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북쪽 땅으로 쫓겨나다 (8)
여우는 내게 안겨 손에 쥔 반짝이는 보석을 자랑하듯 종알종알 자신의 존재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가장 강한 드로이프 종족이야. 엄마가 그랬는데, 우리는 드래곤이랑도 호각으로 싸울 수 있댔어! 그리고 우리는 인간들이 말하는 마법 같은 능력이 있는데 성장기가 지나면 발현이 된대. 나도 곧 내 능력이 뭔지 알 수 있을 거야! 어때? 나 대단하지? 쓸모 있지?”
“아직 능력이 뭔지도 모르는데 무슨 쓸모가 있나요. 지금의 당신은 밥만 축내는 짐승이나 다름없어요.”
“하! 내 능력이 발현되면 너 따위는 한 손으로도 없앨 수 있어! 그리고 너는! 너는 뭐 도움이 되는 게 있어?”
“저는 지금의 당신보다 강하니까요. 어제도 이곳으로 내려오는 마물을 잡았는걸요? 당신은 이런 거 못 하잖아요.”
“나도… 이제 곧 할 수 있어!”
젠의 도발에 말려든 여우는 내게 안겨 부들부들 떨었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성장기가 지난 자신의 쓸모를 주장하며 버려지기 싫은 유기견처럼 내 소매를 붙들고 있었다.
떨고 있는 여우의 모습을 본 젠은 도발에 박차를 가했다. 젠이 재밌어 하는 게 보이는데 말려야 하나?
“그걸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죠?”
“곧!”
“그 능력이 마물을 잡을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능력이라 확신하나요? 드로이프 종족은 치유의 종족이라 알고 있습니다. 아마 공격보다는 재생과 치유의 힘….”
“아니야! 난 분명 강한 힘을 갖게 될 거야!”
여우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혔다. 말려야겠네.
“그만! 다들 이제 그만하고 먹어. 여우 너도 뭘 걱정하는지 알 것 같은데, 그럴 일 없으니까 먹고 잘 얘기해 보자. 알았지?”
모차렐라 치즈가 굳는단 말이야. 이건 따뜻할 때 먹어야 한다고.
춘권과 비슷한 모양의 빵을 들고 한입 베어 먹었다. 아직 굳지 않은 치즈가 길게 늘어져 보기에도 맛있어 보였고, 치즈에 소금 간이 잘되어 있어 밋밋한 빵과 어우러져 절묘한 맛을 냈다. 카레를 찍어서 먹기도 했고, 카레를 빵 사이에 넣어 치즈 카레 빵으로도 먹었다. 나중엔 크로켓을 만들어 볼까. 널린 게 밀가루와 감자니까. 크로켓 빵 반죽에 쌀밥 넣으면 더 쫀득한데. 역시 쌀을 얼른 구해야겠다.
내가 먹는 방식을 보고 똑같이 먹는 젠과 마린을 뿌듯하게 바라보며 여우에게도 빵을 먹여 줬다. 그동안 여우인 줄 알고 과일과 채소만 줬는데 이제는 밥도 같이 먹을 수 있겠다. 다행이네. 채소랑 과일도 맨날 먹으면 질릴 테고, 먹을 수 있는 것이 늘면 삶의 질도 올라갈 거다.
“어때?”
“맛있어!”
여우는 눈물이 맺힌 푸른 눈동자를 반짝 빛내며 빵을 바삭바삭 베어 먹었다. 아! 상큼해! 귀여워!
“밀가루도 먹을 수 있다니 다행이다. 평소엔 뭐 먹었었어?”
“과일! 우리는 과일만 먹어도 살 수 있어. 인간이 주는 베리도 좋고, 모모아도 좋아해.”
“복숭아? 복숭아…. 좋아, 그럼 우물 옆에 복숭아나무를 심자.”
“좋아! 내가 도와줄게!”
밀가루로 만든 빵도 잘 먹고 카레도 잘 먹는 여우에게 내 몫의 카레를 넘겨줬다.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는 게 이런 기분인가 봐.
“그건 돌려주고, 여우 씨는 이거 먹어요.”
내가 넘겨준 카레를 맛있게 먹으려던 여우를 젠이 제지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몫을 여우에게 넘기고 여우가 먹으려던 내 것을 다시 돌려줬다. 그에 영문을 모르겠는 여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젠에게 물었다.
“똑같은 건데 왜?”
“미르 님은 더 먹어야 하니까요. 전 이제 배부르니 여우 씨는 제 거 드세요. 그래도 괜찮죠?”
“그래? 알았어!”
여우는 젠이 넘긴 카레를 맛있게 먹었고, 덕분에 나도 배를 채우게 됐다. 넘겨받긴 했지만 젠도 얼마 안 먹었을 텐데….
“젠, 더 안 먹어도 괜찮아?”
“네, 원래도 잘 안 먹었으니 걱정 마세요.”
