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북쪽 땅으로 쫓겨나다 (10)
거대한 오우거를 메고 온 젠과 한 아름 가득 찬 바구니를 뿌듯하게 들고 걸어오는 나를 보고 경악한 마린이 턱이 빠질 듯 입을 벌렸다.
“제가 이상한 거 주워 오지 말라고…!”
“아냐! 이거 죽은 거야! 젠이 잡았어!”
“아, 죽은 거면 괜찮습니다. 오우거인가요? 실제로는 처음 보네요.”
살아 있는 것만 안 되는 건지 죽었다는 말에 안심한 마린이 내게 다가왔다. 나를 이리저리 돌리며 다친 곳은 없는지 제대로 확인한 뒤, 오우거는 처음이라면서 듣던 것처럼 단단한 가죽을 가지고 있다며 감탄을 했다.
“마린, 이 큰 오우거를 젠이 한 방에 잡았어, 혼자!”
“정말 대단하시네요, 강하다고는 들었지만.”
“나도 성장기만 지나면 잡을 수 있어! 별거 아니야!”
마린의 품에 안겨 있던 여우 노반이 인간 노반으로 변해서는 화를 내며 내게 쪼르르 다가왔다. 그에 들고 있던 바구니를 마린에게 넘기고 안아 달라 옷깃을 잡아당기는 노반을 안아 올렸다.
“노반도 대단하네. 낮잠은 잘 잤어?”
“응! 꿈에 미르가 나왔어.”
“정말? 무슨 꿈이었는데?”
“미르가 나한테 와서 분홍색 꽃을 귀에 꽂아 줬어.”
환하게 웃으며 귀를 매만지는 노반을 꽉 안아 줬다. 분홍색 꽃이라니, 우리 노반 털색이랑 너무 잘 어울리는 거 아니야? 세상 모든 분홍색 꽃을 전부 꺾어 와야겠어. 그러고 보니 우리 저택에도 분홍색 꽃이 있었다.
“헉! 너무 귀엽겠다. 아! 노반, 저기 큰 나무 보여?”
“응, 엄청 커. 나보다 오래 산 나무야.”
노반보다 오래 자랐다니, 적어도 300년은 넘게 자란 나무인가 보다. 어쩐지 비정상적으로 크다 했네. 알고 보니 천년 나무 뭐 그런 거 아니야?
“저 나무는 벚나무라고 불러. 겨울이 지나고 날이 풀리면 분홍색의 작은 꽃이 흐드러지게 펴.”
“내 꿈에 나온 그런 꽃인가?”
“음, 노반의 꿈에 나온 꽃은 잘 모르겠지만, 저 나무에서 핀 꽃은 노반이랑 아주 잘 어울릴 거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거든.”
“정말?”
“응, 꽃잎이 질 때도 예뻐. 나중에 꽃이 피면 노반이 좋아하는 베리 잔뜩 따서 꽃구경하자.”
“좋아! 미르 꼭 약속이야!”
새끼손가락을 내걸며 노반과 약속했다. 노반과 벚꽃이라니, 흩날리는 벚꽃 잎 사이를 뛰어다니는 노반의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오우거 가죽을 벗기는 일이든 뭐든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다. 특등석 예약이요.
“젠,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음, 두 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알았어. 저녁 만들고 있을 테니 대충 하고 와.”
고개를 끄덕인 젠은 오우거를 번쩍 들고 창고 뒤편으로 돌아갔다. 저기는 절대 가지 말아야지.
마린은 식사 준비를 하겠다며 먼저 들어갔고, 나는 노반과 함께 벚나무 이야기를 하다 들어갔다. 꽃놀이가 기대돼 얼른 겨울이 지나 날이 풀렸으면 좋겠다며 밝은 미소로 재잘거리는 노반을 보면 아직 아이인 걸 실감하게 된다. 어릴 때의 추억이 평생 가는 거니까 노반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다.
“겨울에는 눈이 오겠지? 눈이 오면 눈사람을 만들자. 눈으로 집을 만들어도 좋고, 눈이 쌓인 높은 곳에서 썰매를 타는 것도 재밌을 거야. 그리고 하루 종일 따듯한 이불 속에서 뒹굴뒹굴하자.”
“좋아! 나 눈 한 번도 본 적 없어! 내가 살던 곳에는 눈이 안 왔거든.”
“정말? 그럼 노반은 첫눈을 나랑 보겠네.”
“응! 미르랑 첫눈 볼 거야! 너무 좋아!”
“응, 너무 기대된다. 그러니까 걱정 말고 내 옆에 있어 줘. 난 노반이 아무것도 못 해도 노반이랑 같이 꽃놀이도, 눈도, 바다도 매년 같이 볼 거야.”
태양보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꼭 껴안아 주는 노반을 마주 안아 줬다.
* * *
주방으로 들어간 마린을 따라 슬그머니 들어갔다. 척하면 척인 마린은 방금 캐 온 굵직한 참마를 반으로 나눈 뒤 반은 냉장고에, 반은 깔끔하게 껍질을 까 놓고 센스 있게 갈아 놓기까지 했다.
