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북쪽 땅으로 쫓겨나다 (3)
“이 정도는 괜찮아. 아, 마린은 가까이 가지 마. 얘 물어뜯는 거 좋아해서 너까지 뜯길 수 있어.”
“치료는 황자님부터…!”
“응, 얘 알라타 즙만 먹이고 할게.”
마지막으로 기력을 회복하는 알라타 즙을 먹이자 여우는 가쁘게 몰아쉬던 숨도 점차 안정이 되었고, 피를 토하던 것도 진정되었다. 약이 잘 들었나 보다. 얕게 숨을 쉬는 여우의 몸을 토닥토닥해 주니 곧바로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마린이 새로 가져온 젖은 수건으로 여우를 깨끗하게 닦아 주고 내 방 침대에 눕혔다.
내 피와 여우의 피로 엉망진창이 된 셔츠는 버리고 나서야 내 상처를 치료했다. 황태자가 낸 옆구리의 상처가 나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 새로운 상처를 달았다. 이번 상처는 일주일 정도 가려나.
“저 짐승은 어쩌다….”
“뒷산에서 산나물 채집하다가 발견했어. 저 작은 걸 그냥 놔둘 수가 없어서.”
“위험한 마물이면 어쩌려고 데려오신 겁니까. 이 상처들도 가벼운 상처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화났어? 미안.”
“화가 아니라 걱정입니다. 옆구리 상처가 나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 상처를. 아무래도 프레오나 제국의 기운은 황자님과 맞지 않는 거 같습니다.”
난 진지한 얼굴로 프레오나 제국을 떠나야 한다 주장하는 마린을 진정시켰다.
“진정해. 세네카보단 프레오나가 나을지도 몰라. 황궁을 벗어난 거에 의의를 두자.”
“그럼 제국이 아닌 왕국으로 가면 됩니다.”
“나 진짜 괜찮으니까 걱정 그만하고 아침 먹자!”
아침은 간단하게 오늘 캔 도라지로 나물을 만들어서 먹기로 했다. 여우가 씹어 먹지 않은 왼손으로 도라지 뿌리를 다듬어 소금물에 담가 놨다. 한 시간 정도 담갔다가 쓴맛이 빠졌을 때쯤 꺼내 살짝 데친 다음 프라이팬에 볶으며 통깨와 소금으로 간을 맞췄다. 참기름이 있어야 하는데.
마을로 내려가면 방앗간엘 가야겠다. 한국 음식엔 꼭 필요한 참기름도 짜고, 들기름도 짤 것이다. 들기름으로 신김치 돼지찜 해 먹어야지. 그전에 고추부터 심고.
여우는 잡식이다. 가만 보니 내 피도 먹었던 것 같던데, 목이 말랐던 걸까.
“여우야, 물이랑 밥 먹고 다시 잘까? 이게 유기농 당근 즙인데….”
“낑!”
건들지 말라는 듯 대차게 고개를 저은 여우는 아직 아픈 건지 콜록콜록 잔기침을 뱉었다.
여우는 이 저택에 온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쭉 자더니 방금 눈을 떴다. 알라타 열매의 즙을 먹었다고 해도 물도 먹어야 할 테고 밥도 먹어야 할 텐데, 낯선 이가 주는 거라 거부하는 건지 그냥 고집을 부리는 건지 일관적으로 거부했다.
“이거 먹고 다시 자자. 이거 먹으면 이제 안 건드릴게.”
“낑!”
“당근 즙이 싫은 건가? 여우는 뭘 좋아하더라.”
“….”
아픈 와중에도 고개를 휘휘 젓기에, 당근 즙을 물리고 여우가 뭘 좋아할까 잠시 고민했다. 그에 고집을 부리던 여우도 어디 한번 잘 생각해 보라는 듯 동그란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근은 싫어하는 것 같고, 고기는 아까 저녁에 다 해 먹어서 없고, 샌드위치에 끼워 먹는 양상추가 조금 남아 있을 텐데 양상추를 뜯어서 줘야 하나.
“양상추?”
“낑!”
“그것도 싫어? 그럼 과일밖에 없는데. 너 아까 알라타 열매 즙 도로 뱉어 냈잖아. 그게 맛없어도 건강에는 좋은 건데. 아, 라즈베리가 있던가? 기다려 봐.”
주방으로 내려가 냉장고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라즈베리를 꺼냈다. 네모난 유리그릇에 담겨 있는 장밋빛의 라즈베리는 어젯밤, 쿠나 경과 마린이 뒷산을 정찰할 겸 올라가 따 온 거라고 했다. 다행이네, 지금 뒷산에 올라가면 어둡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라즈베리는커녕 우스꽝스럽게 넘어졌을 거다.
라즈베리를 들고 여우가 있는 방으로 올라갔다. 여우는 나를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보다, 손에 든 라즈베리를 보고는 꼬리를 흔들며 눈을 반짝였다.
“이거? 이거야? 이게 좋아?”
“낑! 낑!”
라즈베리 한 알을 짓이겨 여우의 입에 넣어 줬다. 처음부터 거부했던 당근 즙과는 다르게 내가 주는 라즈베리를 오물오물 씹으며 과즙을 줄줄 흘리는 여우를 보니 잠잠했던 심장에 아파트 한 채가 떨어졌다. 귀여워….
“많이 먹어. 더 있어.”
