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자님 먹고 싶어요-14화 (14/227)

14. 프레오나 제국, 로테 별궁에서 살다 (13)

“뭘 야려. 너만 성격 드러워? 나도 드럽거든?”

-천박하긴.

“도발하는 거면 집어치워. 안 통해.”

-도발이 아니다. 넌 정말 천박한 인간이다.

“야, 똥개야. 잘 생각해 봐. 너 지금 나랑 계약하려고 용 써서 내 꿈에 들어온 거 아니야? 그 천박한 인간 영혼 좀 얻어먹어 보자고 이렇게까지 한 악마는 대체 뭐라 불러 줘야 해?”

-….

“인상 좀 펴. 추하다.”

내 말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악마는 더 이상 구겨질 주름이 없을 정도로 얼굴의 주름을 구겼다. 추하다니까.

“왜 왔는데? 원하는 거 줄 테니까 영혼 달라고?”

-그래, 다 알고 있다니 빠르겠구나. 원하는 걸 다 말해 보거라.

“없어, 원하는 거.”

서슬 퍼런 악마와 눈이 마주쳤다. 지지 않고 똑같이 노려보니 악마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악마가 내쉰 숨이 얼면서 주변의 땅이 얼어붙었다.

-널 싫어하는 놈이 있다면 단번에 널 좋아하게 만들 수도 있다.

“됐어. 나도 싫어하면 그만이야.”

-평생 써도 다 쓰지 못할 금은보화를 주마.

“다 못 쓰면 아까워서 어떡하냐. 필요 없어.”

-대학자의 지식을 주마.

“난 타고나길 똑똑하게 태어난 사람이야. 그리고 너무 똑똑해도 피곤해.”

-대륙 제일의 미모를 주마!

“눈 삐었냐? 내 얼굴 안 보여?”

-대륙을 네 것으로 만들어 주마.

“크기만 하고 쓸데없어.”

-세상을 네 발밑에 둘 수도 있다.

“내 발밑에 있는 건 땅이면 충분해.”

-이익!

“바라는 게 없는 걸 어떡해. 그러게 누가 남의 꿈에 막 들어오래? 나랑 계약했던 그 악마도 너처럼 조르다가 그 꼴 난 거 아니야. 그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악마도 탈탈 털렸는데 너 같은 쫄병이 멀쩡할 거 같니? 너도 그 악마처럼 악마생 망하기 싫으면 조용히 나가.”

악마를 무시하는 내 말투가 어지간히 화가 나는지 난쟁이 악마는 발을 크게 굴렀다. 두웅. 얼어붙었던 땅의 지반이 크게 흔들렸다. 무서워했으면 좋겠지? 근데 하나도 안 무섭거든? 에베베베베.

누가 그랬냐, 악마는 교활하고 똑똑하다고. 내가 본 악마들은 전부 바보 둔탱이에 다혈질인데. 물론 모든 악마들이 그렇다는 건 아니다.

악마는 유독 내 앞에서 약하다. 나와 계약한 악마가 말하길, 내 영혼은 다른 영혼보다 유독 맛있는 냄새가 풍긴다고 했다. 게다가 나는 욕심이 없다. 나는 내 선을 알고, 바라지 못하는 걸 바랄 욕심이 없을 뿐이지만 욕심을 먹고 사는 악마에게 있어 욕심이 없는 나는 천적이다.

“나랑 계약한 놈은 적어도 겉모습은 번듯하게 하고 왔었어. 근데 넌 뭐냐? 얼굴 구겨진 난쟁이?”

-인간은 작은 것들을 사랑한다고 그랬다.

“네 말대로라면 바퀴벌레도 사랑하겠네, 작으니까.”

-귀엽지 않은가?

“너 진짜 눈 삐었냐?”

-….

악마는 진지했다. 무엇이 이상한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보니 말이 안 나온다. 진짜 바선생을 귀엽다 생각한 거야? 진짜로? 악마들 취향 한번 참….

“야, 됐고, 네 친구들한테 전해라. 내 꿈에 맘대로 들어오면 악마고 뭐고 좆 될 준비하라고. 참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야.”

-인간 주제에.

“그 인간한테 당한 악마가 벌써 둘이나 됩니다. 원하는 거 없으니까 꺼지라고!”

땅 위의 흙을 쥐어 잡아 악마에게 던졌다. 물러가라, 물러가라! 실제로 흙을 던진다고 물러가진 않겠지만, 꿈의 경계가 흐릿해졌다. 그 말인즉 곧 잠에서 깰 테니 초대받지 않은 악마는 물러갈 시간이다.

-내 이름을 잘 기억하고 있….

“꺼져!”

악마는 욕을 들어 처먹고야 사라졌다.

* * *

“4황자.”

“….”

“4황자, 일어나라.”

“5분만.”

“4황자, 난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야.”

“….”

익숙한 목소리였다. 항상 꾀꼬리 같은 마린의 목소리로 시작하는 하루였는데 꾀꼬리는 어디 가고…. 아, 설마.

“4황자.”

“아, 전하.”

눈을 뜨니 오스먼드가 보였다. 얜 아침 댓바람부터 여기서 뭐 하고 있지? 설마 나 아직도 꿈속에 있나? 악마 새끼가 간 줄 알았는데 한 마리 또 왔네.

오스먼드는 1인용 소파를 침대 바로 옆에 끌어다 놓고 고고하게 앉아 있었다. 그는 내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는지 다 마셔 가는 찻잔과 쿠키를 옆에 둔 채, 파란색의 벨벳 천으로 엮인 책을 읽고 있었다. 예의를 보이려 일어나야 했지만 환자에게 예의는 무슨, 눈만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까닥였다.

