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프레오나 제국, 로테 별궁에서 살다 (9)
어젯밤, 맹세를 마치고 자신의 궁으로 돌아가려는 오스먼드를 붙잡고 세네카 제국으로 편지를 써도 되냐 물었다. 그는 내키지는 않지만 맹세도 했으니 내가 따로 할 수 있는 게 없다 생각했는지 그러라며 쉽게 허가했다. 비록 검열을 받아야 했지만 그거라도 어딘가 싶었다.
과보호를 하는 로이븐에게는 안전히 잘 지내고 있다 보내야 하는 게 맞겠지만, 산골로 쫓겨난다는 말도 해야 했다. 그래야 애먼 곳에 벗을 보내지 않을 테니.
<로이븐 형님께.
로이븐 형님, 잘 지내시는지요. 저는 잘 지냅니다. 황태자와 조금 좋지 않은 일이 있었으나, 프레오나 제국의 2황자인 오스먼드 전하의 배려로 프레오나 황궁에서 벗어나 기운이 좋다는 북쪽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에반스터 영식을 보내시려면 프레오나 황궁이 아닌, 북쪽의 땅으로 보내 주십시오. 답장은 에반스터 영식을 통해 받겠습니다. 전 정말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형님께서도 무탈하시길.
도브로미르>
딱히 쓸 말도 없다. 황태자에게 추행을 당했습니다, 황태자가 제 목덜미를 만지더군요, 황태자가 그래너스라는 귀한 차를 대접했습니다, 그러면서 제 다리를 쓸더군요, 2황자는 제게 협박하더군요, 절 죽여서 전쟁의 불씨를 던질 거라 하대요, 그래서 역사기 쳤습니다. 이런 말을 쓸 수는 없었다.
로이븐은 4황자를 순하고 유약한 동생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과보호를 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다. 연회가 있는 날이면 근처에 사람을 세워 경계했었고, 제국 행사가 있을 때에는 옆에 딱 붙어, 접근해 오는 벌레들을 전부 퇴치했었다. 항상 냉정하고 무뚝뚝한 메이븐이 그 꼴을 보고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찰 정도로 로이븐은 과보호가 심했다.
이해는 한다. 아주 어렸을 적, 도브로미르는 로이븐의 눈앞에서 납치를 당할 뻔했었다. 그것도 황궁 안에서. 꽤 충격적이었으니 내게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는 한다. 내가 볼모로 온 것도 황제의 명만 아니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퍼디스를 보냈을 거다.
항상 내 문 바로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텟을 불러 작성한 편지를 건네줬다. 2황자에게 검열을 맡기고, 그가 허락하면 세네카 제국의 로이븐 황태자께 보내라 시켰다. 고개를 꾸벅 숙인 텟은 밝은 미소를 지으며 가벼운 걸음으로 별궁을 나섰다.
단순히 2황자의 끄나풀이라 생각했지만 이쯤 되면 2황자의 극성팬이 아닐까 싶다. 네가 좋아하는 그놈이 어젯밤 내게 무슨 짓을 한 줄 아느냐? 날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다. 물론 내가 역사기 쳐서 보내 버렸지만. 흐흐.
“마린, 짐 챙겨. 황제가 죽으면 우린 쫓겨날 거야.”
“네, 알겠습니다.”
“돈 되는 건 전부 챙겨. 알지?”
“네, 걱정 마세요.”
마린에게는 세네카 황실 마법사가 건네준 아공간 주머니가 있다. 평소 겁쟁이 4황자와 친하게 지냈던 황실 마법사가 볼모로 잡혀 가는 내가 너무 불쌍해서 준 것인데, 나는 딱히 필요 없어 마린에게 주었다. 덕분에 마린이 우리가 떠나기 전 세네카 제국에서도 돈 되는 걸 꽤 챙겼다 들었으니 이번에도 마린에게 맡기면 될 것이다. 마린이 헬조선에서 살았다면 유능한 대기업 회장 비서가 됐을 거다.
빠르면 이틀, 늦어도 일주일. 이 좆같은 황궁에서 벗어날 수 있다.
“황자님, 점심은 어디에서 드시겠습니까?”
“아, 안 챙겨 줘도 돼. 물려서 못 먹겠어.”
“…그럼 간단하게 수프를 준비하라 하겠습니다.”
“응, 간은 심심하게 해 줘. 부탁해.”
“네.”
일주일 전부터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는다. 이곳에서 먹는 모든 음식들은 느끼하고, 기름지며, 짜고, 달다. 처음에는 나름 서양식이라 생각하면서 맛있고 신선해하며 먹었지만, 언제부터인지 더 이상은 못 먹겠다는 듯 위장에서 음식을 받지 않아 먹는 족족 게워 냈다.
