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자님 먹고 싶어요-15화 (15/227)

15. 북쪽 땅으로 쫓겨나다 (1)

“황자님, 곧 도착합니다.”

“그래.”

마차의 열린 창 안으로 불쑥 들어온 마린의 한 손에는 보리로 구운 빵과 다른 한 손에는 달달한 살구 잼이 들려 있었다. 황궁엔 간이 강하고 기름진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길거리 음식은 내가 먹기에도 무리가 없었다. 이젠 밀가루도 질리지만 살기 위해선 먹어야 한다는 마린의 억지를 들어 하루 1빵은 꼭 먹는다.

밀가루 빵이 질리는 날에는 보리빵. 보리빵이 질리는 날에는 메밀 빵. 그밖에도 다양한 곡물로 만든 빵을 가져다주었는데, 많고 많은 빵 중에 쌀로 만든 빵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충격이었다. 물론 쌀로 빵을 만들 바에야 떡을 찌는 것이 이득이겠지만.

“이것도 질린다.”

다양성이 부족하다. 황궁에서 먹던 것과 전혀 다르지만 서양식은 서양식. 아무리 맛있어도 이미 망가진 내 위장이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있었다. 빵과 잼, 그리고 간간이 야채와 함께 달달하거나 짠 소스, 인도에서나 먹을 법한 향신료로 버무린 고기. 의식주가 기본인 세상이건만 ‘식’ 부분이 너무 보잘것없다. 내가 세네카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면 세상에 있는 모든 요리왕을 불러 잔치를 열었을 거다. 한 명 정도는 내 입맛을 맞출 요리사가 있지 않을까.

살구 잼을 대충 바른 보리빵을 목구멍으로 꾸역꾸역 넘겼다. 오렌지와 파인애플을 섞은 듯한 주스와 함께 먹으니 정말 끔찍하다. 단짠단짠은 어디 가고 퍽단단단이다. 퍽퍽하고, 달고, 달고, 달다. 내가 디저트를 먹는 건지 식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황자님, 도착했습니다.”

빠르면 3일에서 5일이면 간다는 북쪽 땅까지 일주일을 더해 12일을 더 꼬박 달렸다. 어째 세네카 제국에서 프레오나 제국으로 왔던 길보다 이동 기간이 더 길었는지 알 수가 없다. 노숙 없이 편하게 오긴 했지. 여기저기 들르면서 쉬다 가기도 했고. 그게 의문이라 쿠나 경에게 물어봤다. 우리 되게 천천히 가고 있는 거 아니냐고, 프레오나 제국에 올 때는 엄청 빠르게 왔던 것 같은데. 그에 쿠나 경은 죄송하다는 표정으로 의문에 답해 주었다.

“세네카 제국에서 출발할 때, 정상적인 길이 아닌 숲길을 통해 오셨던 걸 기억하십니까?”

“그래, 기억하네.”

“그곳이 위험하긴 해도 지름길입니다. 그리고 마물이 나오는 장소라 쉬지 못하고 서둘러 왔으니 거의 전령과 비슷한 속도로 강행군을 한 것이죠.”

한마디로 마물 때문에 서둘러서 시간이 적게 걸린 거란다. 애초에 멀쩡한 길이 무너져 갈 수 있는 길이 그곳밖에 없었으니 방법이 없었다고. 하마터면 프레오나에 도착하기도 전에 마물한테 죽었을 거라 생각하니 아찔했다. 그래, 길이 험하고 힘들긴 했지. 내가 괜히 몸살이 난 게 아니라니까.

마차 문이 열리고 쿠나 경이 에스코트를 해 줬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조금 부담스럽다. 혼자 내리고 싶었던 때가 있어 에스코트를 거절하고 혼자 내려 봤지만 계단을 밟다 구른 뒤부터는 에스코트 없이는 마차에서 내리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마린의 요사스러운 눈초리라든가, 걱정하는 게 빤히 보이는 쿠나 경이 신경 쓰였다.

