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자님 먹고 싶어요-11화 (11/227)

11. 프레오나 제국, 로테 별궁에서 살다 (10)

“도서관에 갈 예정인데, 가겠나?”

“넵!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고맙네.”

기사의 안내로 황궁 도서관에 안전하게 도착했다. 중간에 만난 배불뚝이 귀족이 나를 보고 혀를 찼는데, 마린의 서늘한 표정과 기사의 이글이글한 눈빛에 기가 죽어 고개를 돌리고 가던 길을 갔다. 혼자 있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찌질이 주제에 혀를 차? 내가 볼모만 아니었으면 네놈한테 침도 뱉을 수 있어!

도착한 황궁 도서관은 제국의 도서관임을 증명하듯 격이 다른 웅장함을 자랑했다. 세네카 황궁의 도서관은 어릴 때 이후로는 간 적이 없어 건물에 대한 기억이 흐릿했지만, 그곳도 이곳처럼 웅장했던 것 같다. 하긴, 도서관은 제국의 전통과 역사를 보관해 놓은 곳이니 이 정도는 돼야지.

손이 가는 책들을 몇 권 뽑아 도서관과 이어진 정원으로 나갔다. 마린이 시종을 시켜 간단한 쿠키와 티를 준비했다. 마린과 피닉은 내가 앉아 있는 곳과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 앉아 나를 지켜보고 있었고, 나는 가져온 책들 중 가장 위에 있는 책을 집어 들었다.

《프레오나 제국의 역사》, 저자 오로본 보헤스만. 책은 서문부터 재미가 없었다. 대충 설명하자면 프레오나의 역대 황제와 정치 방식에 대해 쓰여 있는데, 뫄뫄 황제는 서른이라는 적은 나이에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 뫄뫄 황제는 제국의 부흥을 일으켰다 등등 알아도 쓸모없는 정보와 TMI가 가득한 책이었다. 그래도 이왕 가져온 거 다 읽긴 했다.

다음 책은 《사랑의 포로》, 저자 클라츠 돌로레스. 다섯 권이나 되는 장편 소설로, 제목만 봤을 때는 막장 로맨스 소설인 줄 알았는데, 읽어 보니 단순한 로맨스 소설이 아니었다. 로맨스 소설의 옷을 입은 추리 소설이었는데 작가의 표현력과 문장 구사력이 많이 딸렸다.

여자가 말했다. “네가 내 욕하고 다닌 그놈이냐?” 남자가 말했다. “나 아니야!” 여자가 말했다. “증거를 대 봐!” 남자가 말했다. “내가 안 했는데 무슨 증거를 대!”

이런 식이었다. 처음에는 이게 책인지 드라마 대본인지 모를 정도로 정돈이 안 되어 있었지만 3권 이후부터는 다른 사람이 썼는지 뛰어난 문장 구사력과 생생한 표현력으로 독자를 빠져들게 했다. 결국 여자의 욕을 하고 다닌 놈은 남자가 맞았고, 다른 남자의 접근을 막으려 여자의 욕을 하고 다녔던 거다. 결국 둘은 이어지지 않는다. 여자를 아껴 주는 새로운 남자가 나타나고 책은 끝이 난다.

“재밌네.”

“다 읽으신 책은 다시 꽂아 놓고 오겠습니다. 따로 필요하신 책이 있으신지요?”

“그냥 아무거나 읽을 수 있는 거면 다 좋아.”

어려서부터 책 읽는 걸 좋아했다. 책에는 다른 세상이 있었고, 불가능한 일이 가능했으니까. 반지를 찾으러 가는 이야기나, 마법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의 이야기같이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좋아했다.

‘나도 한번 들어가 보고 싶다.’, ‘나도 저들처럼 마법을 써 보고 싶다.’ 어릴 땐 단순히 나도 그 사람들처럼 신기한 경험을 해 보고 싶다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들어오니 신기한 경험은 개뿔. 마물도 없고, 마법도 없고, 검도 없는 평범한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데, 돌아갈 내 집조차 없다. 젠장.

비어진 찻잔이 새로운 차로 채워졌다. 라벤더 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피닉 경은 언제부터 검을 잡았지?”

“네? 네! 전 세 살부터 검을 잡았습니다!”

“굉장히 빨리 시작했군.”

“넵! 저희 오세리옌 가문은 검에 대한 유서가 깊습니다.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검을 잡고 수련해 지금의 제가….”

마린이 책을 가져올 동안 감시자로 온 기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의 가문이 얼마나 대단하고 유서가 깊은지, 자신의 천재성 등등 거의 자기 자랑이었다. 그게 꼴 보기 싫은 정도는 아니라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한 귀로 흘려들었다.

“황자님이 흥미를 느끼실 만한 책을 가져왔습니다.”

“응, 고마워. 가져온 것만 읽고 돌아가자.”

“점심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안 먹어도 돼. 쿠키를 다 먹어서 그런가, 배 안 고파.”

“한 개밖에 안 드셨잖아요.”

“아닌데? 이거 내가 다 먹은 건데?”

“오세리옌 경에게 먹인 거 압니다.”

그랬다. 내가 피닉에게 말을 건 이유는 심심해서도 있지만, 그에게 남아 있는 쿠키를 먹이기 위해서였다. 밥은 먹기 싫고, 그렇다고 다디단 쿠키를 먹고 싶지도 않았다.

마린은 내가 갈수록 말라 간다고 걱정하고, 로테 궁의 요리사들은 보기만 해도 속이 더부룩해지는 고기 요리와 짜고 단 요리를 내오고. 그나마 먹을 수 있던 채소를 간 수프도 이제 질리고, 스트레스를 받는 건지 상태가 좋은 날이 아니면 그 수프마저 위장에서 받지를 않는다. 먹을 수 있는 거라곤 물과 단순한 견과류 조금이 전부다. 아예 생식을 해야 하나 생각 중이다.