제일 절망스러운 상황은 한국인인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매운맛은 이곳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는 거다. 덕분에 아무 맛도 나지 않는 당근 수프나 감자를 간 수프만 먹고 있다. 그저 살기 위해서 먹는 음식이다.
장독대에서 3년 묵은 겨울 김치가 먹고 싶다. 청양고추 송송 썰어 넣은 된장찌개가 먹고 싶다. 회 치고 남은 우럭으로 만든 매운탕이 먹고 싶다. 신선한 상추에 삼겹살 두 점, 구운 마늘, 고추, 양파, 파절이, 쌈장을 넣고 크게 쌈을 싸서 먹고 싶다.
“하아.”
가장 큰 문제는 재료가 없다는 것이다. 정성만 있다면 무엇을 못 하리. 장도 처음부터 담그고, 다양한 조미료도 식품을 말려서 빻으면 될 테지만, 이곳엔 매운 홍고추가 없다. 말 그대로 매운맛을 내는 고추가 없다.
짐승과 동물의 이름은 내가 알고 있는 것과 같았지만, 이상하게 채소와 과일의 이름은 내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랐다. 그래너스같이 처음 들어 보는 식물도 많았으며, 맛을 알고 있는 채소도 부르는 이름이 달랐다.
바질이라 생각했던 것은 푸크나라는 이상한 이름을 가진 허브였고, 토마토라 생각한 채소는 비아토라 불렸다. 당근, 양파, 감자 등등 이런 기본적인 것들도 내가 아는 이름이 아니었다. 감자 맛이 나서 “이건 감자 수프니?”라고 물어봤더니 “감자가 무엇인지는 모르겠고 지블이라는 땅 채소입니다.”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4황자가 약(藥)을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아, 다양한 식물을 자세히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4황자의 기억은 원하는 것이 있을 때마다 읽을 수 있는 방식이라 처음부터 4황자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었다. 마치 모르는 단어가 있으면 사전을 살펴보며 지식을 얻는 것과 같은 구조다. 덕분에 4황자가 마법사라는 것도 세네카 제국의 무기를 생각했을 때 알게 되었고, 4황자가 약에 관심이 많다는 것은 프레오나 제국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 몸살이 났을 때 약을 생각하며 알게 되었다.
그 기억을 바탕으로 고추와 가장 비슷한 게 뭔지 생각해 보았지만, 식물의 생김새와 이론적인 기억만 있을 뿐 맛을 모르니 찾기도 어려웠다. 그저 독이 있는 식물인지 아닌지, 가열을 하거나 얼리면 어떤 효능이 있는지 정도만 알 수 있었다.
마린이 돌아와 곱게 간 감자 수프와 푸른색의 소금을 내왔다. 지블이라는 식물이지만 나는 그냥 감자라고 부를 거다. 푸른 소금을 조금 뿌린 감자 수프는 역시 맛대가리가 없었다. 후추라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후추는 고기에 뿌려 먹는 귀한 거라고 수프를 먹을 땐 안 준다. 융통성 없는 놈들.
“얼른 쫓겨났으면 좋겠다. 후추 하나 마음대로 못 먹는 황궁 따위 다 터져 버렸으면….”
“그러실 줄 알고.”
마린이 팔소매에 감춰 온 후추 병을 내게 내밀었다. 그라인더로 잘 갈아져 있어 따로 갈 필요가 없는 후추였다.
“마린…!”
“따뜻할 때 드세요.”
“진짜 마린 없으면 여기서 어떻게 살았을지…. 고마워.”
인자하게 웃는 마린에게 활짝 웃어 준 뒤, 감자 수프에 후추를 세 번 뿌렸다. 소확행이라고 하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내게는 이 후추 하나가 소확행이다.
후추가 들어간 감자 수프를 바닥까지 싹싹 긁어 먹었다. 내가 다 먹은 것을 본 마린이 기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린은 항상 내가 음식을 남기거나 먹지 않아 걱정을 많이 했다.
“혹시 황태자가 찾아오면 나 잔다 하고 그냥 보내.”
“네.”
2황자를 도와주기로 했으나, 추문에 도움을 준댔지 직접적인 도움을 준다 하진 않았다. 굳이 내가 왜 겁탈을 당해야 돼? 퉤, 엿이나 먹어라.
* * *
오스먼드가 다녀간 뒤로 발코니의 창문은 꼭 잠그고 잔다. 언제 또 들어올지 모르니 이중으로 커튼도 치고 잔다. 역시 볼모는 잠자리마저 힘들다.
