제 마법이 뛰어나지는 않아 곧바로 죽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일주일 내에는 심장이 멈출 테지요. 그러니 맹세를 잘 지켜 주십시오.”

“맹세를 풀려면 어떻게 하지?”

“못 풉니다.”

어딜 감히. 영혼의 맹세는 심장에 새기는 것. 즉, 죽음을 걸고 하는 맹세다. 지키지 못하면 죽음뿐.

물론 나는 풀 수 있다. 2황자가 내 앞에서 사라지면 이 따위 맹세 바로 풀 거다. 오스먼드에겐 거짓말을 했지만, 나는 졸라 짱 센 마법사…는 아니고, 마법의 시전자는 실력만 있다면 자유자재로 주문을 깨고 붙이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마법사와 영혼의 맹세를 해야 하는 경우엔 제3의 마법사를 데려와 주문을 외우게 하는 것이 보통이다. 쉽게 말하면 보증인이 있어야 하는 거지. 그러나 그 보증인도 목숨을 걸어야 하니 이 주문을 외워 주는 마법사는 거의 없다.

방금 내가 한 짓은 단순한 사기다. 어지간히 급했나 보네, 잘 알지도 못하는 마법을 빌려 맹세를 해 줄 만큼. 내가 말했지? 나와 거래를 하려 하는 순간, 넌 탈탈 털리고 돌아갈 거라고.

“걱정 마십시오. 전 전하의 뜻대로 움직이다 산골로 쫓겨나면 되는 것이고, 전하는 그저 절 해치지만 않으시면 됩니다. 쉽지요?”

이제야 찜찜한 표정을 짓는 그를 향해 예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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