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자님 먹고 싶어요-18화 (18/227)

18. 북쪽 땅으로 쫓겨나다 (4)

응?

“…누구?”

“이프리트가(家)의….”

“내 그대를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사지로 보낸 사람이 멀쩡하게 살아 있고, 그것에 그치지 않고 눈앞에 서 있는 것을 본 심정을 서술하시오.

100톤 망치로 둔부를 가격당한 느낌이다. 크리티컬 샷! 이런 개 같은 상황이 있나. 내가 괘씸해서 죽지 못하고 지옥에서 돌아온 건가? 그럴 만도 하지. 잘 살고 있는 와중 적국에서 온 황자 놈이 끼어들어 제 인생을 파탄 나게 만들었는데. 천년의 사랑도 순식간에 식을 정도로 잔인하고 이기적인 상황인데, 얼굴 한번 못 본 인간쓰레기 놈이 그랬으니 당연히 죽이러 와야지. 그치만 난 지금 죽으면 안 된단 말이야. 살려 달라고 빌어야 하나?

“그… 내가 아직 죽기엔 못 해 본 게 너무 많고…요. 나 이거 열심히 땄는데…요. 우리 여우한테 먹여 줘야 하거든…요.”

“혼자 따신 겁니까? 많이 따셨네요.”

“응, 여우가 은근 많이 먹어서…요.”

“말 편히 하세요. 원망스럽지만 탓할 생각은 없습니다.”

“으응…. 알고 있었구나.”

올렸던 머리칼을 다시 내린 채 살풋 웃은 그는 흑마의 고삐를 잡아 마구간으로 들어갔다.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간신히 버티던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쓰러졌다. 그 와중에 여우를 위한 베리를 담은 바구니는 떨어트리지 않게 품에 안았다.

후우, 나 방금 죽을 뻔한 거 맞지? 마린의 말대로 프레오나의 터는 나와 맞지 않는 것 같다. 얼른 뜨든가 해야지. 근데 쟤는 왜 왔대? 아, 설마 저승사자 뭐 그런 건가? 저승사자는 망자를 데리고 가기 편하게 누구나에게 호의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는데. 쟤도 쓸데없이 잘생겼어. 저런 외모의 저승사자가 망자를 데리러 온다면 사채를 써서라도 퍼스트 클래스 저승 티켓 끊는다는 사람이 넘쳐날 거다.

그의 경악스러운 외모로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순간 겨드랑이 사이로 손이 들어와 쭈그리고 앉아 있던 나를 단숨에 일으켰다.

“악!”

“찬 곳에 앉아 있으면 몸에 좋지 않습니다. 들어가서 마저 이야기 나눌까요?”

그는 내가 놀라지 않게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며 내가 들고 있던 베리 바구니를 대신 들어 줬다. 먼저 저택 안으로 들어간 그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서둘러 따라 들어갔다. 놀란 마음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마린은 먼저 들어온 남자의 얼굴을 보곤 내가 또 이상한 걸 주워 왔다며 억지로라도 각서를 쓸걸 그랬다고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이 남자는 내가 데려온 게 아니야.

남자는 그런 마린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한 뒤 소파에 앉았다. 자신의 집인 양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그가 신기했다. 그러고 보니 황자인 내 몸에 허락 없이 손대고, 하대의 말투는 아니었지만 어딘가 가벼웠다. 그게 또 이상하게 기분 나쁘지 않았다. 잘생겨서 그런가.

납작하게 펴진 빵을 굽고 있던 마린을 불렀다. 마린은 차를 내온다며 잠시 자리를 피했고, 곧이어 투명한 유리 티팟에 붉은색의 홍차를 담아 내왔다.

“마린, 여기는 젠 이프리트 경. 이프리트 경, 여기는 나를 도와주고 있는 마린.”

“반갑습니다.”

“네, 경의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그랬나요?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을 것 같은데.”

하하 웃으며 나를 바라보는 눈에는 책망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양심이 콕콕 찔리는 느낌에 시선을 끊어 내고 처음 얼굴을 마주했을 때 묻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그것보다, 이프리트 경은 어찌 이곳에….”

“편하게 젠이라고 불러 주세요.”

“그래, 젠. 그대는 이곳에 어인 일로….”

“아까처럼 편하게 말씀하세요.”

말을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내가 아까 어떤 말투를 썼더라. 그의 등장에 놀라 불안하게 떨고 있을 때라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음, 여긴 어떻게 왔어?”

“오스먼드 전하, 아니, 이젠 폐하겠군요. 오스먼드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았습니다.”

“응?”

“황자님 대신 황태자를 죽이는 것이 폐하의 명령이었습니다.”

“명령이라니, 그대는 중립이었을 텐데?”

“제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의 명령이니 아랫것은 그대로 들어야죠.”

“그건 그렇지만….”

“이렇게 살아 있고, 누이가 원하던 것을 이뤘으니 불만은 없습니다.”

누이가 원하는 것? 누이라면 한나를 말하는 것일 테다. 차분했던 한나가 원하는 것이 있다는 게 의아해 고개를 갸웃했다. 그에 상냥하게 웃어 보인 젠이 조금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제 누이는 백작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한마디로 한나를 백작으로 만들기 위해 자기가 죽을지도 모르는 오스먼드의 명령을 들었다는 거다. 안 그렇게 보였는데 시스콤이었나.

“오스먼드가 한나를 백작으로 만들어 준다고 했다는 거지? 그래서 그대는 미련 없이 황태자를 죽인 거고.”

“네, 그런 거죠.”

“오스먼드랑 거래가 가능했다면 더 뜯어낼 수 있었을 텐데.”

