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북쪽 땅으로 쫓겨나다 (9)
프레오나 황궁에서 북쪽으로 오는 여정 중, 마린과 많이 친해진 마커스는 가끔 마린을 보러 이곳으로 올라오곤 했다. 그때마다 다양한 찻잎을 선물했는데, 마린은 받은 찻잎으로 티타임 하는 것을 즐겼다.
마린은 차를 마시며 책을 읽거나 마커스와 대화하는 것을 좋아했고, 노반은 여우의 모습을 한 채 내 옆에 딱 붙어 고롱고롱 낮잠을 잤다. 난 마린처럼 책을 읽거나 가끔 같이 차를 마시는 젠과 실없는 대화를 했다. ‘오늘은 빵 먹기 싫다.’, ‘그래도 먹어야 합니다. 요즘 너무 안 드셨어요.’라거나, ‘소고기는 레어로 구워야 맛있다. 핏물 떨어지는 건 보기 싫어도 오래 굽는 것보다 더 고소하고 맛있어.’, ‘뭐든 적당한 게 맛있습니다.’ 등등 먹는 이야기가 태반이지만 가끔은 일상적인 이야기도 했다. 어제 꾼 꿈 이야기나, 다음엔 바다에 가고 싶다 같은 짧은 여행 계획도 간간이 세웠다.
“아, 참마 캐러 가야 되는데.”
“참마요?”
“응, 참마 갈아서 채소랑 고기랑 같이 섞고 구워 먹으면 쫀득하고 진짜 맛있거든. 팬케이크처럼. 안 되겠다. 나 다녀올게.”
“같이 가요.”
젠은 같이 가 준다며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노반이 깨문 팔이 아직 다 낫지 않아 호미질이 어렵긴 했다. 젠이 같이 가 주면 고맙지.
그는 잠깐 기다리라며 나를 방치시키곤 평소 차지 않던 검을 차고, 참마와 다른 채소를 캘 호미와 바구니를 챙겨 들었다. 내 곁에서 잘 자던 노반을 마린에게 맡기고 앞장서 뒷산으로 걷는 젠을 따라갔다.
“마린, 다녀올게.”
“네, 조심히 다녀오세요. 아, 이상한 거 주워 오지 마세요.”
“안 그래, 걱정 마.”
노반을 저택으로 데리고 왔던 그날, 도라지를 캐다가 그 주변에서 참마도 본 것 같았다. 정확한 장소가 기억나질 않아 젠에게도 참마의 모양새를 알려 줬지만 내 설명은 알아듣기 어렵다며 따는 건 포기하고 그저 뒤를 따라오겠다 했다.
한참을 돌아다니며 참마를 찾아보았지만 참마는커녕 도라지도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참마를 캐겠다는 포부를 뒤로하고 필요한 약초를 캐며 뒷산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평소라면 절대 들어가지 않았을 테지만, 젠도 있으니 별일 있으랴 안일하게 생각했다.
“여기 있다!”
평소보다 깊숙이 들어간 것이 정답이었는지 찾고 있었던 참마의 줄기와 덤으로 가시가 나있는 두릅나무를 발견했다.
“찾으셨어요?”
“응! 드디어 찾았네. 젠, 나 좀 도와줄래?”
“네,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여기 줄기 있지? 이 근처를 호미로 살살 긁어내듯이 캐야 돼. 참마에 흠집 안 나게 살살.”
젠에게 참마를 캐는 법을 알려 줬다. 그는 내가 알려 준 대로 천천히 마를 캤고, 얼마 되지 않아 거대한 참마를 수확했다. 만약 이것이 힐링 게임이었다면 <거대한 참마(Lv.100)를 수확하셨습니다.>라는 문구가 떠야 할 정도로 거대한 참마였다.
“대박! 완전 최상등급 참마야!”
“좋아하는 채소인가요?”
“음…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게 남자한테 그렇게 좋대.”