“와, 마린, 대단해. 척하면 척이네.”
“과찬이십니다. 여기에 채소와 고기를 섞으신다 하셨죠? 잘게 채 썰면 되는 건가요?”
“응. 채소는 당근, 양파, 양배추 정도면 될 것 같고… 고기는 돼지로 하자. 돼지고기도 채소처럼 얇게 썰어 줘. 아, 감자는 강판에 갈아야 돼.”
마린이 재료를 준비할 동안 소스를 만들어야 했다. 번거롭지 않게 돈가스 소스와 마요네즈가 있으면 좋을 텐데, 만들어진 게 없으니 다른 소스를 만들어야 했다. 레드와인 소스를 만들까. 레시피는 알지만 처음 만들어 보는 거라 조금 불안하다.
프라이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양파를 볶았다. 양파가 흐물흐물한 갈색으로 변해 단맛을 내면 형태를 부숴 퓌레로 만들었다. 그 위에 으깬 홀 토마토와 얇게 썬 양송이버섯을 넣고 다시 볶아 준다. 부글부글 올라오면 레드와인을 적당히 부은 뒤, 전분을 넣고 소스가 되직하게 될 때까지 저어 준다. 점성이 생기면 후추, 바질, 특유의 매운 향을 위해 월계수 잎도 넣어 마무리한다. 외관은 멀쩡하게 생겼다. 맛도 멀쩡했으면 좋겠다.
“마린, 먹어 봐. 어때?”
“음, 처음 먹어 보는 맛인데 맛있어요. 기름진 요리랑 같이 먹으면 잘 맞을 것 같아요.”
“아, 다행이다. 처음 만들어 보는 거라 걱정했는데, 잘 만들어졌네.”
완성된 소스는 전통 카레를 담는 그릇인 소스 보트에 예쁘게 옮겨 담았다.
강판에 간 감자와 모둠 채소, 고기, 달걀 두 개, 밀가루를 마를 갈아 놓은 볼에 넣고 잘 섞었다. 잘 섞인 반죽을 유채 기름을 두른 프라이팬에 올린 뒤, 그 위에 숙주를 올려 겉은 바삭하게 튀기고 안은 노릇노릇하게 구웠다.
오코노미야키를 여기서 만들어 먹을 줄이야. 김이랑 가쓰오부시가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소스도 다르고 빠진 재료도 꽤 많다. 이 음식은 이제 오코노미야키라곤 할 수 없는 새로운 요리다. 잡전…?이라 해야 하나. 소스만 있었으면 정통 오코노미야키와 다를 게 없는데 좀 아쉽다.
두릅은 반은 무침으로, 반은 튀김을 하기로 했다. 무침은 내일 해 먹고, 튀김을 하기 위해 튀김 가루가 있으면 좋은데 없으니 대충 만들어서 먹어야지 뭐.
밀가루와 전분을 2:3 비율로 섞은 뒤 후추와 소금으로 간을 맞춰 주고 심심하니 강황 가루도 조금 넣었다. 이걸 물과 섞어 튀김 반죽을 만든 뒤 냉장고에 있는 두릅과 깻잎, 남은 감자와 당근, 양파를 섞어 채소 튀김을 했다. 오늘은 전부 기름진 음식이네. 소스를 만들길 잘했다.
“밥 먹자!”
창고 뒤편에 있을 젠에게도 들릴 정도로 크게 소리를 쳤다. 마음 같아서는 데리러 가고 싶지만 식전에 오우거의 내장을 보고 싶진 않으니 가지 않기로 했다.
노반은 뒷산에 있었는지 내 목소리를 듣고 쫄래쫄래 내려왔고, 창고에 있는 줄 알았던 젠은 뒷산에서 내려오는 노반과 함께 깔끔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분명 피 칠갑을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말끔했다.
“오우거는?”
“다 끝냈어요. 가죽도 창고에 있고, 피도 제대로 뿌리고 왔어요.”
“내가 도와줬어!”
“노반이?”
“응! 내가 빠르니까.”
노반이 뒷산에서 내려온 이유가 있었다. 젠을 도와주고 왔구나. 아, 근데 저번까지만 해도 사이가 안 좋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언제 친해졌대?
“미르, 밥 먹자!”
“응, 밥 먹으러 가자. 노반이 좋아할지 모르겠네. 오늘은 채소투성이인데.”
“으음…. 미르가 만든 거면 채소도 좋아.”
시무룩해져 어깨를 늘어트린 노반이 젠의 종아리를 퍽퍽 때렸다. 젠은 내가 너무 받아 줘서 벌써 버릇이 나빠졌다며 노반의 목덜미를 잡아 올리곤 소파로 던졌다. 아, 아직 친해지지는 않았구나.
