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프레오나 제국, 로테 별궁에서 살다 (12)
“아아… 그랬군.”
상처 덕에 아릿한 옆구리를 부여잡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망할, 옷이라도 입혀 주면 덧나나. 부끄러운 건 둘째 치고 추워 죽겠다.
레이는 내가 누워 있는 침대 옆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자기가 한 일도 아닌데 이상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지 주먹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떠는 것처럼 보였다.
“황자님, 이 일은 재판에 회부될 것입니다. 하지만….”
“…알고 있네. 그는 이 나라의 황태자가 아닌가.”
“….”
“너무 신경 쓰지 말게. 난 괜찮아.”
“죄송합니다. 제가 더 빨리 갔었더라면….”
네가 빨리 왔으면 완전 범죄 못 했겠지.
레이는 이런 상황에 트라우마라도 있는 건지 주먹 쥔 손을 비롯해 어깨까지 떨고 있었다. 단정하게 가라앉은 레이의 백금발이 달빛을 받아 환하게 반짝였다. 머리칼만큼 반짝이던 눈동자는 가라앉아 있었고,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눈물이 톡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보자 섣불리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오스먼드 개자식, 이렇게 떠는 애를 보냈다고?
“레이.”
“네.”
“나를 걱정하는 건가?”
“어찌 제가 감히.”
“그런 이야기가 아니야. 난 볼모고, 이런 일을 당해도 어쩔 수 없다 생각하고 있었어. 솔직히 말하면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으니.”
“….”
“음….”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 어떤 말이 저 아이에게 위로가 될까. 내가 위로를 해 줄 입장이 되려나. 애초에 위로가 필요할까?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그의 어깻죽지는 사시나무가 흔들리듯 발발 떨고 있고, 눈동자는 아직도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오스먼드 네가 뭔가를 알고 이런 상태의 레이를 내게 보냈다면, 넌 진짜 못돼 처먹었구나.
“레이, 난 강해. 아마 그대보다 강할 거야.”
“신분을 뜻하시는 거라면 그렇겠지만.”
“물론 힘으로는 이길 수 없겠지. 그래도 정신은 그대보다 더 단단할 거야. 그대보다 아는 것도 많고, 그대보다….”
나이도 더 먹었지. 꼰대 짓을 하고 싶진 않지만.
“잘생겼지.”
“푸흡.”
“괜찮다 해도 안 믿을 거 같으니 별말 하지 않겠네. 하지만 난 이런 걸로 꺾일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
“이야기를 들려주겠어? 그대가 마음에 품었다는 영애의 이야기도 좋고, 레이 그대의 어렸을 적 이야기도 좋아. 그 영애의 이야기는 그때 다 들은 것 같지만.”
가벼운 표정을 지으며 레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 투박한 손길에 맡겨진 그의 어깨가 차츰 진정이 됐다. 위로받을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구나.
“저에겐 누님이 있었습니다. 접때 보신 한나 이프리트 영애와 절친한 친우였습니다.”
다물린 입이 벌어지고 떨리는 목소리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름은 레아시스 몰베인. 프레오나 제국에 단 셋뿐인 공작가의 딱 하나 있는 영애였다. 그만큼 귀한 영애는 예쁨을 많이 받았다 한다. 그녀는 타루스와의 약혼을 거절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며 아틀란 왕국으로 정인을 따라갔는데, 왕국의 정치 싸움에 휘말려 죽었다 알려졌다.
뒤늦게 알아보니 레아시스는 아틀란 왕국의 왕세자에게 겁탈을 당했었고, 죽은 게 아니라 자살을 했던 거란다. 쓰레기 같은 새끼들은 어디든 널려 있구나. 그 때문에 프레오나 제국은 아틀란 왕국과 전쟁을 했으며, 이기고 왕국을 흡수했다.
충격을 받은 당시의 몰베인 공작 부부는 쓰러져 병을 앓다 타계했고, 남겨진 레이가가 공작가를 이끌게 됐다. 당시 레이가의 나이가 15세였단다. 그래서 어린 공작이라 불렸군.
“그때의 절 도와준 게 이프리트가(家)였습니다.”
그 이프리트… 곧 저세상으로 떠납니다. 심지어 특등석이라구요.
하 씨, 오스먼드와 거래를 할 때 조금 더 진중하게 할걸. 가능한 아무도 죽지 않는…. 아니지, 황족이 죽었는데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어. 레이와 한나한테는 많이 미안하지만, 일단 나는 살아야 하지 않을까? 못난 어른이라 미안하다.
이프리트 경, 정말 미안합니다. 나중에 시간 되면 꽃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비석도 깨끗하게 청소해 드릴게요.
“그랬군.”