그는 그런 내 모습에 건방지다는 눈빛을 했지만 아픈 사람에게 뭘 바라냐는 듯 쯧, 혀를 찼다.

“다쳤다 들었는데, 몸은 괜찮은가?”

이 양심 없는 새끼, 입만 살아 가지고. 네 눈에는 괜찮아 보이냐? 저 번지르르한 얼굴을 보니 배알이 꼴린다. 신수가 훤하네. 누구는 철분제도 간신히 먹고 까무룩 기절했는데, 누구는 황제 될 생각에 꿀잠 잤나 보지?

“나쁘지는 않습니다.”

“좋지도 않다는 소리군. 어찌 됐건 기뻐해. 황제가 오늘 새벽에 죽었어.”

“아.”

명이 다해 새벽에 운명한 스파딘 황제의 장례식 준비가 지금 한창이라고 했다. 덕분에 탄신일 파티도 없던 일이 되었고, 나와 타루스의 이야기는 황제에게 전해지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오스먼드는 황제가 죽은 이유를 어젯밤 타루스의 기행에 놀라 화를 참지 못해서라고 했단다. 덕분에 타루스는 황제의 죽음에 기여하게 되었고, 한동안 귀족들의 눈치를 보게 될 거라나 뭐라나.

“4황자는 상처가 낫는 즉시 떠나도 좋아. 전 황제의 장례식은 참여할 필요 없어.”

“그래도 황제의 장례식인데, 제가 가지 않아도 괜찮습니까?”

“대귀족들에겐 황태자로 인해 큰 충격을 받았다고 전했고, 나머지들은 관심도 없을 거다. 그대도 타루스와 마주치기 싫을 거 아닌가.”

“…그럼 지금 떠나도 괜찮습니까?”

“나야 상관은 없다만, 상처는 어찌하고.”

“큰 상처가 아닙니다. 허락하신다면 지금 당장 가고 싶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이 더러운 황궁을 나가고 싶다. 이까짓 상처야 잘 동여매고 약 잘 먹으면 금방 낫는다.

오스먼드는 지금 가는 것 정도야 별일 아니라는 듯 읽던 책을 마저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스먼드 입장에서도 나를 빨리 치워 버리는 게 좋을 거다.

“그래, 사람을 붙여 줄 테니 조심히 가게.”

이제 떠나는 사람이니 미련 없다는 듯 바로 나가는 오스먼드의 뒤통수에 몰래 중지 손가락을 올려 줬다. 만나서 좆같았고, 다신 만나지 말자.

오스먼드가 나가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린이 들어와 짐을 쌌다. 오늘 간다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척하면 척이다. 독심술이라도 쓰는 건가. 빠릿빠릿한 마린과 간단하게 아침 인사를 한 뒤, 어차피 잘 먹지도 못하는 아침 식사는 패스하고 얼른 짐을 챙겨서 황궁을 나가기로 했다.

“돈 되는 것만 챙기자. 무겁게 많이 챙기지 말고.”

“네, 거의 다 챙겼습니다. 이 정도면 평생 놀고먹을 수 있을 겁니다.”

“훌륭해. 최고야.”

로테 궁의 시종들에게는 비밀로 하고 몰래 가기로 했다. 만나 봐야 질질 짜면서 이제 황자님 얼굴 못 보게 돼서 어쩌냐는 말뿐일 테니 피하는 게 답이었다. 게다가 지금껏 끔찍한 식단을 내온 요리사의 얼굴을 보게 되면 죽빵을 먹여 주고 싶을 지경이라 조용히 나가 주는 게 그들과 내 신상에 좋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황실 의사에게 상처를 확인한 뒤 궁을 나왔다. 경이로운 치유력으로 내일이면 깔끔하게 나았음 좋겠지만, 이변 없는 일반인에다가 허약한 몸뚱이라 남들은 2~3일이면 충분한 상처도 일주일은 조심해야 한다더라. 하지만 어쩌라고. 이 지긋지긋한 프레오나 황궁도 오늘로 끝이다.

오스먼드가 보내 준다던 사람은 처음 프레오나 제국으로 올 때 같이 왔던 쿠나 경이었다. 그동안 훈련이 꽤 고됐었는지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오랜만일세, 쿠나 경.”

“세네카 제국의 4황자님을 뵙습니다.”

“잘 지냈는가?”

“네, 전 잘 지냈습니다.”

“그렇담 다행이군.”

기사의 수는 다르지만 프레오나 제국에 처음 왔을 때와 똑같이 쿠나 경은 말을 탔고, 마린은 마부석, 그리고 나는 마차를 탔다. 마차를 준비한 시종은 4황자의 상처를 조심해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는지, 마차 내부가 푹신한 양털 쿠션으로 꽉 차 있었다. 없던 양털 알러지가 생길 것 같다.

“출발하지.”

오늘 아침 레이와 한나에게는 따로 안부 인사를 전했다. 직접은 못 했고 아마 텟이 대신 전해 줄 거다. 다신 오지 않을 프레오나 황궁을 향해 쌍 중지 손가락을 올리곤 의자 등받이에 편히 기댔다.

쿠나 경의 말에 따르면 프레오나의 수도에서 북쪽의 땅은 빠르면 3일 안에 도착한다더라. 내 부상도 있으니 천천히 가면 일주일 안에는 도착한다길래 가능한 빨리 가서 편히 쉬고 싶다 했다.

“이놈의 양털은….”

편하게 눕고 싶은데 양털 쿠션들이 자리를 차지했다. 쓸데없는데 다 버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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