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자님 먹고 싶어요-21화 (21/227)

21. 북쪽 땅으로 쫓겨나다 (7)

말에서 나를 내려 준 젠은 아무 말 없이 바로 마구간으로 갔다. 얼굴을 안 보는 것까진 좋았으나, 앞으로도 저택 안에서 마주쳐야 하는 게 문제였다. 사실 이렇게 어색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기분이 조금 그렇다. 마치 반 친구와 싸웠는데 그 친구가 짝꿍이라 매번 얼굴을 봐야 하는 서먹함이다.

“아아아,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무슨 일 있으십니까?”

갑자기 나타난 마린 덕에 잡념이 사라졌다. 마린에게 선물을 사 오겠다 말했건만 젠의 기세에 밀려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 마린. 미안, 선물은….”

“괜찮습니다. 황자님이 다치지 않고, 아무것도 데려오지 않은 것이 제겐 선물입니다.”

“으응….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이프리트 경과 무슨 일 있으셨나요? 두 분 다 표정이 좋지 않네요.”

“젠도?”

“네, 웃고 있지 않으셔서요. 항상 웃고 계셨잖아요.”

마린이 보기에 젠은 항상 웃고 있는 사람이었나 보다. 마린이 본 대로 젠은 웃기도 잘 웃었지만 항상 웃고 있지는 않았다. 가끔 눈이 마주칠 때만 잘 웃었지, 평소에는 따분해 보이는 표정을 지을 때가 많았다.

“음, 조금 어색해서. 알다시피 내가 젠을 죽이려 했잖아.”

“황자님이 사셔야 했으니까요.”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양심에 찔린다 해야 하나.”

“그건 어쩔 수 없죠. 그래도 두 분 다 잘 살아 계시니 잘된 일 아닌가요?”

“그치, 잘된 일이지. 근데… 그….”

“네?”

“젠은 날 미워하겠지? 성자가 아닌 이상….”

“그렇겠죠. 젠 님 입장에선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으니까요.”

그래, 딱 맞는 말이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젠이 날 미워해도 난 그저 ‘죄송합니다.’ 하고 고개를 조아려야 했다. 안 죽이는 게 어디야.

“황자님, 관계는 실타래와 비슷합니다. 엉킨 게 있으면 풀면 됩니다.”

“그냥 잘라 버리면 안 되나. 아주 징하게 엉켜 있는데.”

“자르면 후회하실 겁니다. 다시 붙일 수도 없으니까요.”

“….”

“혹시 모르죠, 쉽게 풀릴지. 저녁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린의 어른스러운 조언을 머리에 잘 새겼다. 하지만 새기기만 하고 실천은 나중에 할 거다. 원래 다 그렇게 미루는 거다. 젠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보이고, 나는… 나는 일단 저녁을 먹어야지.

“돼지고기 있다 그랬지? 수육 해 먹자. 큰 냄비에 물이랑 대파, 양파, 마늘… 마늘…. 젠장.”

밭 가는 거 또 까먹었다. 내 이놈의 마늘을 꼭 성공적으로 재배해 원 없이 먹어 주리라. 뱀파이어가 와서 코를 막고 도망갈 만큼 먹어 주겠어. 그러고 보니 마린은 내가 말하는 식재료가 뭔지 모를 텐데. 내가 너무 생각 없이 말했나.

“수육은 안 되겠고… 그냥 지블이랑 타어닝, 캐릿 넣어서 강황… 카레! 카레 해 먹자. 우리 로탄 숲에서 노숙했을 때, 내가 알려 준 거 기억해?”

“감자, 양파, 당근 말씀하시는 거죠? 저도 이젠 황자님이 부르는 채소 이름을 구분할 수 있어요. 그러니 편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싱긋 웃으며 재료를 준비하겠다고 주방으로 들어가는 마린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의식하고 한국말로 채소의 이름을 말한 기억이 없는데… 무의식적으로 말했었나? 그럴 수도 있다. 방금도 그렇고, 그동안 요리에 관련해선 예민하게 굴었으니 그만큼 마린이 더 신경 썼겠지. 이러다가 빙의한 거 들키는 거 아니야? 들켜도 상관은 없지만 설명하기 복잡한데. 아, 모르겠다.