“이 정도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폐하의 명을 듣지 않았다면 전 제국에서 도태되었겠지요.”

그것도 맞는 말이다. 난 세네카 제국 황자의 입장이라 오스먼드와 거래가 가능했지만, 젠은 프레오나 제국의 사람이었으며 황실에 충성을 해야 하는 귀족이었으니 나와 시작점이 달랐다. 오스먼드의 아량이 아니었다면 한나가 백작이 되든 어쩌든 상관 않고 젠을 죽었겠지. 아량이 아니라 검은 놈의 의도적인 수작일 수도 있고. 마음에 안 들어, 오스먼드.

마린이 가져다준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씁쓸한 홍차는 언제 마셔도 적응되지 않는다. 홍차 말고 커피는 없나. 우유를 타 먹어도 좋을 텐데.

별로 궁금하진 않았지만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 온 지금, 그에게 프레오나 제국의 상황에 대해 물었다. 오스먼드가 황제가 된 것과 함께 무엇이 바뀌었고, 무엇이 생겨났는지.

“일단 스파딘 전 황제와 타루스 황태자의 장례식이 있었네요. 성대하게 했지만 서둘러 끝내 버려 외신들이 끼어들 틈이 없었습니다. 아, 세네카 제국의 사신도 왔다가 다시 돌아갔겠네요.”

“그렇구나. 그럼 황태자는 네가 죽인 거야?”

“네, 이거 황태자의 피입니다. 전 감옥에 갇혀 있다가 폐하의 도움으로 빠져나왔고요.”

그는 하얀 포엣 셔츠에 굳어 있는 짙은 색의 피를 가리키며 당당하게 황태자의 피라 말했다. 그의 표정은 점심에는 어떤 메뉴를 먹을지 고민하는 것과 같이 담담했다. 그나저나 점심 뭐 먹지? 아니, 이게 아니지. 감옥?

“감옥?”

“아무리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서라지만 황족이니까요. 원래 같으면 그 자리에서 목을 쳐 목숨을 끊었겠지만, 스파딘 전 황제의 장례식 문제와 황자님의 재판과 겹쳐서 어찌어찌 잘 풀려났습니다.”

“아….”

“지금쯤 프레오나 제국 수도에는 ‘남색가 젠 이프리트 백작이 세네카의 볼모 황자를 사랑해 악독한 황태자에게 정의의 심판을 내리고 벌을 받았다.’라는 유치한 이야기가 돌고 있겠네요. 원하시는 이야기가 이거 맞으시죠?”

“쿨럭…! 그게 무슨. 그건 오스먼드 취향이지, 내 취향 아니야!”

“이상하네요. 오스먼드 폐하께서 황자님이 원하시는 방법이라며 어쩔 수 없이….”

“그럴 리 없잖아! 오스먼드 이 개자식…!”

오스먼드 이 못돼 처먹은 자식! 누구 때문에 이 사달이 난 건데! 물론 진부한 사랑 이야기를 만들어 보자고 하긴 했다. 하지만 시나리오는 오스먼드가 썼다. 물론 원인 제공은 내가 했지만…. 아니, 근데 이 남자는 내가 여기 있는지 어찌 알고 북쪽으로 온 거야?

“그나저나 어떻게 여기로 온 거야? 내가 여기에 있는지 알고 온 건가?”

“그럼요. 저도 유배 온 거예요. 폐하께서 이왕이면 황자님이랑 같이 있으라고 하셔서, 저도 어쩔 수 없이 온 겁니다.”

“허, 오스먼드 놈 속셈이 뻔히 보이네. 그 망할 놈이 나 죽이라고 하든?”

“그런 말은 없었고, 그냥 옆에 있으면서 허튼짓하지 않게 감시하란 말은 했네요.”

“감시?”

“네.”

오스먼드는 가만히 있겠다는 나를 믿지 못했는지 아님 ‘젠 이프리트’라는 유능한 패를 버리기 싫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찌 됐건 묵혀 두는 패 두 장을 북쪽으로 보낸 거다. 빌어먹을 놈.

“나한테 말해도 돼, 감시한다는 거?”

“못 할 건 또 뭐예요. 앞으로 황자님이랑 평생 살아야 하는데. 멀리 있는 폐하보단 황자님한테 잘 보이는 게 낫죠.”

“….”

“그런 의미에서 잘 지내 봐요. 황자님, 마린.”

그는 악수를 하자는 의미로 손을 내밀었다. 얘는 속도 참 좋네. 자기를 죽이려던 사람이랑 잘 지내 보자고 손도 내밀고.

“…도브로미르야. 미르라고 불러.”

“네, 미르 님.”

거리낌 없이 ‘미르 님’이라 부르는 젠이 신기했다. 마린에게도 황자님이라 부르지 말고 이름으로 부르라 했었지만 싫다고 거절당했다. 내가 황자임을 잊지 말아야 하니 자기라도 불러야 한다고. 그에 반해 젠은 참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이러다가 말까지 놓으라고 하면 진짜 놓을 것 같다.

“방은 중간 방을 쓰고 싶은데 비어 있나요?”

“내가 쓰고 있긴 한데, 원한다면 비워 줄게.”

“이미 주인이 있다면 괜찮아요. 왼쪽 방 쓸게요.”

젠이 가벼운 미소를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2층 계단에서 낑낑거리며 여우가 내려왔다. 우리 여우 이젠 움직이기도 하고 다 컸네! 배고파서 내려온 건가 싶어 바구니에 있는 베리들을 씻으려 한 움큼 집었다.

“이상한 걸 키우고 계시네요.”

“응?”

여우를 향해 ‘이상한’이라고 말한 젠은 방금까지 유지했던 가벼운 미소는 어쩌고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여우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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