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북쪽 땅으로 쫓겨나다 (12)
노반이 300살이라는 것보다 로이븐이 내가 알고 있는 순수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더 충격이었다. 4황자의 기억을 다시 되짚어 봐도 로이븐의 모습은 자애롭게 웃는 얼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미르야, 말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잖니. 마차를 타고 다니렴. 좋은 마차를 구해 주마.]
[식물에 관심이 많구나. 내 궁 뒤편에 온실이 있단다. 보러 가지 않으련?]
[미안하구나. 황제께서 부르셔서 가 봐야 할 것 같다. 연회장에선 너 혼자 있으면 위험하니 메이븐과 같이 있거라. 절대 떨어지지 말고. 알겠니?]
[미르 네가 관심 있다던 연극이 수도에서 한다는구나. 에반스터 경이 온다 하니 같이 나가 보거라.]
전부 나를 챙겨 주려는 기억밖에 없었다. 과보호가 아니라 동생 바보였나?
“형님은 나한테만 순하게 대해 주셨나 보네.”
“네, 그런 것 같네요. 미르 님, 여기 고추는 다 심었어요. 마늘 쪽은 잘되고 있나요?”
“벌써? 난 아직 땅 파고 있는데?”
고추가 마늘의 두 배다. 근데 벌써 다 했다고? 씨앗을 심기는 무슨, 난 아직 땅이나 파고 있는데?
“내가 느린 걸까?”
“익숙하지 않아서 그럴 거예요. 도와드릴 테니 천천히 해요.”
“너도 처음 해 보는 거였잖아.”
“전 익히는 게 빨라서 그래요. 미르 님도 익숙해지면 빠르게 할 수 있을 거예요.”
젠은 시무룩해 있는 나를 다정하게 다독이며 텃밭의 반대쪽으로 건너가 호미질을 했다. 빠르기도 하지. 밭일은 전부 젠이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우리가 텃밭을 갈고 있는 동안 마린과 노반은 마을로 내려가 필요한 것들을 사고, 내가 부탁한 해콩을 잔뜩 사 오기로 했다. 전통 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메주를 만들어야 했고, 메주를 만들었던 과거를 떠올려 그해 수확한 해콩이 메주로 만들기에 가장 적합하단 것을 기억해 냈다. 장하다, 나 자신.
초등학교 저학년, 겨울 방학에 할머니 댁으로 내려가면 김장 김치를 담은 뒤 항상 메주를 만들었다. 어린 나이에 익숙하지 않은 메주는 냄새나고 짜증 나서 도망 다녔지만 그게 지금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이따가 애들이 콩 사 오면 그거 잔뜩 삶아서 메주 빚어야 해. 그니까 체력 관리 잘해야 한다!”
“전 걱정 없어요, 미르 님이 걱정이지.”
“이 정도는 나도…. 윽.”
“보세요, 팔 저리죠?”
멀쩡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팔을 빙빙 돌렸지만 순간적으로 저려 오는 팔뚝에 들고 있던 호미를 떨어트렸다. 젠은 심고 있던 씨앗을 내려놓고 저리는 팔뚝을 부여잡고 있는 내게 다가와 부드럽게 마사지를 해 주며 굳은 근육을 풀어 줬다.
“이제 괜찮아.”
“아직 안 돼요. 지금 잘 풀어 줘야 내일 안 아파요.”
“나 아직….”
“남은 건 제가 할 테니 미르 님은 쉬세요.”
젠은 얇은 셔츠 위로, 몸의 선을 따라 적당한 힘으로 근육을 자극해 주었다. 한참을 주물렀으니 이젠 정말 괜찮은 것 같은데도 놓아 주지 않았다. 대화 주제도 다 떨어지고, 어떤 대화를 해야 하는지 몰라 그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덕분에 조용해진 분위기가 어색해지려 할 때, 그가 주무르던 내 팔에서 손을 떼었다.
나는 호미질은 그만두고 젠이 파 놓은 홈에 씨앗을 뿌렸다. 진작 이렇게 할걸 그랬다. 손이 빠른 젠 덕분에 밭일을 전부 끝내고 일어났다. 계속 쭈그려 있다가 일어나서인지 다리가 저려 움직이질 못했다.
“왜 그러고 계세요?”
“다리가… 저려서. 오지 마! 안 돼! 이건 건들면…. 으악!”
“하하, 제가 안전하게 저택까지 모실게요.”
젠은 공주님 안기로 나를 번쩍 들어 안고 저택으로 들어갔다. 일부러 괴롭히려는지 젠이 움직일 때마다 저린 다리가 더욱 저렸다.
“야, 헉…! 윽! 엄청 저려! 움직이지 마!”
