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북쪽 땅으로 쫓겨나다 (11)
북쪽에 온 뒤로 아침 새가 지저귀는 소리로 잠에서 깼지만 오늘의 짹짹은 어디 가고 고롱고롱 약한 숨소리가 들렸다. 햇빛을 가려 주는 암막 커튼은 걷어져 있어 햇빛이 들어왔지만 평소보다 눈이 부셨다.
“쿠으….”
고롱고롱 소리가 어디서 나나 했더니 내 옆에 누워 있는 노반에게서 나는 소리였다. 평소보다 눈이 더 부셨던 이유도 노반의 얼음 색 털이 햇빛을 반사해 내 눈을 직격했기 때문인가 보다. 따로 반사판이 필요 없을 정도다.
분명 노반은 어젯밤도 젠과 함께 잤을 텐데 왜 내 옆에서 자고 있는 거지? 새벽에 도망쳐 나왔나?
“노반?”
“쿠으…쿠….”
노반은 항상 아침 일찍 일어나 나를 반겨 줬는데, 자고 있는 모습을 보니 걱정이다. 새벽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무언가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노반이 깨지 않게 조심히 일어났다. 침대가 살짝 흔들렸지만 다행히 노반은 깨지 않고 자고 있었다. 많이 피곤했나 보네. 우리 귀여운 노반이 어디로 들어왔나부터 확인해야겠다. 방문은 닫혀 있었다. 잠가 놓지는 않았지만 그 앞에 놔둔 바구니가 어제와 똑같은 곳에 있는 걸 보면 문이 움직이진 않은 것 같고, 암막 커튼을 분명 치고 잤는데 열려 있는 걸 보아 발코니로 들어왔을 가능성이 크다.
발코니…. 젠의 방은 발코니가 없다. 내 방 발코니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지붕을 타는 방법밖에 없는데, 설마 지붕에 올라갔었나?
“미르 님.”
“아, 젠. 좋은 아침.”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저택 밖으로 나가 지붕을 확인하자 그곳에 올라가 앉아 있는 젠이 보였다.
“응, 일찍 자서 그런가 봐. 젠은 왜 거기 올라가 있어?”
“올라와 보실래요?”
“지붕 위로?”
“네, 좋아하실 거예요.”
내가 좋아할 거라는 그의 말에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고소공포증도 없고, 문제는 어떻게 올라가느냐인데.
“어떻게 올라갔어?”
“제 방으로 오세요.”
“방?”
젠의 말대로 다시 저택 안으로 들어가 젠의 방문 앞에 섰다. 들어오라고는 했지만 막 들어가도 되나? 그래도 남의 방인데….
문을 열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중 벌컥, 문이 열렸다. 젠의 잘생긴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넌 아침부터 잘생겼구나.
“들어오세요.”
“응, 들어갈게.”
들어간 그의 방은 딱 젠 같았다. 내 방과 비슷했지만 침대의 크기가 달랐다. 왜 이렇게 커? 성인 남성 네 명이 뒹굴어도 남을 정도의 크기였다.
“침대 왜 이렇게 커?”
“글쎄요, 덕분에 노반이 뒹구는 걸 좋아해요.”
“노반이랑 침대에서 같이 잔 거야? 불편했으면 그냥 내 방으로 보내지.”
“안 돼요.”
그동안 단순한 질투인 줄 알았는데 질투라고 하기엔 그의 어투가 단호했다. 그래서 혹시나 내가 노반과 같이 자면 안 되는 이유가 따로 있냐 묻자, 그는 조금 고민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성장통을 겪고 있던 노반이 미르 님의 피를 마셨었죠?”
“아… 응, 그랬었어.”
“성장통을 겪는 드로이프가 인간의 피를 마시게 되면 일시적으로 성장통이 가라앉아요. 그래서 성장통이 올 때면 그 인간의 피를 계속 마시고 싶은 욕망이 들어요.”
“오, 대박. 뱀파이어야?”
“뱀파이어가 뭔지는 모르지만, 성장통을 겪고 있는 노반은 미르 님한테 위험해요. 미르 님은 노반을 뿌리칠 수도 없잖아요.”
“에이, 그래도 내가 어른인데 당연히…. 엇!”