“그래? 혹시 주방장이 형편없었어?”
“음, 아뇨. 제가 안 먹었던 것뿐이에요. 전 수도에서 오래 머물지 않고 마물을 잡으러 다녔으니 끼니를 못 맞추는 날이 많았어요. 거의 열닷새를 굶었던 적도 있는걸요.”
“헉! 거의 2주 동안 안 먹었다고? 그게 인간이야? 살아 있는 게 용하다.”
“그런가요? 딱히 힘들진 않았는데.”
젠은 초인이 분명하다. 내가 프레오나 황궁에 있었을 때, 위장에서 음식을 거부했고 나도 먹기 싫어 일주일 동안 굶어 봤지만 배가 너무 고파 울며 겨자 먹기로 꾸역꾸역 음식을 집어넣었었다. 난 일주일도 힘들었는데 열닷새? 대단하다.
오늘의 설거지는 젠이 하기로 했다. 넓은 어깨에 걸쳐진 푸른색의 앞치마 끈이 잘 어울렸다. 새신랑 같기도 하고. 처음엔 할 줄 몰라 버벅거렸던 설거지도 이젠 완벽하게 익숙해져 있는 게 신기했다.
새신랑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우리는 그가 외롭지 않게, 자리를 뜨지 않고 식탁에 앉아 이야기를 했다. 여우가 좋아하는 음식은 뭐가 있는지, 마린이 좋아하는 음식은 뭐가 있는지, 젠이 좋아하는 음식은 뭐가 있는지 등등 전부 음식 이야기뿐이었다.
미래에 관한 이야기도 했다. 여우가 좋아하는 모모아나무를 심고, 마린이 좋아하는 해가 쨍쨍한 날에 마당에 나가 티타임을 즐길 수 있는 장소를 만들고, 레몬이 열려 있는 단단한 나무에 그네도 만들기로 했다.
젠은 깔끔한 성정답게 그릇도 가지런하게 정리하고, 싱크대 주변의 물기까지 완전히 닦았다. 새신랑의 설거지가 다 끝나자 우리는 약속했던 대로 거실에 모여 여우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내게 안겨 따뜻한 우유를 한 모금 마신 여우는 잠시 숨을 고르고 어떻게 이곳까지 온 건지 이야기해 줬다.
“눈을 뜨니까 혼자였어. 가족과 친구들은 어디로 갔는지 다 사라져 있었고.”
어느 날 여우가 눈을 뜨니 자신밖에 남아 있지 않았고 드로이프가 살던 마을은 불에 타 재가 되어 있었다. 몇 년을 그곳에서 동료들을 기다렸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고, 그제야 여우는 자신은 그 잿더미 속에서 혼자 살아남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살기 위해 숲을 전전하던 어느 날, 한 인간이 여우를 발견하고 으리으리한 집에 데려가 음식을 주고 돌봐 주었다. 하지만 그 인간은 여우를 살펴 주려는 게 아니었고, 희한한 털색이 마음에 들어 박제하려 했던 거였다. 그 사실을 안 여우는 그곳을 도망쳐 나왔다. 도망가다 운 나쁘게 마주친 마물에게 상처를 입고 달아나는 것을 반복하다 나한테 발견됐다고 했다.
그래서 처음 만났을 때 그렇게 경계를 했던 거구나. 그럴 만도 하지. 박제라니, 어떤 미친 인간이야. 만나기만 해 봐라, 가죽을 뜯어서 광장에 전시해 주마.
“힘들었겠네.”
“괜찮아! 난 강한 드로이프니까!”
“그래도. 수고했어.”
“…인간.”
“응.”
점점 더 품속으로 파고드는 여우를 꼭 껴안아 줬다. 아직 어린아이인데….
어떤 놈들인지는 몰라도, 내 새끼 마을 그렇게 만든 놈들 꼭 찾아서 뒤지라고 염불 외워야지. 마음 같아선 물리적으로 이것저것 해 주고 싶지만, 내가 힘이 없어서…. 크흡, 형이 기회가 되면 높으신 분들한테 아부 좀 해서 어떻게든 해 볼게. 복수는 내가 한다. 여우 넌 편하게 살아.
여우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내 눈을 바라보았다.
“고마워. 내가 인간이란 종족을 싫어하지 않게 해 줘서.”
“고맙긴, 내가 뭐 대단한 걸 했다고.”
통통하게 오른 여우의 볼살을 꾹꾹 눌렀다. 아직 젖살이 안 빠진 것 같은데. 아, 촉감 쩐다. 이거 중독될 거 같은데 어떡하지.
“아니야, 인간은 인간의 세상을 구한 거나 다름없다고! 내가 드래곤이랑 싸울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면, 난 우리 마을을 잿더미로 만든 그놈들을 찾아서 똑같이 해 줬을 거고, 날 박제하려 했던 인간도 똑같이 해 줬을 거야. 그리고 인간을 증오하고 전부 죽이려 했겠지. 틀림없어!”
