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북쪽 땅으로 쫓겨나다 (5)
“팔목이랑 손가락을 다친 것도 저것 때문인가요?”
“아, 응. 근데 이건 치료하다가 다친 거야.”
손가락은 보이는 곳이니 그렇다 쳐도 팔목을 휘감은 붕대는 셔츠로 가리고 있었는데 언제 봤는지 그는 내가 상처가 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성장기의 이종족은 성격이 괴팍해진다는데, 잘도 안으로 데려오셨네요.”
“이종족?”
“…모르시면 됐습니다. 나중에 따로 얘기해 볼게요.”
다시금 예쁘게 미소 지은 젠은 여우를 지나쳐 2층으로 올라갔다. 여우는 그런 젠을 노려보다 내게 다가와 폴짝 뛰어 내 품 안으로 들어왔다. 미친, 여우가 먼저 나한테 안겼어…!
감격스러운 기분에 여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 손을 올렸지만 여우는 도도하게 내 손을 쳐 냈다. 아, 만지지는 말고 밥 달라고?
* * *
젠이 찾아오고 이틀이 지나서야 마커스가 보낸 사람이 왔다. 이 사람과 젠을 착각한 게 젠에게 미안해질 정도로 우락부락한 사람이었다.
마차 안에 가득 실려 있는 여러 작물과 과일, 그리고 다양한 곡식 가루는 나 혼자서 1년 내내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양이었다. 씨앗을 보내 달라 했을 뿐인데 식자재도 함께 왔다.
“이게 다 무엇인가…?”
“부탁받은 씨앗과 식자재입니다.”
“난 씨앗만 부탁했건만, 이 식자재들은 누가 부탁한 거지?”
“식자재는 마린이라는 분께서 주문하셨다고 들었는데.”
아, 그랬구나. 역시 마린은 똑똑해. 생각해 보면 씨앗을 심었다고 바로 먹을 순 없잖아. 역시 마린의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지?
“그랬군. 씨앗의 값까지 마린이 줄 것이다. 그럼 조심히 가게나.”
“아, 황자님…! 씨앗의 값은 주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물론 식자재 값도….”
“그게 무슨 미련한 소리인가. 그대들이 열심히 일군 곡식을 무보수로 받을 수는 없네.”
“무, 무보수가 아닙니다! 제 여식을 살려 주십시오!”
눈 깜박할 새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는 남자를 당황스레 쳐다보았다. 내가 무슨 힘이 있어 그대의 여식을 살려 주겠나? 그런 건 오스먼드 놈한테 가야지!
“이게 무슨. 어서 일어나게.”
“제발 제 여식을 살려 주십시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다만, 나는 힘이 없어. 그대는 부탁할 사람을 잘못 찾았네.”
마당이 크게 소란스러워지자 2층에 있던 젠이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이 상황을 지켜보려는지 멀뚱히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냉큼 내려와서 나 좀 구해 주라!
“마커스에게 들었습니다! 황자님께선 의술에 능하시다고…!”
“아닐세. 나는 의사가 아니야. 단순히 약초를 조금 다루는 것뿐이네.”
황궁에서 북쪽으로 오는 길, 의사를 찾는 게 귀찮아 간단한 상처와 두통과 복통 같은 증상은 자가 치료를 하긴 했었다. 마커스는 그걸 보고 내가 의술에 능하다고 소문을 낸 건가? 게다가 그 약초학도 4황자의 기억을 기반으로 아는 거라 잘한다고 하기엔 애매했다.
젠은 남자와 나의 대치가 길어지자 창문을 닫았다. 무시한 건가 조금 씁쓸해지려 할 때, 열려 있는 현관 저택 문 사이로 그가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같이 내려오던 여우의 목덜미를 잡아 소파에 내던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저택의 현관문을 굳게 닫고는 내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잠깐, 너 방금 우리 여우 던졌니?
“황자님, 무슨 일이십니까.”
황제를 섬기는 고아한 귀족처럼 고개를 숙인 젠은 남자를 의식해선지 평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 검은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그의 금안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 그게….”
“저자가 황자님께 무례를 저질렀습니까? 명을 내려 주십시오. 당장 저자의 목을 치겠습니다.”