눈 깜짝할 사이, 그가 가만히 서 있던 나를 벽으로 몰아붙였다. 나는 깜짝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그는 그런 나를 고요한 눈으로 보았다.
“저기… 젠…?”
그의 이름을 불러 봤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고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팔 안에 갇혀 멀뚱히 눈치를 보고 있자 그의 얼굴이 점점 내 얼굴과 가까워졌다.
“뿌리쳐 보세요.”
“응…?”
“할 수 있으시다면서요. 해 보세요.”
여전히 고요하게 빛나는 금안과 시선을 마주한 채, 그의 코끝과 내 코끝이 맞닿았다. 나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와 맞닿은 시선을 느꼈다. 우리는 한참을 가만히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고, 순간 느껴지는 섬찟함에 몸을 떨었다. 그러자 그는 맞닿았던 시선을 끊어 내고 고개를 숙여 내 목덜미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윽…!”
그가 날 강하게 물었다.
“보세요, 못 피하시잖아요.”
그가 문 목덜미엔 그의 흔적이 남았다.
“노반의 성장기가 지나면 같이 자도 돼요. 하지만 그전엔 안 돼요. 아시겠죠?”
“응….”
“그럼 갈까요?”
무표정했던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예쁘게 웃은 젠이 내게서 멀어졌고, 난 그가 물어 아직 얼얼한 목덜미를 매만졌다. 뱀파이어는 노반이 아니라 젠이었다.
아직 멍하니 있는 내게 가까이 오라 말한 그가 열린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순식간에 창문 밖으로 몸을 던져 떨어졌다.
“젠!”
말이 2층이지 천장이 높아 3층, 아니 4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높이에서 떨어지다니, 뼈가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소스라치게 놀라 젠을 부르며 창문 밖을 보았지만 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사다리도 없고, 어디 잡을 곳도 없는 상태에서 지붕 위로 올라간 건가? 역시 운동을 꾸준히 하는 사람은 뭔가 다른가 보다.
“미르 님.”
“젠!”
“제 손 잡으세요.”
그는 지붕 위에 올라서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조금 고민하다 내민 그 손을 맞잡았다. 그는 강한 힘으로 나를 끌어올렸다. 무서워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내 손을 잡고 있는 그가 놀라 떨어트릴까 입을 꾹 다물었다. 두 발이 눈 깜짝할 새에 지붕 위에 닿아 있었다. 날 끌어올린 젠을 바라보다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응?”
훅, 강한 바람이 얼굴에 끼쳤다. 산 아래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북쪽 마을이 보였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숲을 무대로 바람이 춤을 췄다. 바람이 움직일 때마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나무가 녹색의 하늘을 나는 아름다운 새로 보였다. 숲의 요정이 장난치는 것 같았다. 바람은 숲을 지나 동쪽으로 흘러갔다. 바람이 가는 곳엔 끝없는 푸른색의 바다가 보였다. 수평선 너머로 밝은 태양이 떴고, 바다는 그 태양의 빛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마음에 들어요?”
“응, 너무 예뻐.”
“노반이 성장기가 지나 강해지면 미르 님한테 보여 주겠다고 했어요.”
“정말?”
“네, 아쉽게 제가 선수 쳤지만요.”
노반한테는 비밀이에요. 장난스럽게 말한 그는 바람에 휘청이는 내가 지붕 위에서 떨어지지 않게 어깨를 감싸 안았다. 서늘했던 체온이 그의 온기로 인해 따듯하게 변했다.
“어젯밤 지붕 위로 올라가는 연습을 하다 노반이 미르 님 방 발코니로 떨어졌었어요.”
“떨어졌다고?”
“미르 님보다 노반이 더 튼튼해요. 안 다쳤으니 걱정 마세요.”
“그렇구나….”
그렇지. 평범한 인간도 나보다는 튼튼할 거다. 갑자기 쓸쓸해지네.
“말릴 새도 없이 미르 님 방으로 들어가 버려서.”
“아, 그래서 오늘 내 방에 있었구나.”
“앞으로는 바로 내보내세요. 아마 곧 끝날 거예요.”
“음…. 그깟 피 조금…. 아냐! 내보낼게.”
