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자님 먹고 싶어요-16화 (16/227)

16. 북쪽 땅으로 쫓겨나다 (2)

“그래, 바다는 나중에 가 보자. 오늘은 푹 쉬고, 내일 해야 할 일이 있어.”

“저택 앞에 텃밭 말씀하시는 거죠? 안 그래도 여독이 풀리면 갈려고 했었습니다.”

“마린, 넌 정말 척하면 척이구나. 독심술이라도 하는 거야?”

“아닙니다. 황자님께서 마커스에게 씨앗을 부탁했다 들었습니다. 씨앗을 틔우기 위해선 밭이 필요하다 생각했을 뿐입니다.”

“정말 대단해. 아, 텃밭은 전부 갈 필요는 없고… 그냥 같이하자. 나도 움직이는 게 체력을 기르기도 좋을 테니 말리지 말고.”

“네, 무리하는 게 아니라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보통의 귀족들이 나와 마린의 대화를 들으면 대부분이 이상하게 생각할 거다. 내겐 황자가 되어서는 체통도 지키지 못한다며 손가락질할 테고, 마린에게는 한낱 시종이 감히 황자님께 격 없이 대한다며 꾸짖을 거다. 쿠나 경은 그간의 여행으로 이런 우리에게 익숙해져서 괜찮겠지만, 다른 귀족들이 있는 자리였다면 시종과 같은 자리에 앉는 것은 물론 말을 거는 것조차 상상할 수 없었을 거다.

마린에게 말을 편히 하라고 한 건 나였고, 마린도 내 어리광 아닌 어리광을 잘 들어 준다. 우리만 행복하게 잘 살면 됐지. 이곳으로 쫓겨난 이상 남의 시선은 두렵지 않다.

“저녁은 간단하게 먹을까?”

“네, 제가 하겠습니다. 닭고기 스튜 괜찮으신가요?”

“응, 나도 도와줄게.”

“아닙니다. 황자님께서는 편히 쉬고 계세요.”

“싫어. 나도 요리할 수 있는걸. 쫓겨난 마당에 신분 놀이는 질색이야. 내가 야채 썰 테니 마린은 닭고기 다듬어 줘.”

간단한 야채 정도는 썰 수 있지만, 닭고기 같은 살아 있던 생물의 살은 만지기 무섭다. 아마 생선도 마찬가지일 거다.

주방에 들어와도 된다는 마린의 허락을 받았다. 냉장고 역할을 하는 찬장 안에 들어 있는 당근과 감자, 그리고 양파를 잘게 썰어 해바라기씨 오일을 두른 냄비에 달달 볶았다. 양파와 감자가 익어 노르스름한 색을 띨 때 마린이 다듬은 닭고기를 넣어 함께 볶았다. 닭고기가 다 익어 갈 때쯤 쿠나 경이 우물에서 길어 온 물을 부어 끓였다.

“이대로 쭉 끓이다가 소금으로 간 맞추면 될 거야.”

“황자님은 요리도 하실 줄 아셨군요.”

“아, 응. 내가 식물에 관심이 많아서 가끔 요리책도 살펴보고 그랬어.”

마린은 아무 말도 안 해서 신경 쓰고 있지 않았지만, 의아해하는 쿠나 경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황자가 요리를 할 일이 있을 리가 없는데. 너무 나댔나 싶다가도 어차피 앞으로도 주방에 많이 들락날락할 텐데 대충 변명을 만들어 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동안 책으로만 읽었는데 직접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좋아. 2황자에게 감사해야겠네.”

전혀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 말이지만 2황자가 고맙기는 하다. 애초에 세네카 제국도 싫었고, 프레오나 제국도 싫었다. 가능하면 아예 모르는 왕국으로 보내 줬으면 좋았을 테지만 지금도 좋다.

끓이던 닭고기 스튜가 거의 완성되자 활활 타는 장작을 빼내 불을 줄였다. 넓적하게 파인 그릇에 세 명분의 스튜를 나누어 담고 나무 식탁에 앉았다. 쿠나 경은 황자인 나와 같은 식탁에 앉는 걸 조심스러워했지만 신경 쓰지 말라는 내 말에 조용히 앉아 지신의 몫인 스튜를 들었다.

스튜는 맛있었다. 다진 마늘이 있었다면 이것보다 더 맛있었을 테지만, 이곳에서 마늘은 고급 향신료라 간단한 채소들이 들어 있던 냉장고엔 없었다. 하지만 마커스에게 씨앗을 구해 오라 했으니 곧 먹을 수 있을 거다.

“설거지는 제가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쿠나 경은 손님이니 편히 쉬세요. 제가 하겠습니다.”