“아니다! 그럴 필요 없어. 무례 같은 게 아니라….”
젠의 태도엔 지금까지 내게 보이던 가벼운 것과는 전혀 다른, 충실한 기사와도 같은 진중함이 있었다. 이제껏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말이 무색하게 그 진중한 태토는 이질감이 들기는커녕, 몸에 딱 맞는 슈트를 입은 듯 자연스러웠다.
내가 우물쭈물 말꼬리를 늘이자, 고개를 조아리던 남자는 젠의 기세에 밀리지 않고 이때다 하고 자신의 사연을 털어놨다.
“제 여식이 일주일 전부터 사경을 헤매며 열이 끓고 있습니다! 영주성에 이야기를 해 보았지만 손이 빈 의사가 없다며 전부 무시하고 보내 주지 않습니다. 제발 황자님께서 제 여식을 봐주십시오!”
“손이 빈 의사가 없다? 그것참 희한하군.”
“영주성엔 아픈 도련님이 계십니다. 도련님의 병을 고치신다며 마을에 있는 의사란 의사들을 전부 잡아가 성 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있습니다!”
남자의 말을 듣고 마을로 내려가면 귀찮아질 예감이 들었다. 그냥 씨앗과 식자재 값을 지불하고 끝내고 싶은데 사람 목숨이 달려 있다니 무시하면 죄책감이 들 것 같다.
그래, 봐주는 것 정도는 해 줄 수 있을 거다. 4황자는 약초를 활용하는 능력이 뛰어났고, 웬만한 의사와 견줄 정도로 관찰력도 뛰어났으니까. 황자가 아니라 평민으로 태어났다면 의사가 되어 비교적 편하게 신분 상승을 했을 텐데 여러모로 운 나쁘게 세네카의 황자로 태어났다.
“알겠네. 그대의 여식을 보러 가지. 하나 말했다시피 난 전문적인 의사가 아닐세. 운이 좋아 그대의 여식이 나아질 수도 있으나, 잘못될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게.”
“만일 잘못되어도 황자님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제 여식이 병을 앓은 지 어언 한 달이 다 되어 갑니다. 이젠 그 누구의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대로면 제 여식은 죽을지도 모릅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그래, 준비하고 나올 테니 기다리고 있게.”
무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고 있는 젠을 끌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책을 읽던 마린을 불러 사정을 설명하고 아공간 주머니를 가져오라 했다. 아직 정리하지 않은 약초와 약들이 그 안에 들어 있으니 힘들게 바리바리 챙겨 가지 않아도 아공간 주머니 하나로 해결이 가능했다.
그나저나 누구랑 다녀오지? 마음 같아선 마린과 같이 다녀오고 싶다만, 젠이 여우를 대할 때 어딘가가 서늘해 보였다. 그 둘을 같이 놔두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었다.
“젠, 같이 갈래?”
“미르 님 부탁이라면 거절할 수 없죠.”
“응, 간단하게 챙길 거 챙겨.”
남자의 앞에 있을 때와는 또 다른 태도다. 평민 앞에서는 점잖은 척 무게를 잡고, 내 앞에서는 부드러워진다 해야 하나. 훨씬 가벼운 느낌이다. 음… 원래 귀족들은 다 저렇게 이중인격인가 보다.
“마린, 잠시 마을에 다녀올게. 뭐 필요한 거 있어?”
“아뇨, 그저 황자님이 조심하셔서 다치지 않고, 아무것도 데려오지 않았으면 합니다.”
“하하, 걱정 마. 안 데려올 테니까. 아, 여우는 과일 챙겨 주면 돼.”
다른 건 안 먹지만 과일, 특히 베리는 잘 먹으니 배고파하는 것 같으면 베리를 먹이라고 했다. 그에 송곳니를 드러내며 입꼬리를 올린 여우가 너무 귀여워 주저앉을 뻔했지만 이어지는 젠의 말에 올라간 입꼬리가 저절로 내려갔다.
“과일만 먹으면 건강에 좋지 않으니 채소도 섭취하게 해 주세요. 특히 캐릿이 몸에 좋다더군요.”