앞으로 나와 마린이 지내게 될 북쪽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 상태를 본 나는 기뻐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황무지에 세운 호화로운 저택, 딱 그 꼴이다.

눈앞에 보이는 작은 저택은 그리스 산토리니에 있을 법한 청량한 느낌의 저택이었다. 마당에는 잔디가 자라 있었다. 2층에 정면으로 보이는 방이 세 개인데 중간에 있는 방에 발코니가 나 있어 심심하면 로미오와 줄리엣을 찍어도 될 것 같았다. 여기까진 호화로운 저택의 모습이었다.

잔디가 듬성듬성 나 있는 마당은 단출했지만 있을 건 전부 있었다. 저택을 중심으로 왼쪽엔 40평 남짓 길게 늘어진 텃밭이 있었고, 오른쪽으론 물을 길어 올리는 우물과 몇천 년은 자란 듯한 큰 벚나무가 있었다. 보는 시각에 따라 아늑한 시골 풍경이 떠오를 수도 있고, 우물귀신을 연상할 수도 있었다. 저택의 뒤로는 평범한 뒷산이지만 올라갈수록 점점 가팔라지는 산이 있었는데, 마물이 나타나니 들어가지 말라는 표지판이 박혀 있었다.

“마물…?”

“아, 말만 그렇지 진짜 마물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저 표지판도 그냥 형식상 해 놓은 것입니다. 저 우물은 지금도 사용하실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하고. 아! 저택의 청소는 이미 다 끝났을 겁니다. 그리고 황자님이 잘 계신지 가끔 찾아뵙기로 했으니 걱정 마십시오!”

“….”

저택 뒤편에 있는 마구간에 말을 넣어 놓은 마부가 돌아와 저택에 대해 종알종알 설명했다. 그냥 마부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 저택에서 말 타고 한 시간이면 가는 아랫마을의 이장이란다. 아직 30대 초반으로 보이는데 이장이라니, 성공한 놈이었다. 이장 마커스는 달에 한 번 북쪽에서만 만들어지는 찻잎을 팔러 프레오나 황궁으로 가는데 이번에 그 시기가 나와 겹쳐 같이 온 거라고 했다. 오스먼드 이 자식, 처음부터 날 귀양 보내려 했었나 보다.

쿠나 경과 마린은 이미 저택 안으로 들어가 짐을 풀고 있었다. 마린의 아공간 주머니엔 프레오나 황궁에서 이것저것 빌려온(?) 것들이 많아 쿠나 경에게 보여 주지 못하니 짐을 실은 마차에서 형식적인 것만 가져갔다. 아공간 주머니는 나중에 정리해야지.

옷 짐을 들고 가는 마린을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도와주고 싶은데 짐을 들려 할 때마다 쿠나 경이 다가와 내 짐을 뺏어 들었다. 황자님은 다치셨으니 이런 무거운 것들에는 손도 대지 말라는 무언의 행동이었다. 이제 다 나았는데.

“오, 제대로인데?”

저택 안은 생각했던 것보다 크고 아늑했다. 뻥 뚫린 아치형의 큰 창문으로 햇볕이 들어왔고, 중앙에는 푹신한 가죽 소파와 적당한 높이의 티 테이블이 있었다. 벽난로를 중심으로 비어 있는 책장도 있었고, 영문을 모르겠는 숲속의 풍경화도 걸려 있었다.

귀양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주방도 훌륭했다. 거실보다 큰 주방인데, 다양한 조리 도구들과 없을 거라 생각했던 보존 마법을 걸어 놓은 큰 찬장도 있었다. 이걸로 냉장고는 해결했다. 프레오나 제국이 마법은 싫어하면서 이런 실용적인 마법 물건은 쓰고 있다는 게 참 모순이다. 아, 나무로 만들어진 식탁도 있었다. 식탁 표면이 광이 나고 번들번들한 게 만든 지 얼마 안 된 새 식탁 같았다. 식탁뿐이 아니라 아예 새로 다 채운 건지 식기와 그릇도 새것이었다. 요리할 맛 나겠다.