설거지를 하겠다는 쿠나 경을 말린 마린이 다 먹은 그릇을 회수해 설거지를 하러 갔다. 앞으로 마린과 내가 번갈아 가면서 설거지를 해야겠다. 마린은 안 된다고 할 게 뻔하니 몰래몰래 해야지.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눈이 떠졌다. 환기를 위해 조금 열어 둔 창문으로 아침의 향이 났다. 곧 해가 뜨려는지 서서히 밝아져 오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지내는 장소 하나가 바뀌었을 뿐인데 쌓인 찌꺼기가 전부 비워진 것처럼 마음이 개운했다. 아침 해가 뜨는 것도 보고, 저녁 해가 지는 것도 보고, 밤하늘에 뜬 별이 떨어지는 것도 보고. 앞으로의 평탄한 생활이 기대되었다.

마린은 아직 깨기 전이고, 쿠나 경은 부지런하게 미리 일어나 마당에서 검을 휘두르며 간단히 훈련을 하고 있었다. 잠옷으로 입은 가운을 벗고, 헐렁이는 포엣 셔츠와 간단한 검은 바지를 입고 마당으로 나갔다.

“쿠나 경, 좋은 아침이네.”

“아, 황자님. 좋은 아침입니다.”

쿠나 경은 내 인기척이 느껴지자 휘두르던 검을 내리곤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훈련 중이었나?”

“아, 아뇨. 황자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를?”

“네, 황궁으로 돌아가기 전 인사를 드려야 하기에…. 마린에게는 어젯밤 따로 인사를 했습니다.”

“아, 그렇군. 나 때문에 쿠나 경이 고생이야. 미안하게 됐어.”

“아닙니다. 으레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미 준비를 다 끝내 놓았으니 지금 바로 출발한다는 쿠나 경을 배웅했다. 검과 한 손에 잡힐 정도로 작은 배낭을 메고 말 위에 올라탄 쿠나 경은 배웅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 뒤,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황자님, 이만 가 보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

“그래, 쿠나 경도 건강하게 지내게.”

쿠나 경은 짧게 목례를 올리고 말을 출발시켰다. 점점 멀어지는 쿠나 경의 음영을 빤히 바라봤다. 아까까지 이곳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순식간에 가 버렸다. 아! 아침은 먹이고 보냈어야 했는데. 생각이 짧았다. 가는 길에 사 먹겠지?

그나저나 우리 아침은 뭘 해야 하지? 가만 보니 마린은 고기도 잘 먹는 것 같던데, 그럼 고기는 점심에 먹고 시간도 널널하니 뒷산에 가서 산나물을 캐 볼까?

창고에 들어가 나물을 캘 도구로 호미를 찾았다. 작은 삽이라도 있으면 감사하게 쓰려 했다만, 호미가 있을 줄이야. 덕분에 밭도 간편하게 갈 수 있을 것 같다. 호미와 작은 바구니를 들고 뒷산에 올랐다. 길치가 아니니 왔던 길만 똑바로 기억한다면 미아가 될 일은 없을 거다.

키가 큰 나무들이 울창하게 모여 있어 숲을 이룬 뒷산에선 깨끗한 냄새가 났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이슬이 맺혀 있는 풀들이 사늘한 바람에 맞춰 몸을 흔들고 있었다. 이 이름 없는 뒷산에는 4황자가 책에서나 보던 다양한 식물들이 파릇파릇하게 자라 있었다.

4황자의 경이로운 기억력은 가히 식물도감 수준이었다. 덕분에 다양한 산나물과 약초들을 구했는데 곤드레와 냉이, 엉겅퀴, 쑥, 도라지 같은 다양한 산나물들이 있었다. 4황자가 기억하는 이름은 다르지만 내가 알고 있는 나물과 똑같이 생겼으니 그게 그것일 거다. 오래 자란 나무에 붙어 있는 버섯들도 채집했고, 희귀하다는 약초들을 발견해 정신없이 채집했다. 이곳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 못지않은, 희귀 약초들을 피워 내는 뒷산이구나!

바구니가 꽉 찰 정도로 산나물을 캤다. 이 정도면 되겠지 싶어 슬슬 돌아가려 할 때, 이빨 자국이 나 있는 약초를 발견했다. 산짐승인가 싶어 가까이 다가가 약초를 살펴보았다. ‘톱피’라고 불리는 약초였는데, 그 약초에 진득하게 붙어 있는 붉은색의 액체가 눈에 띄었다.

나무의 수액이 붉은색인 경우도 있지만 지금껏 보았던 나무 중에 붉은 수액을 품은 것은 없었다. 그럼 이건 피인가? 괜히 소름이 돋아 얌전히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가려는 와중, 이 숲에서 가장 굵은 나무에 기대어 있는 작고 연한 푸른색의 뭉치가 보였다. 마물인가. 저렇게 작은 마물이 있어?