젠은 노반에게 과격하게 대하는 것 같아 보여도 조금은 봐주고 있는 게 눈에 보인다. 이야기를 나눌 때도 적절한 곳에서 빠지고, 노반의 목덜미를 잡아 던질 때도 항상 푹신한 곳에 던진다. 저번에는 침대였고, 이번에는 소파다.
“채소가 많이 들어 있어야 맛있는 거야. 고기만 먹으면 영양 밸런스가 떨어지거든.”
“영양 밸런스?”
“응, 몸에 필요한 영양소가 충분해야 건강하다, 뭐 그런 거지. 노반이 건강하게 자라려면 고기랑 채소를 잘 섞어서 먹어야 된다는 거야.”
영양은 개뿔. 이미 튀김으로 만들어서 살찌는 음식이 되었지만 어쩌겠나. 그냥 맛있게 먹어야지. 영양 밸런스도 중요하긴 하지만, 노반에게는 편식하면 안 된다는 뜻에서 말해 줬다. 내 하얀 거짓말을 진지하게 들어 준 노반은 앞으로 싫어하는 채소도 잘 먹어서 젠보다 더 쑥쑥 크고 강해질 거라며 내 손을 잡고 식탁으로 갔다.
“이게 뭐야? 마린이 저번에 해 줬던 팬케이크야?”
“음, 팬케이크랑은 조금 달라. 그냥 채소랑 고기랑 섞어서 부친 거야.”
아시안 팬케이크라고 불러도 되겠지. 이번에 반응이 좋으면 다음엔 감자전이나 부추전을 해 먹어야겠다. 그 정도는 만들 수 있으니까. 아, 간장이 없네. 얼른 전통 장을 만들어야겠다.
메주는 만들기 쉬우니까 얼른 만들어 버리면 그만이지만 문제는 텃밭이다. 하루라도 빨리 씨앗을 심어야 그만큼 더 일찍 수확하는데 아직도 밭을 안 갈았다. 고춧가루가 가장 급하니 고추도 심어야 하고, 고추냉이, 쑥갓, 열무, 상추, 치커리, 가장 중요한 마늘도 심어야 한다. 있는 거 빼고 다 필요하다.
“안 되겠다. 얼른 밭 갈아야겠어.”
“황자님 팔이 다 나으면 갈아요. 아직은 쉬셔야 해요.”
“나 거의 다 나았어. 멀쩡해.”
“안 돼요.”
정말 거의 다 나았는데. 이런 건 상처 축에도 끼지 않는다. 마린도 은근 과보호라니까. 괜히 반항하고 싶어지는 마음에 고개를 돌려 콧방귀를 뀌려 했지만, 내게 상처를 낸 노반이 책임을 느끼는지 시무룩해져 있었다. 그런 노반을 달래 보려 괜찮다는 뜻으로 웃으며 앞에 있는 두릅 튀김을 소스에 찍어 먹여 줬다.
“어때?”
“오! 이거 맛있어. 바삭바삭해! 소스도 맛있어. 처음 먹어 보는 맛이야!”
“맛있어? 다행이다. 소스는 나도 처음 만들어 보는 거라 걱정했는데.”
시무룩함은 금방 떨쳐 내고 두릅 튀김에 푹 빠진 노반은 바삭바삭 소리를 내며 튀김을 먹어 치웠다. 젠도 말없이 자신의 앞에 놓은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젠은 수도에서 살 때 적게 먹고 밥을 잘 거른다고 했는데 저렇게 잘 먹어 주니 기쁘다. 이게 바로 아기 새에게 음식을 조달하는 어미 새의 마음이란 건가. 마린까지 맛있게 먹는 것을 본 후 내 몫을 먹으려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겉은 바삭하게 속은 촉촉하게 구운 전 위에 레드와인 소스를 올렸다. 이거 딱 인별에 올려야 할 비주얼인데. 나이프로 전을 썰면 사각 소리를 내며 바삭한 부분의 튀김이 떨어졌다. 한 입 크기로 잘라 낸 전을 먹었다. 바삭바삭한 식감과 촉촉한 느낌이 확실하게 살아 있었다. 촉촉할 뿐만 아니라 참마를 넣어서인지 쫀득함도 느껴졌다. 채소와 베이컨, 위에 올린 숙주도 제대로 익었고, 소스도 생각보다 너무 맛있어서 놀랐다. 나 요리에 소질 있나 봐.
“존맛탱….”
“존맛탱?”
“안 돼, 안 돼!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노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가 중얼거린 말을 따라 했다. 혼잣말도 조심해야 하는데 또 무의식이 사고를 쳤다. 노반의 입에서 존맛탱이라니, 진짜 너 뭐 하는 거니? 입을 확 꿰매 버려야지.
“이거 이름이 존맛탱인 거야?”
“아니, 이게 이름이 존맛탱이 아니라… 맛있을 때 하는 표현인데… 어른만 쓰는 표현이야. 노반은 안 돼.”
“그런 거야?”
“응, 그런 거야. 마저 먹자.”
아이들 앞에선 자나 깨나 입조심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