“그래요?”
“응, 나한테 조금 간절하거든….”
이 몸뚱이 발기 부전이잖아. 참마라도 많이 먹고 정력을 키워야지. 장어, 굴, 아보카도, 복분자, 아스파라거스 등등, 정력에 좋은 음식이라면 뭐든 다 먹어 주겠어.
발기 부전을 벗어난다는 거대한 희망을 품고 커다란 참마를 캔 뒤, 눈여겨보고 있었던 가시가 잔뜩 박혀 있는 두릅나무를 향해 달려갔다. 두릅을 여기서 볼 줄은 몰랐는데. 나물로 해 먹을까, 데쳐서 먹을까, 튀김으로 해서 먹을까 고민하며 신이 나선 근처에 있는 모든 두릅나무에서 난 여린 줄기를 따는 중, 언제부턴가 주위를 경계하던 젠이 내 어깨를 조심스레 그러잡고 말했다.
“미르 님, 제가 올 때까지 얌전히 여기 계세요.”
“응? 헉! 저게 뭐야…!”
우리가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트롤과 비슷하게 생긴 거대한 근육 빵빵 무모증 고릴라가 산짐승을 뜯어먹고 있었다. 오크는 아니고, 트롤도 아니고, 책에서도 보지 못한 처음 보는 마물이었다.
“오우거라는 마물이에요. 처음 보시죠?”
“응. 저거 트롤보다 강하다는 마물 아니야? 너 혼자 어떻게 잡게. 나 이제 다 땄는데 그냥 조용히 도망가자.”
오우거는 오크와 트롤같이 자주 보이는 마물이 아니라 그런지 모습도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오크 몇십 마리가 덤벼도 오우거 하나 못 당한다는데, 나와 젠 둘이서 어떻게 상대를 하나. 목숨의 위협을 느껴 도망가자는 말에 그는 괜찮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나중에 저택으로 내려오기 전에 죽여야 해요. 언제 올지 모르니 지금 죽이는 게 나아요.”
“저택으로 안 내려올 수도 있잖아. 위험해. 그냥 가자.”
“저희 냄새를 맡고 내려올 거예요. 얼른 다녀올 테니 걱정하지 말고 하던 거 계속하고 계세요.”
그는 검을 뽑아 들고 오우거가 있는 방향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들고 있던 검의 날카로운 칼날이 반짝하고 빛을 반사했다. 그는 내게 걱정하지 말고 나물을 캐고 있으라 했지만 걱정이 돼서 눈을 떼지 못하겠다. 조금 더 강력하게 돌아가자고 말할걸. 냄새 같은 건 약초로 없앨 수 있는데. 지금이라도 그를 말리고 싶었지만 따라갈 새도 없이 그는 이미 오우거가 있는 곳으로 가 버렸다.
조금 멀리 있어 흐릿하지만 상황은 볼 수 있었다. 오우거가 산짐승을 뜯어먹느라 정신없을 때, 젠은 오우거의 뒤로 다가가 순식간에 위로 날아올라 첨예한 검 끝을 목에 꽂아 넣었다. 그러고는 강한 힘으로 목에서부터 심장이 있는 곳까지 그어 내렸다. 올라탄 젠을 떼어내려 발버둥 치던 오우거의 심장이 그의 칼날에 의해 뽑혔다. 그의 얼굴보다 더 큰 심장은 아직 살아 있다는 듯 벌떡벌떡 뛰었고, 그는 살아 있는 것을 다시 한번 베어 냈다.
쿵. 거대한 소리가 나며 오우거가 땅바닥으로 쓰러졌다. 진짜 죽였어?
쿠나 경과 기사 여러 명이 달려들어도 트롤 하나를 쓰러트리지 못했다. 그런 트롤보다 강하다는 오우거를 그는 단시간에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쓰러트렸다. 그것도 단신으로. 어떻게 돼 먹은 힘이야? 오우거가 생각보다 강한 마물이 아니었던 건가? 아닐 텐데, 그림은 없었지만 마물 백과사전에서 분명히 오우거는 오크와 트롤이 상대할 수 없는 강한 마물이라 적혀 있었다.
