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북쪽 땅으로 쫓겨나다 (6)
마차를 타고 한 시간 남짓 달렸다. 북쪽에 있는 마을은 제국의 수도와는 달리 아늑해 보이는 오두막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고, 호수를 중심으로 다양한 상점도 즐비해 있었다. 상점가를 지나자 한적한 숲길이 나왔고, 숲길을 지나자 오면서 보았던 오두막보다는 조금 큰 집들이 몇 채 있었다. 우리는 그중 파란색 지붕의 집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 있어야 할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집에선 없던 병도 생기겠는데. 루독이란 남자를 따라 딸아이가 있다는 방으로 들어갔다. 창을 닫고 한 줌의 햇빛도 허락하지 않는다는 듯 암막 커튼을 쳐 놓은 방 안, 침대에 고이 누워 있는 아이는 미약하게나마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직 여섯 살도 안 돼 보이는데, 어린 나이에 고생이네.
“루독, 이 아이가 아프기 시작한 때가 언제라 했지?”
“이제 곧 한 달째입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두통이었는데, 일주일 전부터는 열도 펄펄 끓고 가끔 정신도 잃습니다.”
아이를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아이가 누워 있는 머리맡으로 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찬 공기가 내려앉은 바닥의 온도가 차가워 순간적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이의 식단은? 가리는 게 있었나?”
“특별히 가리는 건 없습니다. 빵과 채소… 고기도 먹고, 가끔이지만 생선도 잘 먹었습니다. 아프고 나선 곡식을 빻아 물과 개어 먹였지만 뭘 먹지를 못하니 도로 다 토해 냅니다.”
“으음, 그럼 창문은 왜 저렇게 닫아 놓은 거지?”
“아, 찬 공기 때문에.”
“당장 열게. 사람은 햇빛을 보고 살아야 해. 비타민D가 부족…. 아, 이렇게 말해도 모르겠지.”
내 말을 들은 루독은 바로 암막 커튼을 걷고 창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눈도 뜨지 못할 만큼 앓고 있는 아이는 연신 식은땀을 흘렸다. 그런 아이의 열을 재려 하는 내 손을 젠의 손이 막았다. 그러고는 무심한 표정으로 나 대신 아이의 열을 쟀다.
“꽤 높습니다. 대략 39도 정도 되는 것 같고, 손과 발은 찬데 머리 부분은 뜨겁습니다.”
“…아, 응. 그렇구나.”
“더 시키실 일 있으십니까?”
“이 물수건 갈아 줘, 차갑게.”
“네, 알겠습니다.”
젠은 내 말에 따라 침대 바닥에 놓여 있던 대야와 물수건을 가지고 나갔다. 젠이 돌아올 때까지 아이의 증상을 관찰했다. 두통으로 시작해서 한 달 정도 지나면 쓰러지고, 식은땀이 나고, 머리는 뜨거운데 손과 발이 차갑고, 눈동자는 정상, 입술은 푸르뎅뎅하고, 숨은 미약하고, 먹으면 다 토하고. 아, 손톱이 하얗네. 4황자가 봤던 서적에서 이런 증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 루아비 병.”
“네?”
“아이가 두통을 앓는다 했을 때 의사에게 가지 그랬나. 그럼 이렇게 아프지 않아도 됐을 터인데.”
“당시에도 영주성에서….”
“영주가 문제였군. 쯧. 어찌 됐건 아이의 병은 약초로도 간단하게 고칠 수 있어. 의사가 필요 없는 병인 걸 다행으로 생각해.”
루아비 병에 대해서 설명했다. ‘루아비’라는 기생충이 몸 안으로 들어갔고, 머리까지 도달해서 두통이 오는 거라고. 원래는 몸 안으로 들어가면 위에서 녹아 죽는 놈인데 가끔 질긴 놈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몸을 해치는 기생충은 아니지만, 아이의 경우 기생충을 없애지 않고 두통을 오래 방치해 몸에 기력이 없는 거다. 약초로 루아비를 없애고 체력을 꾸준히 관리해 주면 금방 나을 병이다.
퍼디스로 인해 사라졌지만, 4황자가 아끼던 시종이 걸렸던 병이었다. 생각하니 빡치네, 퍼디스 이 빌어먹을 새끼. 누구 맘대로 내 시종을 갈아 치워? 아, 정확히 말하면 내 시종은 아니었지만. 4황자의 기억을 훑어보면 볼수록 점점 4황자에게 내 개인적인 감정이 이입되는 것 같다. 이게 좋은 징조일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됐건 빡친다. 형님이고 황족이고 뭐고 어퍼컷 한 대는 갈겨 줬어야 하는데.