마음 같아서는 도망가고 싶었지만 작기도 하고 괜한 호기심에 가까이 다가갔다.

“여우?”

연한 푸른색의 뭉치는 한 손에 들어올 정도로 작은 여우였다. 여우는 붉은색의 피를 토해 내고 있었는데, 내 인기척을 느끼고는 부들부들 떨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여우가 기대고 있던 나무 주위가 전부 피로 덮여 있을 만큼 여우는 많은 피를 토해 내고 있었다. 저러다가 죽을 것 같은데. 여우의 피가 묻어 있는 ‘톱피’는 짓이겨 상처 부위에 지혈을 하는 용도의 약초였다. 뭘 알고 먹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 여우의 경우는 내상이라 ‘톱피’는 쓸모가 없었다.

아아, 안 되겠다.

피를 토하는 여우를 안았다. 여우는 크르릉거리며 내 셔츠를 물어뜯었다. 이 셔츠가 뜯어지면 다음은 내 살이 뜯어질 것 같아 서둘러 저택으로 내려가려 하는데 이상하게 여우의 무게가 점점 무거워졌다. 아까는 끽해 봐야 3~4kg이었다면 지금은 그의 열 배인 30~40kg 정도로 느껴졌다.

여우가 토하는 피로 내 셔츠가 젖는 건 그렇다 쳐도, 대형견을 드는 것처럼 너무 무거워 발을 떼기가 힘들었다. 셔츠의 소매가 전부 뜯어지고, 내 살을 파고드는 여우의 날카로운 이빨에 무거운 걸음을 멈췄다.

“널 해치려는 게 아니야. 네가 먹은 톱피는 외상 지혈제고, 내상은 다른 걸 먹어야 하는데 그게 내 저택에 있거든. 철분제도 같이 있으니까 그거 먹고 얼른 낫자.”

결국 여우는 셔츠를 뜯어내 드러난 팔을 가차 없이 물어뜯었다. 쪼그마한 게 이빨은 날카로워 아팠지만 힘이 떨어졌는지 물어뜯은 직후에는 그저 잘근잘근 물고만 있었다. 내 팔에서 흐르는 피를 간신히 삼키는 작은 여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저택으로 내려왔다. 더럽게 무겁네. 이 작은 몸뚱이가 전부 근육이어도 이렇게 무겁지는 않을 텐데. 얘도 마법 같은 걸 쓰는 건가.

걷는 속도를 조금 올려 저택으로 들어가니 잠에서 깬 마린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읽던 책을 내려놓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피로 가득한 내 셔츠와 팔뚝을 물고 있는 여우를 보더니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서 여우를 떼어 놓으려 했다.

“얘는 괜찮으니까 깨끗한 천이랑 라이나 꽃잎 말린 거, 몰로니아 뿌리랑…. 아! 알라타 열매 좀 가져와 줘. 알라타 열매 있지? 냉장…. 아니, 저 보존 찬장에 있을 거야.”

급히 고개를 끄덕인 마린은 깨끗한 천을 식탁에 깔고 말린 라이나 꽃잎이 들어간 유리병과 몰로니아 뿌리, 그리고 초록색의 알라타 열매를 꺼내 왔다.

내 팔뚝에 이빨을 박고 있는 여우를 간신히 떼어내고 천 위에 눕혔다. 외상은 없는 것 같아 다행이다. 내 몸을 닦기 위해 젖은 수건을 가져온 마린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 피로 범벅이 되어 있는 여우의 털을 닦았다. 지금 급한 건 내가 아니라 여우다.

말린 라이나 꽃잎을 곱게 빻아 물과 섞어 여우에게 먹였다. 피를 토하는 만큼 뱉어내는 약의 양도 만만치 않아 다섯 번을 나눠서 먹였다. 몰로니아 뿌리는 씹어 먹어야 하는데 이 고집스러운 여우는 내 팔뚝을 잘근잘근 깨물기만 할 뿐 다른 건 먹지를 않았다. 이걸 먹어야 속이 괜찮아지는데.

“마린, 알라타 열매는 즙을 짜 줘. 남은 과육은 볶아서 수분 없애고. 내가 캐 온 산나물 중에 노란색 줄기 식물 있거든? 그거랑 같이 공병에 넣어 놔 줘.”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을 거부하는 여우를 위해, 내가 친절히 몰로니아 뿌리를 씹어 입 속에 넣어 줬다. 컥컥거리며 거부했지만 혓바닥을 살짝 건드리니 여우는 어쩔 수 없이 받아 삼켰다. 먹어 줘서 고맙긴 하지만 덕분에 내 손가락은 아작 났다.

마린이 열심히 짜낸 알라타 과즙을 가져왔다. 잠시 눈을 뗀 사이 내 손가락이 찢겨 피가 흐르는 것을 본 마린은 다시 한번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황자님 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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