“움직여야 빨리 풀리죠. 미르 님이 꽤 무거워서 저도 오래 못 버텨요.”
거짓말! 나처럼 가벼운 성인 남성이 또 어디 있다고. 저번에는 자기보다 훨씬 큰 마물도 번쩍번쩍 들었으면서.
그때 잡은 오우거의 피를 뿌려 놓은 후부터 마물이 내려오는 수가 현저히 적어졌다며 젠이 기뻐했다. 수가 적어지긴 했지만 아직도 몇 마리 내려오긴 하나 보다. 그건 그렇고, 나 이제 다리 저린 거 풀렸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안겨 있어야 하지?
“나… 이제 내려 줘도 돼.”
“안 돼요. 들어올 때 흙을 안 털어서 지금 내리면 바닥에 흙 떨어질 거예요. 욕실로 갈 테니 씻고 나오세요.”
“아, 응.”
욕실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젠은 일부러 손에 힘을 풀어 떨어트리는 척을 했다. 순간적으로 진짜 떨어지는 줄 알고 놀랐다.
“깜짝이야!”
“많이 놀랐어요?”
“응, 심장이 마구 뛰어.”
“귀여운 표현을 쓰시네요. 심장이 마구 뛴다니.”
별로 귀여운 표현은 아닌 것 같다만. 네가 그렇게 말해 주니 진짜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평범한 표현인데, 귀엽게 들리는 건 내가 귀여워서 그런가 보…다. 하하, 이제 내려 줘.”
무겁다 할 때는 언제고, 젠은 나를 안은 채 씻고 나면 갈아입을 옷이 필요하다면서 내 옷을 따로 챙겨 가지고 욕실에 도착했다. 알맞은 온도의 물을 틀어 욕조를 채우곤 천천히 씻으라 한 뒤 밖으로 나갔다. 젠이랑 있으면 내 페이스가 무너지는 것 같다. 이 바보! 거기서 내가 귀엽다는 말이 왜 나와?
느긋하게 욕실에서 씻고 나오니 북쪽 마을에 갔던 마린과 노반이 돌아와 있었다.
“황자님! 부탁하신 거 전부 사 왔어요.”
“고마워! 해콩 사 왔어? 올해 수확한 걸로!”
“응! 내가 많이 달라고 했어! 잘했지?”
노반은 해콩이 두둑하게 담긴 포대를 툭툭 치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잘했네. 지금 삶으려고?”
“네, 세 시간 정도 삶으면 된다 하셨죠?”
“응, 삶고 으깨서 네모나게 모양 잡으면 돼. 이따가 알려 줄게.”
마린은 내가 부탁한 메주를 만들기 위해 주방으로 들어가 자기만 한 큰 가마솥에 해콩을 넣고 삶았다. 노반은 씻고 나온 내게 쪼르르 달려와 자기가 오늘 얼마나 인간처럼 하고 다녔는지, 얼마나 자연스럽게 섞였는지 자랑을 늘어놨다.
“그래서 내가 그 인간한테 하나 더 달라고.”
“정말? 완전 잘했네! 우리 노반이 제일 똑똑해.”
“그치! 미르, 이제 나 없으면 어떡해?”
“노반 없었으면 큰일 났겠네!”
“그치? 나 대단하지?”
“응! 최고, 최고!”
맹구 미소를 지으며 노반을 띄워 주고 있는 나를 보는 젠의 눈빛에 안쓰러움이 담겼다. 잠깐, 안쓰러움이라니? 귀여운 노반을 귀여워해 주는 게 그렇게 안쓰러울 일이야? 난 젠의 시선을 피하곤 노반을 안아 올렸다.
“노반, 밖에 나랑 젠이 씨앗 심어 놓은 거 봤어?”
“씨앗?”
“응, 이제 거기서 고추랑 마늘이랑 이것저것 자라면 그걸로 맛있는 거 많이 만들 거야. 노반도 기대돼?”
“응! 난 미르가 만들어 주는 음식 다 좋아!”
으윽! 내 심장! 노반은 내 심장을 쥐어짜 내기 위해 나타난 존재인 게 틀림없다. 어쩜 이렇게 귀엽지? 가만히 있어도 귀여운데 하는 말도 귀엽고. 안 귀여운 곳이 하나도 없다. 이게 말이 돼? 젠, 우리 귀여운 노반을 좀 봐봐. 안 귀여워하고 배겨?
“형이 맛있는 거 잔뜩 만들어 줄게! 오늘은 닭칼국수 해 먹을 거야. 노반, 닭고기 좋아하지?”
“난 다 좋아해. 당근 빼고!”
“당근도 들어가긴 하는데… 많이 안 넣을게.”