“젠, 그러니까 이프리트 경도 제가 공작위에 오를 당시 백작위에 올랐습니다. 아틀란 왕국과의 전쟁으로 젠의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아아, 안 된다. 더 이상 ‘젠 이프리트’에 대해 들어서는 안 된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오스먼드 때문에 죽는 거지만, 그것에 나도 동조했으니 내가 죽이는 거와 다름이 없는 사람인데. 젠 이프리트의 이야기를 계속 들으면 뒷마당으로 던져 놨던 죄책감이 다시 찾아온다고.
“큼…! 레이, 시간이 늦지 않았나. 난 괜찮으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게.”
“아, 죄송합니다, 황자님.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내일 다시 찾아뵙겠다는 말과 함께 레이는 정중히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레이가 나가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마린이 들어와 걱정스러운 얼굴로 옆구리의 상처를 확인한 뒤 발을 동동 굴렀다.
“황자님, 아프시면 진통제를….”
“아냐, 살짝 스친 거라 따끔거릴 뿐이야. 걱정 마. 이틀이면 나을 것 같아.”
“하아, 죄송합니다. 제가 더 강하게 말렸어야 했는데.”
“괜찮아. 마린 잘못이 아니야. 음… 혹시 지금 시간 괜찮으면 진저래 열매랑 물이랑 5:1로….”
“약이라면 황실 의사가 처방해 주셨습니다.”
“그럼 괜찮겠네. 마린도 얼른 가서 쉬어.”
언제 오스먼드가 들이닥칠지 모른다. 저번처럼 발코니를 통해 들어올 수도 있고. 가능하면 오늘은 안 왔으면 좋겠다. 다친 것도 싫은데 재수 없는 오스먼드의 얼굴까지 보면 기분이 저조해질 것 같다.
목 언저리까지 이불을 잘 덮어 준 마린은 문이 닫히는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나갔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사람 다섯 명을 합쳐 놓아도 안 닿을 것 같은 높은 천장이다. 점점 정신이 아득해졌다. 의사가 말하길, 영양실조에 피까지 흘렸으니 어지간히 어지러웠을 거란다. 아, 그래서 벌꿀주의 최음 효과가 통하지 않았었나? 몸에 기력이 없으니 흥분도 안 되고, 발기도 안 된 거지.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내가 고자라니, 말이 안 되잖아.
“윽….”
생각보다 피를 많이 흘렸는지 갑작스레 온 빈혈에 정신을 잃을 뻔했다. 남아 있는 정신력으로 침대 옆 서랍에 있던 철분제를 물 없이 꿀꺽 삼킨 뒤 혼절하듯 눈을 감았다.
* * *
꿈을 꿨다. 태양이 지는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주저앉은 내가 울고 있었다. 뭐가 그리 서러운지 소리도 내지 않고 오열을 하고 있었다. 꼴사납게 왜 울고 있냐 물으려 할 때 나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곧이어 태양이 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하늘이었다.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달빛조차 그 어둠을 가리지 못했다.
몸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걸 보면 단순한 꿈은 아니었다. 단순한 자각몽인 줄 알고 꿈의 세상을 내 마음대로 움직여 보려 했지만 내 뜻대로 움직이는 건 몸뿐이었다. 내 꿈이지만 내 꿈이 아닌 상태.
“악마인가.”
-나의 이름을 불러라.
악마의 존재를 확신하자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음과 함께 굵은 목소리가 들리며 하늘이 울었다. 악마가 확실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그놈은 아니었다.
멍하니 하늘을 보고 어떤 새끼가 나올지 기다렸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지대가 흔들리며 붉은색의 연기가 스멀스멀 나왔다. 그 붉은색의 연기는 천천히 회오리치며 허공에 이름을 그려 냈다. 이 새끼가 날 불렀다 이거지?
“넌 또 어디서 나온 새끼야.”
-이름을 불러라. 넌 알고 있지 않나.
“좆같은 소리 하지 말고 나와.”
-이름.
“두 번 말 안 한다. 나와라.”
이름을 부르면 계약을 해야 한다. 한 번 당하지 두 번 당하냐.
-이름을 불러.
“오냐, 해 보자 이거지? 좋아. 난 시간 넘쳐.”
소환하지 않은 악마가 꿈에 들어올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인간의 수면 시간은 한정적이고, 잠에서 깨게 되면 꿈속에 들어온 악마는 사라진다.
-…이름.
“김아무개.”
-하아….
“싫어? 그럼 김똥개.”
-짜증 나는군.
“얘기는 들어 줄 테니 나와.”
붉은 연기가 점차 퍼지더니 안개가 되었다. 안개를 뚫고 나온 형체는 키가 작은 곱슬머리의 남성이었다. 나름 무서운 얼굴을 하는 것 같은데 좆만이가 무서워 봤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