“가이탄과 터티스를 함께 달여 먹으면 루아비는 죽을 거야. 다른 건 먹이지 말고, 일주일은 그것만 먹여. 하루 세 번, 한 컵 이상.”
“가이탄과 터티스 말입니까?”
“그래, 가이탄은 약방에 가면 있을 것이고, 터티스는 흔한 풀이니 어디서든 찾을 수 있을 거야. 내 그댈 위해 이것저것 가지고 왔건만 아이의 병과는 상관없는 약재뿐이라 미안하게 됐어.”
“아닙니다! 충분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황자님!”
“아이가 토를 하는 건 소화를 못 해서 그러는 거야. 약을 다 먹고 나선 한동안 채소를 갈아서 주게. 곡물은 포만감만 들 뿐, 영양가가 없으니 가급적이면 피하고. 아, 그리고 아이의 위가 약한 것 같으니 평소에 란을 많이 먹이면 좋을 거야.”
“네! 명심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황자님!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됐네, 아이가 잘 자라 주는 것으로 충분해.”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잠에서 깨지 않게 조심히 쓸었건만, 그 작은 손짓에도 정신이 든 건지 눈을 뜬 아이는 걱정스러운 아비의 표정을 보고 미약하게나마 ‘괜찮다’며 웃어 주었다. 이제껏 루독이 아이의 상태를 물으면 아이는 지금처럼 자신은 괜찮다며 안심시켰을 거다. 철이 빨리 든 아이다.
끼어들지 않고 문 밖에서 대기하던 젠은 아이가 잠에서 깬 것을 보자 가까이 다가와 물수건을 짜 이마에 올려 주었다.
“그럼 가 보겠네. 루독, 그대도 몸조리 잘하게. 혼자 딸아이 간병하느라 힘썼어.”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단단하게 서 있던 루독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자식을 위해 무릎을 꿇고 머리까지 조아리는 부모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순 없지만, 아이는 저런 부모가 있어 행복할 거다. 부럽네.
* * *
“…나 말 못 타.”
“같이 탈 거예요.”
“떨어지면 어떡해.”
“제가 잘 잡고 있을 테니 걱정 마세요.”
“그치만….”
이곳까지 타고 온 것은 루독의 마차였고, 우리가 돌아갈 때 쓸 수 있는 수단으로는 마차에 껴서 온 젠의 흑마밖에 없었다. 젠의 흑마는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며 윤기가 흐르는 검은 갈기를 뽐내고 있었다. ‘너 같은 걸 태워 주는 것을 감사히 여겨라.’라고 하는 느낌이었다. 말 주제에 저런 눈빛을 할 수 있다니.
“불안한데.”
“처음만 그러지 익숙해지면 별거 아니에요.”
젠은 실례하겠다는 말과 함께 단단한 손으로 내 허리를 잡아 올려 말에 태웠다.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시야가 바뀌었다.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멍청한 얼굴로 입을 벌리곤 멍해졌다. 흑마는 주인이 아닌 사람이 올라탄 것이 마음에 안 드는지 발굽을 강하게 한번 털었고, 불안전한 흔들림에 멍했던 정신을 바로잡았다. 젠은 흑마를 몇 번 쓰다듬어 주다 재빨리 뒤에 올라타 내게 고삐를 쥐어 주었고, 어색해하는 내가 말에서 떨어지지 않게 자세를 잡아 줬다.
“말은 한 번도 타 보지 않으신 건가요?”
“응, 탈 일이 없었으니까.”
“그럼 자세부터 잡아 드릴게요.”
그는 은근한 움직임으로 내 허리를 지나 골반을 부드럽게 잡았다. 셔츠 한 장 사이로 느껴지는 그의 온기가 간지러웠다. 그는 한 발로 말의 몸체를 두어 번 토닥였고, 흑마는 주인의 부탁에 따라 천천히 걸었다.
“말이 움직일 때마다 이렇게, 허리를 움직이세요.”
그는 내 골반을 그러잡고 반동에 맞춰 안장 가까이로 누르고 올리는 것을 반복했다. 나는 그의 손짓에 따라 어색하게나마 허리를 움직였다. 미친, 이거 완전….
“어렵나요?”
“아, 아니.”