“알았어. 그럼 아무 간도 하지 않고 그냥 구운 소고기만 줘. 기름기 없는 부위로.”

“네, 말해 놓겠습니다.”

“채소도 간하지 말고 그냥 데쳐서 달라 그래. 간하면 못 먹는다고. 여긴 향신료가 죄다 강해서 못 먹겠어.”

마린은 시종을 시켜 별궁에 기별을 넣고 오겠다며 잠시 떠났다. 곧이어 마린은 세 권의 책을 가져왔는데 전부 호신술과 몸을 지키는 무술에 관한 책이었다. 그동안 이리저리 치이면서 내가 조금이라도 강해졌으면 하는 걸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마린, 미안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이 몸뚱이는 근육이 전혀 붙지 않는 저주받은 몸뚱이거든.

그래도 생각해서 가져다준 사람 성의가 있지, 호신술에 관한 책부터 읽었다.

* * *

평소와 다르게 로테 별궁이 어수선했다. 매일 찾아오던 황태자의 시종이 찾아오지 않은 지 3일이 지났다. 드디어 황태자가 내게 관심을 껐나 생각하며 기뻐했지만, 기뻐한 게 무색하게 해가 질 때쯤 황태자의 시종이 나를 찾아왔다.

황태자의 시종은 돌아가지 않고 나를 바로 모셔 가겠다며 기다릴 테니 채비하고 나오라 했단다. 아, 황태자 놈이 오늘 나를 잡아먹으려 하는구나. 젠장. 겁탈은 추문으로 끝내려 했다만 이놈이고 저놈이고 도와주질 않는다.

텟은 내게 보고를 올리자마자 내가 이 저녁에 황태자를 만나러 간다는 것을 2황자에게 알리러 갔고, 마린은 그간 타루스의 기행을 알고 있어 나를 걱정하는 마음에 발을 동동 구르며 최대한 두꺼운 옷을 골라 줬다. 이렇게 안 입어도 별일 없을 거라 마린에게 말했지만, 이래야 자신의 마음이 편하다며 후크가 몇십 개나 달린 옷을 골라 입혔다. 마린, 이건 나도 불편한 옷인데.

“조심히 다녀오세요.”

“응, 걱정 마.”

마린의 걱정을 한 몸에 받으며, 돌아온 텟과 함께 황태자의 에테네 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텟은 옆에서 황자님이 세상에서 제일 잘생겼다면서 황태자 전하도 황자님을 보려 이 늦은 시간에 불러낸다며 조금 시끄럽게 나불댔다.

늦은 시간이라지만 간간이 귀족들이 보였다. 퇴근하는 회사원처럼 힘들어하던 그들은 텟이 나불대는 소리를 듣자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바뀌어 자기들끼리 모여 쑥덕거렸다. 모터 달린 텟의 나불댐은 듣는 내가 창피해지는 내용이었지만 2황자의 명이 있었는지 ‘황태자를 만나러 가는 나’를 신나게 광고하는 텟을 말릴 순 없었다.

창피해 죽을 것 같은 심정으로 에테네 궁으로 들어서니 늘 황태자의 옆에 붙어 있는 시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마음에 안 드는지 항상 대충 예를 표하는 버릇없는 문지기 시종이 안내한 곳으로 들어갔다. 황금색의 침대보와 이불을 덮은 넓은 침대 그리고 옆에 놓인 작은 테이블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는 휑한 방이었다. 테이블 위엔 와인 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와인은 황태자가 따로 가지고 오려는지 얼음이 담긴 기다란 통이 비어 있었다.

“모텔이 따로 없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와인 잔 하나를 집어 들었다. 얼룩도 없는 깨끗한 와인 잔을 살펴본 뒤, 주머니 속에 숨겨 들어온 붉은색의 작은 나뭇잎 하나를 와인 잔 입구 주변에 문질렀다. 술과 섞이면 강력한 수면 효과가 있는 아멜로 열매의 잎이다. 4황자는 내성이 생겨 통하지 않지만, 황태자는 또 모르지.

“4황자, 많이 기다렸나?”

깜짝이야. 황태자는 기척도 없이 들어와 내 등 바로 뒤에 섰다. 타루스는 누가 봐도 ‘나 오늘 일 칠 거예요.’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벌써부터 들떠 있어 주변이 잘 보이지 않는지 내가 와인 잔을 건드린 건 들키지 않은 것 같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래, 오랜만에 보는군. 벌꿀주를 가져왔는데, 한잔하겠나?”

“…네, 감사합니다.”

아멜로 열매의 잎을 문지른 와인 잔에 황금색의 액체가 가득 담겼다. 벌꿀주가 넘칠 듯 안 넘칠 듯 입술이 닿는 립(Lip) 부분에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 저건 무드도 없이 다 먹고 뒤지라는 소리인가. 수면 효과가 나오기도 전에 취기로 뻗는 게 먼저일 것이다.

“프레오나 제국에서의 생활은 좀 어떤가? 누가 괴롭히지는 않고?”

너요, 너. 너님이요. 어떤 미친 새끼가 와인 잔에 술을 가득 채워서 주냐. 이 벌꿀주의 알코올 도수가 몇인지는 잘 모르지만, 벌꿀주같이 단 술은 홀짝홀짝 마시다 보면 어느새 훅 가던데. 정신 빠짝 차려야겠다.

“아뇨,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행이군. 아, 그대를 위해 내 마음을 담았네. 다 마시게.”

개새끼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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