“마린! 내가 채소 다듬을게, 마린은 돼지고기 볶아 줘!”

“네, 강황 가루는 따로 빼 놨어요.”

“응. 빵은 뭐 있어?”

“납작 빵 좋아하시죠? 낮에 해 놓은 게 있는데 다행이네요.”

“역시, 마린밖에 없어.”

강황 가루는 세네카 제국에선 취급하지 않지만 프레오나 제국에선 흔했다. 고기가 주식인 프레오나 제국은 다양한 고기에 강황 가루를 묻혀 허브와 함께 구웠는데, 황궁 요리사들 중 단 한 명도 카레로 만들어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카레의 맛을 알지 못하는 당신들이 불쌍해.

쿠나 경과 마린 그리고 마커스와 함께 길을 잃었을 때, 딱 한 번 해 먹었었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해 주고 싶었지만 마린과 단둘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쿠나 경과 마커스가 고귀하신 황자님의 손을 쓸 수는 없다며 안절부절못했다.

카레는 먹고 싶은데 내가 할 수는 없으니 마린에게 그들 몰래 지시를 내렸다. ‘지블이랑 타어닝, 캐릿을 대충 썰어 볶은 다음 닭고기든 소고기든 아무 고기를 넣어서 함께 볶다가, 소금으로 간을 맞춘 뒤, 물을 넣고 끓이다 강황 가루를 잘 풀고 전분으로 농도를 맞추면 된다. 간단하지?’ 설명을 못 해서 대충 알려 줬는데도 마린은 완벽하게 카레를 만들어 냈었다. 같이 먹을 빵이 없어서 카레‘만’ 먹었었지만 그래도 먹을 만했다.

오늘은 주방 장비도 제대로 있으니 완벽한 카레 타임을 가질 것이다. 쌀밥과 함께 먹으면 더 좋았을 테지만, 쌀을 공수해 오기 위해선 북쪽 마을에 한 번 더 가야 했다. 아까 다 해결하고 왔어야 했는데.

“마린, 모차렐라 치즈 있지?”

“네, 냉장, 냉장고? 그 안에 있을 거예요.”

“응. 내가 맛있는 거 해 줄게.”

마린은 내가 쓰는 언어에 익숙해졌는지, 냉장고라는 단어도 알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이것저것 말했나 보다.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그나저나 마린도 대단하네. 그걸 다 알아듣고 외우기까지 한 걸 보면 저것도 재주다. 나중에 날 잡고 제대로 설명해 줘야겠다.

마린이 점심에 해 놓았다는 납작 빵은 인도의 난과는 조금 다른 빵이다. 부드러운 질감이 특징인 마린표 납작 빵을 더욱 얇게 편 뒤, 잘게 찢어 놓은 모차렐라 치즈를 올리고 돌돌 말았다. 가능하면 오븐에 넣고 돌리는 게 좋지만 그건 시간이 오래 걸릴 테니 간단하게 기름에 굽기로 했다.

프라이팬에 콩기름을 넉넉히 둘렀다. 튀긴 듯 안 튀긴 듯 노릇노릇 바삭바삭 굽는 게 목표다.

“아, 우리 여우 밥은 먹었나?”

“네, 약속대로 당근도 먹고 블루베리도 많이 먹었어요.”

“기특하네. 지금 내 방에 있으려나? 이거 다 하고 데리고 내려와야겠다.”

성인 남녀 셋이서 충분히 먹고 남을 만큼 넉넉하게 구운 뒤 젠과 여우를 부르러 2층으로 올라갔다.

젠을 부르기 전, 여우를 먼저 찾으러 내 방문을 열었지만 여우는커녕 털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여우랑 같이 있으면 젠을 보기에 덜 서먹할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이 혼자서 젠을 부르러 그의 방을 찾았다.

그의 방과 가까워질수록 희미하게 웅얼웅얼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어디서 나는 소리인가 했더니 젠의 방문이 다 닫히지 않았는지 대화 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이었다.

“…너만… 닥치… 안 들….”

“허튼… 바로… 죽일… 거….”

마린은 밑에 있고, 나도 여기에 있는데 젠은 도대체 누구랑 대화를 하고 있는 거지? 설마 강도가 들었나 확인차 가까이 다가갔다.