“….”
“그치만 인간이 나를 돌봐 줬잖아. 약도 먹여 주고, 내가 인간한테 상처도 냈는데 인간은 괜찮다고 나 용서해 줬잖아. 아빠가 그랬어, 세상은 복수심으로 살아가면 안 되는 거라고. 정말 고마워!”
“나도 고마워. 신뢰해 줘서.”
“헤헤.”
여우 아버님, 정말 기특한 아드님을 두셨군요. 세상은 복수심으로 살아가면 안 된다는 말, 정말 백번 천번 맞는 말이지만, 전 냉정하게 상황 판단이 가능한 어른이니 빨랑 뒤지라고 염불 외우는 것 정도는 허락해 주시죠.
“그러고 보니 가족이 있었다면 이름이 따로 있겠네? 이름이 뭐야?”
“내 이름? 난 노반이야. 노. 반.”
“노반, 예쁜 이름이네. 난 도브로미르야. 앞으로도 지금처럼 잘 부탁해.”
“응! 미르, 너무 좋아!”
“아흑…!”
노반은 내가 너무 좋다며 볼을 마구 비비다가, 다시 여우의 형태로 변했다. 인간일 때도 그렇고 여우일 때도 그렇고 어쩜 이렇게 귀여운 생물이 있지? 이러다간 심장이 남아나질 않겠어.
* * *
노반은 내게 마음을 연 이후로 한시도 내 곁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전에는 털에 손끝만 스쳐도 까탈스럽게 전부 쳐 냈으면서, 이제는 안 쓰다듬어 줬다고 삐진다. 심지어는 자는 것까지 함께하려 했다. 결국 보다 못한 젠이 들이닥쳐 새끼 여우의 형태를 하고 있어도 부득부득 따로 자야 한다며 노반을 끌고 나갔다. 여우가 아니라 인간의 형태여도 그저 어린아이일 뿐이니 그냥 놔두라고 이야기를 해 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미르 님이 순진하신 겁니다. 외관은 어린아이에 새끼 여우라고 해도, 저희보다 몇백 년은 더 살았어요.”
“뭐…?”
“드로이프 종족이 괜히 드래곤과 비교되는 게 아니에요. 고대 서적에 따르면 드로이프 종족의 평균 수명이 무려 900살이 넘는답니다. 성장기는 300살부터 시작되고요.”
“그럼… 적어도 300살이라는 거야, 저 어린애가?”
“그런 셈이죠. 아직도 어린애 취급하고 싶으세요?”
적어도 300살이라니. 저 귀여운 아이가 내가 숨 쉰 세월에 15배는 더 살았다는 건가? 조금 충격이다. 세대 차이 나는 거 아니겠지? 그래도 상관없다. 최소 300살이라는 노반이 나보다 얼마나 더 살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지만, 그래도 노반은 노반이니까.
“900살…. 그럼 드로이프한테 300살은 아직 어린애인 거 아냐? 예쁨 받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그냥 내버려 두자.”
“어린애처럼 키우고 싶으시면 더욱 그러시면 안 되죠. 미르 님이 계속 받아 줄수록 버릇 나빠져요.”
“젠, 몰랐는데 잔소리가 되게 심하구나.”
“…됐어요. 제가 데리고 잘 테니 미르 님은 혼자 주무세요.”
너랑 같이 안 자려고 나한테 오는 것 같던데. 노반은 쫓겨난 문 뒤에서 나를 향해 반짝반짝 눈빛을 쏘고 있었다. 장화 신은 고양이가 요기 있네.
“그럼 셋이 잘까? 침대도 넓은…. 아, 아니야. 생각이 짧았다. 미안.”
“전 상관없는데, 미르 님은 괜찮으시겠어요?”
셋이서 같이 자자는 실언을 내뱉곤 퍼뜩 정신이 들어 황급히 다시 철회하려 했다. 그에 젠은 변함없이 웃는 낯으로 자신은 괜찮으니 같이 자고 싶으면 같이 자자며 손을 내밀었다. 저거 잡으면 같이 자는 거지?
“아냐. 아냐아냐. 방도 따로 있는데 무슨.”
“그래요, 그럼.”
“응…. 나, 나 먼저 잘게! 젠, 잘 자! 노반도 좋은 꿈 꾸고, 내일 보자.”
시무룩한 표정으로 작은 손을 흔들어 주는 노반에게 살포시 웃어 줬다. 하, 귀여워. 여기 굿즈 제작은 어디서 하죠? 재봉사한테 가서 인형을 만들어 달라 해야 하나. 아니지, 노반이 자기를 닮은 인형을 보면 기분 나쁠 수도 있으니까 몰래….
“미르 님도 좋은 꿈 꾸세요.”
“응, 고마워.”
잔소리쟁이 젠은 문짝에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노반을 힘으로 떼어 내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