“조금 익숙해졌으면 빨리 달려 볼까요? 이 속도로는 오늘 밤에나 도착하겠어요.”
“으응.”
조금 빨라진 속도에 허리 짓도 빨라졌다. 음란 마귀가 머릿속에 가득 들어찼다. 정말 기본적인 말 타는 방법일 텐데, 민망하고 음란한 생각밖에 들지 않은 난 그를 보기가 창피해 점점 고개가 숙여졌다. 내 뇌에 뭐가 들어 있는 거야.
“고개 숙이지 마세요.”
그는 오른쪽 골반을 쥐고 있던 손을 떼곤 내 턱을 부드럽게 잡아 정면을 보게 만들었다. 고개를 숙이면 균형 감각이 떨어지니 정면을 제대로 보고 움직여야 한다며 친절하게 설명을 해 줬지만 턱에 닿는 그의 온기와 귓가에 들리는 낮은 목소리에 전혀 집중할 수 없었다.
“미르 님은 다정하시네요.”
“으응?”
그가 내 턱을 잡은 손은 그대로 둔 채, 왼쪽 골반을 잡고 있던 손을 떼어 고삐를 잡아챘다. 그러고는 내가 떨어지지 않게 가둘 듯 끌어안았다. 기대어진 그의 무게에 잠깐 동안 숨이 멈췄다. 그가 고삐를 잡은 손을 크게 내리쳤다. 점점 빨라지는 속도에 그가 알려 준 자세를 기억해 허리가 부서지지 않게 움직였다.
“여우를 주워 온 것도 그렇고, 이곳에 오는 것도 사실 귀찮아서 싫으셨죠? 근데 이렇게 왔잖아요.”
“그건 놔두면, 헉, 찝찝할, 거 같아서. 잠깐, 얘 속도, 가, 너무, 빨라…!”
“굳이 대답하실 필요 없어요. 잘못했다간 혀가 끊어질 수도 있으니 입은 다물고 계세요.”
혀가 끊어질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경고에 소름이 돋아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입을 다문 후부터는 당연하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젠이 혼자 떠드는 이야기를 들어 줘야 했다.
“사실 프레오나 제국에서 미르 님을 본 적이 있어요. 타루스 황태자랑 같이 있었을 때였는데, 그때 황태자가 미르 님의 여기를 이렇게… 쓰다듬었던 거 봤거든요.”
타루스는 항상 내 목덜미를 음흉하게 쓸었다. 그때마다 징그러운 벌레가 몸속을 기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는 타루스 새끼의 고간을 발로 뻥 차 버리겠다는 생각으로 버텼었는데, 그것을 똑같이 따라 한 젠의 손길은….
“그때 미르 님 표정이 좋지 않아서 걱정됐었거든요.”
“….”
“그리고 황태자를 마지막으로 마주했을 때 그냥 다 버리고 도망갈까 생각했었지만.”
“….”
“미르 님 생각이 났어요.”
더욱 빨라지는 속도에 정신이 없다. 덕분에 그가 일방적으로 말하는 대화의 맥을 맞추지 못하겠다. 이것을 노리고 말의 속도를 올린 거라면 성공했다고 말해 주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나 말 좀 하게 속도를 좀 낮춰 주련?
그는 이런 내 속마음을 전혀 모른 채 차분한 어조로 이어 말했다.
“우습죠? 죽기를 망설이는 와중 날 죽이려 한 사람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니.”
“….”
“저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단순한 동정인지, 아니면 다른 감정인지.”
“그게…. 윽!”
“쉿, 지금은 제가 말하는 시간이에요. 미르 님은 발언권이 없어요.”
“너, 일부…러!”
“하하, 미르 님도 일방적으로 명령하고 사라지셨잖아요. 저도 일방적으로 말하고 끊어 낼 거예요.”
내 턱을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윽. 짧게 내뱉어진 신음을 들은 그가 잡은 손의 힘을 빠르게 풀었다. 그러곤 천천히 내려 가느다란 목을 부드럽게 쥐었다. 그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감싸진 목 언저리에 퍼져 나갔다. 그가 잡은 곳만 타오르는 것 같았다. 뜨겁다.
“이렇게 약한 사람인데.”
“….”
“미르 님이 살아서 다행이에요. 부디 제가 당신을….”
그는 그 말을 끝으로 감긴 손을 풀고 양손 모두 흑마의 고삐를 잡았다.
뒷말이 궁금했지만 부러 묻지 않았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