문틈으로 보이는 상황은 검을 빼 들고 있는 젠과 그 앞에 서 있는 연한 하늘색 머리칼의 남자가 으르렁거리며 대치하고 있는 것이었다. 남자가 젠을 노려보며 하던 말을 이었다.

“너야말로 인간 건들지 마. 인간 눈에서 물 나오게 하면 너부터 죽여….”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투명한 하늘색의 눈이 우리 집 여우 털색이랑 닮은 것 같은데.

“…혹시 여우니?”

“그….”

“애긴 줄 알았는데, 다 큰 남자였네.”

“아니야! 아직 다 안 컸어!”

남자는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대치하던 젠을 버려두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변해서는 내게 안겨 들었다.

“난 크는 중이야!”

“그래그래, 조금 당황스럽긴 한데, 그래도 여우는 여우잖아.”

“맞아, 난 나야!”

“응, 넌 너야.”

여우는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내 허리에 팔을 둘렀고, 무지막지한 힘으로 끌어안았다. 여우의 모습일 때는 만지는 것도 싫어했으면서.

“잠깐, 잠깐만. 나 허리….”

“안 돼!”

“나 허리 끊어져…!”

“안 돼!”

척추 뼈를 끊어 놓으려는 듯 강하게 끌어안는 여우를 진정시키려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역효과였는지 더욱 강하게 껴안은 여우를 젠이 뜯어냈다.

젠은 인간 상태인 여우의 목덜미를 잡아채곤 훈계하듯 이러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에 여우는 짜증 난다는 듯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젠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인간은 당신과 다르다고 분명 말했지요?”

“이 정도도 안 되는 거야?”

“미르 님은 인간들 중에서도 약한 편이에요. 그러니 당신의 무식한 힘으로 끌어안으면 죽을 수도 있다고요.”

“헉! 내가 미안해, 인간!”

“으응… 아냐.”

일단 설명을 해 줬으면 한다. 내 사랑스러운 여우가 사실은 인간이었다든지, 사실은 마법사였다든가?

“그래서… 여우는 마법사야?”

“아니! 나는 그런 가짜 놈들과는 달라!”

“그렇구나. 그럼 여우는 진짜인 거야?”

“응! 난…. 으악!”

젠이 팔목을 한두 번 주무르더니 잡고 있던 여우를 침대로 던져 버렸다. 젠, 너 여우 싫어하지? 여우는 경이로운 반사 신경으로 발딱 일어나 젠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죽고 싶어?”

“쉽게 말해 이종족이에요. 마물과는 다른 놈들이죠. 전설에서는 순하다 알려진 종족인데, 이상하게 저 아이는 공격성이 있는 것 같으니 가까이 지내지 마세요.”

“무슨 소리야! 너한테만 그러는 거야!”

“미르 님의 팔과 손가락 상처는 누가 그랬죠?”

“그, 그건 성장통이…!”

“알았어. 일단 밥부터 먹자. 마린한테도 제대로 설명하고. 여우도 이리 와.”

우물쭈물하던 여우는 이리 오라는 내 말에 바로 밝아져서는 내게 다가와 부드럽게 안겼다. 훨씬 낫다. 아까는 정말 허리가 부러지는 줄 알았다고.

인간 상태의 여우를 안고 주방으로 내려갔다. 마린이 이미 다 차려 놓은 식탁 위에 여우의 식사인 채소 조금과 베리도 올려져 있었다. 마린은 우리가 내려오는 것을 보자 기다렸다는 듯 돼지고기가 가득 들어 있는 카레 냄비를 식탁에 올려놨다. 분명 내가 안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봤을 텐데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다. 조금 놀려 주려고 했는데, 침착한 모습이 마린답다고 해야 하나.

“마린, 안 놀라?”

“여우 아닌가요?”

“어떻게 알았어?”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어요. 어렸을 적 책에서 봤던 이종족과 비슷했거든요.”

이종족, 엘프나 요정 뭐 이런 건가? 우리 여우가 엘프와 요정처럼 예쁘게 생겼긴 했지만 날개가 없는데. 아, 숨기고 있는 건가?

“우리 여우 엘프나 뭐 그런 거야?”

“아니! 난 ‘도르이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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