“낑!”
여우는 젠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낑! 하고 싫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했다. 젠이 말한 캐릿은 주황색의 채소인 당근이다. 젠, 일부러 그러는 거지? 여우가 당근 싫어하는 건 나도 알고 마린도 알고 있는데.
“억지로라도 먹여야 해요. 캐릿에는 여우에게 필요한 모든 영양이 들어 있다 하니까요. 여우 씨, 저와 미르 님이 올 때까지 잘 먹고 있을 거죠?”
입은 웃고 있지만 눈빛은 싸늘했다. 젠, 당신 무서운 놈이었구나. 우리 여우 괴롭히기나 하고. 그래도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가 없다. 이것도 엄연한 편식이고, 당도가 높은 과일만 먹으면 당뇨에 걸릴 것 같아서 걱정하긴 했었으니까. 젠은 나쁜 아빠 해. 난 착한 아빠 할 테니.
“채소 잘 먹으면 여우가 좋아하는 과일도 많이 먹게 해 줄게. 내가 여우 위해서 베리 많이 따 온 거 봤잖아. 응?”
“끼잉….”
“먹기 싫어도 조금은 먹어야 한다? 알았지? 캐릿이 싫으면 양상ㅊ… 아니, 래트런이라도 먹자.”
“낑.”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꼬리를 위아래로 파닥거린 여우를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서 꼭 안아 주고 싶었지만, 마음을 졸이며 나를 기다리고 있을 남자를 생각해 눈물을 머금고 돌아섰다.
“크흡! 돌아와서 꼭 안아 줄게, 여우야.”
“낑.”
돌아와서 꼭 안아 준다는 내 말에 고개를 팽 돌린 여우는 토실한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 나 방금 거부당한 거지?
여우의 거절에 낙심한 나를 본 젠이 소리 없이 가볍게 웃으며 팔을 벌렸다.
“제 품은 열려 있어요.”
허, 저 얼굴과 저 몸으로 플러팅이라니. 제정신이냐.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다. 조심해야겠어. 남색가라는 소문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만, 확실한 건 남녀 구분 없이 홀리는 인간이라는 거다. 위험해, 아주 위험해.
“거긴 괜찮아. 안 부드럽잖아.”
“대신 단단합니다.”
“….”
“그리고 따뜻해요.”
“너어….”
“미르 님이 원하시면 언제든 열어 놓을게요.”
젠은 그 말을 끝으로 부드럽게 웃고는 내가 탈 마차를 확인하겠다며 먼저 나갔다. 나는 그 자리에 굳어서 눈치 없이 세차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쟤는 뭐 저런 얼굴로 훅 들어와? 오글거리고 아주 느끼한데 그게 또 설렌다. 젠의 얼굴이 심각하게 내 취향이긴 하지. 아니, 저 얼굴이면 어떤 취향이든 깨부술 거다. 한마디로 얼굴이 개연성.
“마린… 나 부정맥….”
“사랑입니다.”
“이건 부정맥….”
“사랑입니다.”
“부정….”
“사랑.”
마린, 이런 취향이었구나.
“…솔직히 저 얼굴로 그런 말 하면 사기 아니야?”
“그러네요.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이 달려들 텐데.”
“그러니까. 쟤 나 일부러 꼬시려고 저러나? 내가 잘생긴 얼굴에 쉽게 넘어가는 거 알고 있나 봐.”
“일단 다녀오세요.”
“응, 잘 쉬고 있어. 선물 사 올게.”
마린의 배웅을 받으며 저택 밖으로 나갔다. 마차의 옆에서 나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젠이 내 손을 붙잡고 마차 안으로 안내했다. 식자재로 가득 차 있던 마차 안은 언제 옮겼는지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젠이 치운 거야?”
“네, 제가 다 했죠.”
“오, 되게 빠르다. 여기 가득 차 있었는데.”
“사랑의 힘으로는 못 할 게 없죠.”
“….”
“미르 님을 사랑해서 황태자도 죽였는데, 제게 이 정도는 간단합니다.”
부드럽게 웃은 젠의 미소를 보니 생각났다. 나 얘 죽이려 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