아침에 일어나면 마린이 가져다주는 채소 수프를 먹는다. 가끔 고기를 먹긴 하지만 물려서 그런지 몇 입 먹지 못한다. 그런데 로테 궁의 시종들은 내가 남기면 자기들이 다 먹으려고 하는지 매 식사마다 질 좋은 고기를 구워 대령했다.
고기는 그만 먹고 싶다 했지만 ‘황자님 너무 마르셨어요. 고기를 많이 드셔야죠!’, ‘황자님 일단 맛있는 건 전부 해 오겠습니다. 입에 안 맞으시면 남기셔도 되니 시도라도 해 보세요.’, ‘황자님이 잘 드셔야 저희가 안심이 됩니다.’ 등등 걱정을 해 준다. 얼마 전까진 간단한 수프에 후추는 사치라며 꽁꽁 숨겨 두던 놈들이 무슨 꿍꿍인지 모르겠다.
물론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입맛에 맞지 않는 걸 어쩌라고. 내가 안 먹고 싶어서 안 먹는 게 아닌데, 왜 나한테 먹으라고 강요하는 거야!
“마린, 얼른 쫓겨나고 싶어….”
“다들 황자님을 아껴서 그러는 것 같아요.”
“내가 뭘 했다고….”
“음, 지나가다 황자님이 인사만 해 주셔도 좋아 죽으려 하던데요.”
아이돌이다. 나는 어느새 로테 별궁의 아이돌이 되어 있었다. 물론 2황자의 끄나풀인 텟도 마음은 2황자에게 가 있지만 눈은 항상 내 얼굴에 있더라.
확실히 4황자가 예쁜 얼굴이긴 하지. 나도 가끔 거울 보면서 놀랄 때가 있다. 너무 예뻐서. 근데 이런 비실비실한 얼굴로 여기서 뭘 하겠다고. 한국이었으면 바로 비주얼 가수로 아이돌 데뷔하는 건데. 살짝만 웃어 줘도 다 쓰러질걸.
“심심하다. 뭐 할 거 없나.”
“황궁 도서관 출입이 가능합니다. 수련장에 가셔도 되고, 온실 정원도 있습니다.”
“나가는 건 좋은데, 나갔다가 누구 만나면 또 귀찮아질 거고. 음… 그래도 점심 전에 나가자. 밥 먹는 것도 싫고, 황태자 놈이 또 오면 못 도망가니까.”
“네, 준비하겠습니다.”
도서관에 갈 것이다. 황태자는 도서관을 싫어하고, 오스먼드는 항상 바빠서 밖에서는 본 적이 없다. 그저 가끔 산책하는 귀족들을 만날 뿐이었다. 만날 때마다 눈치를 주는 것은 물론, 모욕적인 말을 하니 가급적이면 안 만나고 싶었다. 나는 괜찮지만 마린의 상태가 별로 좋지 못했다.
대충 깔끔한 옷을 입고 별궁을 나섰다. 본래 황실 도서관은 아무나 출입이 불가능하지만 황태자인 타루스가 날 끼고 살다시피 하니 감시만 있다면 자연스럽게 도서관 출입이 가능했다.
“오늘 감시는 누구지?”
“세, 세네카의 4황자님을 뵙습니다. 제45기사단 단장, 피닉 오세리옌입니다! 피닉이라 불러 주십쇼!”
“그렇군. 오늘 하루 잘 부탁하지.”
“넵!”
젊은 기사였다. 스물한 살 정도? 저 나이에 기사단의 단장이라면 실력이 꽤 좋다는 건데. 이럴 시간에 수련이나 더 하지 왜 내 감시를 하고 있냐.
“그대는 지원한 것인가?”
“앗. 네!”
“왜지?”
“그… 사, 사실….”
그가 머뭇거리며 내 눈치를 봤다. 그냥 말해도 되는데, 내 얼굴 보러 왔다고.
“황자님께서 서 대륙의 최고 미인이라 하셔서…. 죄송합니다!”
“아닐세. 칭찬 고맙군.”
“아, 아닙니다!”
기사는 서 대륙을 포함해 전 대륙의 그 어떤 사람도 황자님의 미모를 넘어설 자가 없다고 말했다.
난 붉게 물든 기사의 얼굴을 봤다. 남자한테도 통하는 얼굴인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잘 통할 줄은 몰랐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내 얼굴을 좋아했다. 날 혐오하는 퍼디스도 내 얼굴은 건들지 않았다. 이 정도면 저주인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