마린은 주방과 가까운 1층에 있는 방을 쓰기로 했다. 나는 2층에 있는 세 개의 방 중, 중간에 끼어 있는 방을 쓰기로 했다. 이 방이 제일 넓었고 발코니가 있어 경치가 좋다고 이장이 강력 추천했기 때문이었다. 아무 곳이나 써도 상관은 없다만, 쥐만 나오지 않길 바란다.

“대충 정리는 끝난 것 같은데. 쿠나 경, 오늘은 이곳에서 쉬고 내일 편하게 돌아가.”

“네, 그러겠습니다. 편의를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장은 마린에게 주의 사항 같은 것을 알려 준다며 양피지와 잉크를 사용해 이것저것 설명하고 있었고, 쿠나 경은 소파에 앉아 있는 내 뒤에 딱 붙어 기립하고 있었다.

“그리 서 있지 말고 앉게.”

“괜찮습니다.”

“내가 불편해서 그러는 거니 신경 쓰지 말고 어서.”

맞은편 소파에 앉은 쿠나 경은 허리를 곧추세워 누가 보아도 바른 자세로 앉아 있었다. 나도 4황자의 습관이 붙어 있었다면 쿠나 경처럼 바른 자세로 오랜 시간 앉아도 편하게 있었을 테지만 실상은 헬조선의 노예다운 굽은 자세가 제일 편했다.

“황제 폐하의 장례식도 이젠 다 끝나 있겠군.”

“네, 아마 황제 서임식도 끝났을 겁니다.”

침묵이 흘렀다. 쿠나 경은 모르겠지만 황태자는 곧 죽을 것이고,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이프리트 경도 죽게 되겠지. 그래도 난 살았잖아. 이기적이고 더럽지만 이렇게라도 살아야지 좆같은 헬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다.

마린과 이장이 쓰던 양피지의 끝부분을 뜯어 이곳에 오면서 생각해 놓았던 다양한 씨앗의 이름을 적었다.

“이장, 여기 적힌 씨앗들을 구해 줄 수 있나? 내 값은 잘 치르겠네.”

“씨앗을 말입니까? 이거라면 작물도 있습니다만.”

“아니, 난 씨앗이 필요하네. 구해 줄 수 있겠나?”

“네, 이 정도는 간단하게 구할 수 있습니다. 다 구하면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고맙네.”

이장은 이만 가 보겠다며 자리를 나섰고, 마린은 이장을 배웅하고 다시 돌아와 이장에게 들었던 내용을 내게도 알려 줬다.

“마커스가 말하길, 저택 뒤편에 있는 산에 몸에 좋은 산나물이 많이 있답니다. 원하는 만큼 따서 먹어도 좋으나, 길을 잃을 수도 있으니 너무 깊게만 들어가지 말랍니다.”

“산나물이라. 그럼 약초도 있겠네. 날 잡아서 가야겠다.”

“네, 그리고 동쪽으로 쭉 내려가다 보면 바다가 있답니다. 거리가 꽤 되니 말을 타고 가는 것이 좋다고 하더군요.”

바다 좋지. 그동안 고기만 먹어서 질렸는데 바다가 있다면 생선, 조개, 다시마, 미역 등등 다양한 해산물을 구할 수 있겠네. 내가 말만 탈 수 있다면 말이지. 젠장, 이젠 승마도 배워야 하네.

“말….”

“바다에 갈 때는 마부를 구하면 되는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해 뜰 무렵의 바다가 참 예쁘다고 합니다.”

동쪽이니 일출 보기엔 예쁘겠네. 하지만 내 목적은 풍경이고 뭐고 오로지 해산물이다. 운이 좋으면 배말이라든가 전복 같은 희소한 해산물도 구할 수 있겠지? 아, 너무 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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