젠은 쓰러진 오우거를 번쩍 들어 올려 내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강한 줄만 알았더니 힘도 세네.
“너 진짜 강하구나.”
“항상 하는 일이에요.”
“대단…. 으, 가까이서 보니까 더 징그럽다.”
목이 잘려 피를 줄줄 흘리는 오우거의 팔을 콕콕 찔렀다. 약 30cm 두께의 철판을 만지는 것 같았다. 여기에 검은 어떻게 박아 넣은 거야?
“와, 정말 딴딴해. 이걸 어떻게 죽인 거야?”
“목 뒤는 비교적 연한 살이에요. 그래서 목에 찔러 넣고 심장까지 쭉 긋는 방법이 있고, 아예 목을 잘라 내는 방법이 있죠. 사실 목을 잘라 내는 게 더 쉽지만 피가 사방으로 튀어서 좋아하진 않아요.”
젠은 신기해하는 내게 오우거의 살을 직접 만지게 하며 팔과 목 뒤의 살이 어떻게 다른지 알려 줬다. 쓸데없는 친절이었지만 의외로 재밌는 경험이었다. 마물도 무작정 죽이는 게 아니라 약점을 노려야 한다며 오우거는 목 뒤, 트롤은 힘만 세고 멍청하니 주변 지형을 이용해 대가리를 노려야 한다는 것도 알려 줬다.
“근데 그건 왜 들고 오는 거야?”
“오우거의 가죽은 단단해서 방어구로 많이 쓰여요.”
“윽, 그럼 그거 해체하고, 잘라 내고 막 그래야 돼?”
“네, 피도 뽑아야 하니까. 아, 걱정 마세요. 안 보이는 곳에서 할게요.”
“피?”
“저택 근방에 피를 뿌리면 웬만한 마물은 오지도 않을 거예요. 저번부터 꾸준히 뭔가가 내려오던데, 이젠 조금 한가해지겠네요.”
그의 말로는 그가 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마물 몇 마리가 내려왔다고 했다. 그동안 나와 마린이 발견하기 전에 먼저 처리했단다. 전혀 모르고 있었다. 마커스가 말하길, 마물은 머리털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야기와는 다르게 마물이 나오는 곳이었다.
마커스, 마물 안 나온다며! 표지판은 형식상 붙여 놓은 거라며! 만일 젠이 없었다면 마린과 나는 이미 저승길을 걷고 있었을 거다. 우리 중 누가 마물을 상대하겠어.
“몰랐어. 미리 말해 주지.”
“그럴걸 그랬네요. 덕분에 쓸모 있어질 테니.”
“그런 일 아니어도 너 쫓아낼 사람 없어. 노반도 그렇고 왜 쓸모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네.”
“대등한 사이로 같이 있고 싶으니까. 버려지기 싫은 거죠.”
애초에 내가 잘난 사람이 아닌데 대등해질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 하는 거라곤 약초 조금 만지는 게 전부인 볼모로 버려진 황자인데. 물론 잘생긴 얼굴은 덤이지만. 노반은 살인적인 귀여움을 가지고 있고, 젠은 항상 앞 머리카락으로 눈을 가리고 있지만 가려도 잘생김이 보이고, 눈을 드러내면 말해 봐야 입만 아플 정도로 잘생겼다. 게다가 강하고. 따지자면 나보다 젠이 더 쓸모 있는 사람인데.
“함께 있을 때 재밌고 즐거우면 그만이지. 우리는 돈 벌 필요도 없잖아. 하루하루 즐기면 되는데.”
“그런가요.”
“당연하지. 넌 어때? 같이 있으면 즐거워?”
내 물음에 그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그저 예쁘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