여우는 내가 짓이겨 주는 라즈베리를 전부 받아먹었다.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동그란 눈까지 휘어 가며 행복한 표정으로 맛있게 먹은 여우는 마지막 베리까지 야무지게 먹고 나서야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내일은 뒷산에 있는 베리들을 전부 따 와야겠다. 여우야, 이 형은 널 위해서면 뒷산에 있는 모든 베리 숲을 아작 낼 수 있어.
“내일은 제대로 진찰해 보자. 내가 물어봤는데 북쪽 마을엔 수의사가 없다 하더라. 그래도 내가 서적 찾아보고 이것저것 해 볼 테니까.”
“낑.”
“응.”
뭐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렴풋이 닥치라고 하는 것 같았다.
새침한 여우의 몸뚱이를 건들지 않고 비스듬히 누웠다. 아마 내일 일어나면 이 모양 그대로 허리가 휘어 있지 않을까. 하지만 여우는 이조차도 마음에 안 드는지 자신의 풍성한 꼬리로 파닥파닥 침대를 치며 자신의 영역을 확장했다. 결국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누웠다. 지금까지 황자로 지내면서 이런 취급을 받은 적이 없다만. 날 이런 취급한 동물은 여우 네가 처음이야.
달빛을 받아 더욱 예쁘게 반짝이는 여우의 털을 조심히 쓰다듬었다. 얼음을 색으로 표현한다면 여우의 털색이 아닐까 싶다. 투명하게 빛나는 얼음과도 같은 색을 가졌지만 그 몸체가 지닌 온기는 전혀 차갑지 않았다.
* * *
부드러운 털실로 볼을 찌르는 느낌이 들어 눈을 떴다.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여우의 몸체가 눈 바로 앞에 있었다. 분명 바닥에서 잔 것 같은데 내가 언제 침대로 올라왔지? 귀소 본능 같은 건가.
여우는 잠에서 깬 것 같지만 눈을 뜨고 있지 않았다. 이대로 쉬려는 건지 보드라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만 있었다. 여우도 아침 먹어야 하는데 어제 다 먹여서 남은 베리가 없다. 오늘 아침은 마린이 하기로 했으니 난 뒷산 가서 베리를 따 와야겠다. 이 형만 믿어, 널 위해서 제1의 베리 학살 사건을 일으킬 테니.
검은색 튜닉 셔츠와 움직이기 편한 바지를 입고 주방으로 내려갔다. 부지런하게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고 있는 마린에게 우리가 먹을 산나물과 여우의 베리를 따러 뒷산에 간다 했더니 걱정하던 마린은 이상한 생물을 데려오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내심 각서까지 받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어찌어찌 잘 넘어갔다. 탐탁지 않아 하는 마린을 괜찮을 거라 다독인 뒤 작은 바구니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오늘 이 바구니에 베리를 가득 채울 거다.
뒷산에 올라가니 얼마 지나지 않아 라즈베리를 비롯한 각종 베리가 열려 있는 수풀이 있었다. 블루베리, 라즈베리, 블랙베리, 크랜베리 심지어 계절에 맞지 않는 딸기까지 다양한 베리가 열려 있었다. 크랜베리는 말려서 먹어야겠다. 요거트랑 같이 먹으면 맛있을 텐데.
나무로 엮인 바구니에 터져 나온 베리의 과즙이 스며들었다. 베리로 가득 채운 바구니를 뿌듯하게 바라본 뒤 뒷산을 내려왔다. 마린과 약속한 대로 이상한 생물은 데리고 오지 않았다. 애초에 여우는 귀엽고 안쓰러워서 데리고 온 거고, 오크나 트롤같이 괴상한 생김새를 가진 생물이었다면 꽁지 빠지게 도망갔을 거다.
그러고 보니 밭도 갈아야 하는데 팔뚝이랑 손가락이 다 낫기 전까지는 호미질을 못 할 것 같다. 이제 마커스한테 부탁한 씨앗이 올 때가 됐는데.
“어?”
“황자님.”
“아! 마커스가 보낸 이인가? 반갑네.”
저택의 울타리 밖, 명마로 보이는 늠름한 흑색 말의 옆에 서 있는 인영이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아! 마커스가 보낸 사람이구나! 무리하지 않으려 했다만 씨앗이 온 이상 어쩔 수 없지. 오늘 아침만 먹고 바로 밭을 갈아야겠다.
목소리를 듣고 가까이 다가간 그곳엔 도저히 시골 사람이라 생각되지 않을 만큼 고상한 모습의 남자가 있었다. 별 하나 떠 있지 않은 밤하늘과도 같은 흑색의 머리칼은 두 눈을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있었고, 그 아래로 아름답게 솟아 있는 콧대, 상냥하게 올라간 입꼬리와 날카로운 턱 선. 그저 서 있는 것뿐인데도 그를 보고 있으면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한 아찔함이 밀려왔다.
“그대는 누구지?”
누구냐 묻는 나의 말에 그는 숙였던 고개를 치켜들곤 눈을 가리고 있던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에 드러난 깊은 황금색의 눈은 가히 전장에 올라선 흑표범을 보는 것 같았다. 빠져들 것 같은 금안에서 헤어 나와 그의 전신을 눈으로 쓸었다. 허리춤에 찬 검과 팔락거리는 하얀색 포엣 셔츠에 말라붙은 짙은 색의 피가 어색하지 않았다. 저건 또 어디서 묻혀 온 거야. 뭔가 이상한데. 평범한 시골 사람이 이렇게 고고한 분위기를 풍길 리가.
“처음 뵙겠습니다. 젠 이프리트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