마린이 해콩을 삶는 동안 닭칼국수를 만들기 위한 재료를 손질했다.
“젠, 안 바쁘면 밀가루 반죽 좀 해 줄 수 있을까?”
마린은 해콩을 삶고, 나는 닭칼국수 육수와 채소를 준비, 나머지 칼국수 면을 만드는 건 젠에게 맡기기로 했다. 젠은 시키면 다 잘하니까.
젠을 불러 내 옆에 앉혀 놓고, 큰 볼에 밀가루와 물을 부어 가며 반죽을 만드는 법을 알려 줬다. 깨끗하게 손을 씻고 온 젠은 강한 힘으로 반죽을 치댔다. 극강의 쫀득함을 느낄 수 있는 반죽이 될 것 같다. 정말 못하는 게 없네.
“밀가루랑 물이랑 잘 뭉쳐 가면서… 소금도 조금 넣고.”
“이 정도면 됐나요?”
“응, 조금만 더 치대고, 천으로 감싸서 한 시간 정도 냉장고에 넣어 놓으면 돼.”
젠의 반죽은 문제없다. 냉장고 안에서 반죽이 숙성되기를 기다렸다. 그동안 나는 잘 삶아지고 있는 해콩의 상태를 살피고, 반죽을 성공적으로 만들어 낸 젠은 싫다는 노반에게 책을 읽어 주며 지식을 쌓아 줬다.
젠은 ‘미르 님과 같이 지내고 싶다면 이 정도 인간 상식은 알아 놔야 한다.’며 일주일 전부터 노반에게 책을 읽어 주기 시작했다. 내가 자기 전에 노반에게 읽어 주는 동화책과는 전혀 다른 정치 상식이라든가, 경제 상식 등등 귀족들이 배울 만한 지식을 알려 주었다. 이제 저런 건 하등 쓸모없을 텐데. 그래도 노반은 오래 사니 알아 두면 유용하긴 할 거다.
끔찍하게 지루하다는 표정의 노반을 어렵사리 외면하고, 미리 끓여 놓은 육수를 꺼냈다. 파뿌리, 닭 뼈와 갖가지 약재로 끓여진 육수다. 어제 종일 우렸으니 감칠맛은 충분할 거다. 육수가 끓기 시작하면 미리 썰어 놓은 감자와 당근, 양파 그리고 닭고기를 넣는다. 닭 뼈로 우러난 국물은 다른 조미료가 없어도 맛있을 거다. 정성스럽게 빻은 다진 마늘도 잊지 않고 넣었다. 믹서기 하나 있었으면 좋겠는데. 과학의 발전이 없는 이곳에선 어쩔 수 없지.
“양념장도 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고추가 없어서.”
“후추 필요하시죠?”
“응, 고마워.”
반죽을 일정한 크기에 맞춰 썬 칼국수 면에 전분을 살짝 묻혀 뭉치지 않게 만든 뒤 육수에 넣고 끓였다. 면이 거의 다 익을 때쯤, 대파를 송송 썰어 넣었다. 다 완성된 칼국수를 그릇에 나누어 담고 마무리로 후추까지 예쁘게 뿌렸다.
“밥 먹자!”
공부를 하던 노반은 밝은 미소로 식탁으로 걸어왔고, 그런 노반의 뒷모습을 본 젠은 약하게 한숨을 쉰 뒤 따라 들어왔다.
“이게 닭칼국수야?”
“응, 맛있겠지? 국물이 회심작이야.”
“응! 냄새도 너무 좋아. 미르는 이런 거 어떻게 아는 거야?”
“살다 보니 대충…. 이제 먹자!”
노반의 질문에 조금 놀랐다. 이쯤 되면 황자 짓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더라. 이따가 메주 만들면서 사실대로 말할까, 난 사실 황자가 아니라 헬조선에서 살던 평범한 남성일 뿐이라고. 근데 이 중요한 걸 메주 만들면서 말해야 하나? 메주 다 만들고 티타임 가질 때 말하지 뭐.
국물은 말할 것도 없이 맛있었다. 닭 뼈와 파뿌리, 양파 껍질, 당근, 무, 표고버섯, 뒷산에서 힘겹게 구했던 황기와 산삼 등등을 하루 종일 우렸는데 맛이 없을 수가 없다. 화학조미료가 있었다면 이런 불편한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되지만, 없는 사람이 숙여야지 어쩌겠나. 게다가 백 퍼센트 친환경 음식이라 그런지 몸도 건강해지는 느낌이다.
면발도 완벽했다. 잘 치대졌는지 쫄깃한 식감이 좋았다. 앞으로 반죽은 젠한테 맡겨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