바람보다 서늘한 젠의 눈빛에 황급히 말을 바꾸었다. 그는 짧게 한숨을 쉬고는 어깨를 감싸 안은 손을 떼고선 내게 말했다.
“정 노반이랑 자고 싶으시면, 제 방에서 같이 자요.”
“….”
“위험하니까요. 별 뜻 없어요.”
“응…. 알아.”
그 말을 끝으로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 * *
“으으, 농민들의 삶이 이리 힘들 줄이야.”
“아직 한 줄도 못 끝내셨어요.”
미루고 미루다, 오늘은 약속대로 밭을 갈기로 했다. 내 해피 코리안 푸드 라이프가 시작되는 첫걸음이었다.
단순하게 마당 텃밭 수준으로 생각했는데 막상 몸을 움직이니 마당 텃밭이 아니라 태평양이 따로 없다. 어떤 놈이 무식하게 텃밭을 이리 쓸데없이 넓게 만들었냐. 얼른 튀어나와라. 네놈도 함께 밭을 갈자.
딱딱하게 굳은 흙과 사이사이 박혀 있는 자갈을 제거해 가며 씨앗을 뿌릴 홈을 파냈다. 오늘 심는 채소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마늘과 고추 씨앗은 잘 자라라는 의미로 정성을 담아 뿌렸다. 이곳의 고추는 맵지 않은 오이 고추뿐이지만, 나 천재적인 도브로미르가 만든 기발한 약물과 함께 심으면 고춧가루를 만들 매콤한 홍고추와 청양고추를 재배할 수 있다.
이곳에선 매운 고추는 유전자 조작을 해야 만들어질 수 있는 품종이다. 하지만 내가 만든 약물 하나만 있으면 유전자 조작을 하지 않아도 매콤한 고추의 품종으로 자라날 수 있다. 이걸 만드느라 몇 날 밤을 새웠는지. 이 기발한 발명은 널리 알려야 하지만 나만 알고 있을 거다. 난 욕심쟁이고, 어차피 이 세계 사람들은 매운 고추를 안 먹는다.
“난 너와 달리 안 움직이던 사람이니까.”
“그러고 보니 말도 타 보신 적 없다 했죠?”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내 허리를 은근하게 잡아 올리는 젠의 손길, 내 목을 감은 젠의 체온. 한낮에 상상하기엔 너무 민망한 것들이었다. 어우, 나 왜 이래. 진짜 욕구 불만이야? 발기 부전이라 자기 위로도 못 하는데. 씨잉….
“말도 그렇고, 아예 내 궁에서 나가질 못했어.”
“그랬나요?”
“응, 형님들이 극성이었거든. 한 분은 위험하니 나가지 말라 했고, 한 놈은 꼴 보기 싫으니 눈에 띄지 말라 했어.”
과보호를 하는 로이븐은 몸이 약하고 운동 신경 제로인 4황자가 말을 타게 되면 낙마하거나 뒷발굽에 치여 죽을까 봐 말 근처에도 가지 말라 했고, 4황자의 별궁에서 황궁 밖으로 나가려면 반드시 퍼디스의 궁을 지나가야 했기에 겁쟁이 4황자는 단단히 쫄아서 공식 행사를 제외한 경우엔 궁에서 나가지를 않았다.
멍청한 4황자. 퍼디스는 자신의 궁에 붙어 있는 시간보다 밖으로 싸돌아다니면서 귀족들을 포섭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한마디로 비어 있는 호랑이 굴이 무서워 움직이지 않은 거다.
“형님이라면… 아, 로이븐 황태자 말인가요?”
“첫째 형님을 뵌 적이 있어?”
“작년 스파딘 황제의 탄신일에 세네카 제국의 사절단으로 로이븐 황태자가 왔었습니다. 잠깐 대화한 게 다예요.”
“착하시지? 너무 순해서 걱정되긴 하지만, 메이븐 형님이 있으니까 뭐.”
“순해요? 그럴 리가요.”
“응? 무슨 소리야. 로이븐 형님처럼 순수한 황족은 없을 걸?”
“로이븐 황태자는 순수한 사람이 전혀 아니었어요. 오히려 황제보다 더 황제 같은 사람이었는걸요. 아마 미르 님한테만 순수한 사람으로 보이는 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