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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먹고 싶어요-27화 (27/227)

27. 북쪽 땅으로 쫓겨나다 (13)

“우와! 이런 거 처음 먹어 봐!”

“맛있지? 나중에 고춧가루 생기면 더 맛있게 해 줄게.”

“여기서 더 맛있게 해 줄 수 있어?”

“그럼. 고추만 자라면 이런 건 비교도 안 되는 음식 만들어 줄 수 있어.”

내가 뭣 땜에 오스먼드랑 다이다이 떠서 북쪽으로 왔는데. 젠이 온 건 예상외였지만, 상관없다. 내가 4황자 몸에 들어간 헬조선 사람이란 걸 알아도 지가 뭘 할 거야. 원래 4황자랑 친한 것도 아니고, 지금은 나랑 친해진 것 같은데 잘 넘어가 주겠지.

문제는 마린이다. 세네카 제국에서 같이 온 마린이 이 안의 내용물이 4황자가 아니란 것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잘 모르겠다.

“그럼 저 텃밭에 고추만 빨리 자라면 돼? 내가 도와줄게!”

“응, 정성스럽게 돌봐 주면 빨리 자랄 거야. 한 두 달 후면 수확할 수 있을걸?”

“두 달? 너무 느리다. 내가 빨리 수확하게 해 줄게!”

“그래그래. 꽃이 피고, 한 달 정도 지나면 고추가 자라. 빨갛게 익고 주름이 질 때 수확하면 돼. 알겠지?”

“응, 주름이 질 때 말이지? 알았어.”

노반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의지를 불태웠다. 헬조선에서 딱 하나만 가져올 수 있다면 카메라를 가져왔을 거다. 하루하루 귀여운 노반을 담고, 젠의 비현실적인 모습도 담고, 마린의 예쁜 미소도 담고, 내 일상을 브이로그로 만들면 꽤 잘 팔릴 텐데. 다큐로 만들어도 괜찮을 것 같고.

노반은 텃밭으로 나가 고추가 잘 자라기를 구경한다 했고, 가장 귀찮은 설거지는 젠이 하고, 나와 마린은 다 삶아진 해콩으로 메주를 만들기로 했다. 삶아진 콩을 으깬 뒤 네모나게 모양을 잡아 굳혔다. 기다리는 게 힘들지 같이 만들면 금방이다.

“이 정도 크기면 되나요?”

“응, 완벽해.”

꽤 많은 개수의 메주가 완성됐다. 노반이 많이 사 왔다고 한 게 빈말은 아니었나 보다. 간장, 된장, 고추장을 만들고도 남을 정도의 양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일단 이렇게 내버려 두고, 표면이 잘 굳으면 실로 엮어 매달아서 말리면 돼.”

“따듯한 곳에서 말려야 된다 하셨죠? 이제 곧 추워질 텐데 괜찮을까요?”

“응. 그런 건 마법으로 배리어 만들면 돼. 장소가 문제인데… 아, 1층에 창문 없는 안 쓰는 방 하나 있지?”

“네, 청소도 다 되어 있어요.”

“그럼 거기다 옮기자.”

마나가 얼마 남지 않았지만, 이 정도는 가능할 거다. 마나가 없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아, 마나 가지러 세네카 제국에 가야 하는데, 형님이 보내 준다던 에반스터 경은 언제 와?

4황자가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건 프레오나 제국에 도착해서야 알아챘다. 덕분에 4황자가 숨겨 놓은 마나는 가져오지 못했고, 숨겨 놓은 장소를 아는 건 4황자의 친구라는 에반스터 경뿐인데. 그놈이 센스가 있는 놈이면 말 안 해도 잘 가져올 거고, 눈치 없는 놈이면 빈손으로 오겠지.

“미르 님, 다 하셨으면 저 좀 볼까요?”

젠은 그 많던 설거지를 이미 끝내 놓았는지, 옆에서 책을 읽다 졸고 있는 노반을 소파에 눕힌 뒤 내게 다가왔다.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앞장서 걷는 젠을 따라 비어 있는 1층 방으로 들어갔다. 비어 있는 방은 사람의 흔적이 없어서 그런지 들어찬 공기가 차가웠다.

“왜? 할 말 있어?”

젠은 사람을 불러 놓고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뭔가를 고민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하려는 말이 뭘까. 아, 혹시 나 때문에 황궁에서 쫓겨난 게 화가 나서 날 죽이고 싶다거나, 오늘부터 분이 풀릴 때까지 한 대씩 때리고 싶다고 말하려는 걸까. 젠이 원한다면 맞아 줄 수는 있겠지만 내 연약한 몸뚱이는 저 주먹에 한 대만 맞아도 저승 갈 것 같은데.

혹시나 젠이 정말 날 때리고 싶다 하면 어떻게 진정을 시킬까 고민하는 와중, 생각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말이 들렸다.

“미르 님은 누구시죠?”

“때리는 건…. 응?”

“처음부터 괴리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실례일 것 같아 물어보진 않았어요.”

그는 나를 바라보다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눈을 가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에 보이는 금안이 여상하게 빛났다.

“저도 이제 미르 님과 꽤 많이 친해진 것 같은데, 이런 거 물어볼 사이는 되죠?”

그 빛나는 금안이 다시 나를 향했다.

“응, 물어봐도 돼. 근데 다 알고 있지 않아? 세네카 제국의 4황자잖아.”

“육체는 그렇겠죠, 영혼은 아닌 것 같지만.”

그저 ‘별난 황자구나.’ 혹은 ‘출생의 비밀이 있는 황자구나.’라고 생각할 줄 알았다. 마법사들이 생각하기에도 영혼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는 현실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이론이었으니까. 아무리 신이 있다 해도 말이다. 그런데 젠은 아니었다.

“증거는?”

“당신 영혼의 색만 달라요.”

“나만 까만가 보네. 그거 죄를 많이 저질러서 그래.”

“아뇨, 빛나요. 보석같이.”

그는 가까이 다가와 강하게 뛰고 있는 내 심장으로 손을 올렸다. 얇은 셔츠 위로 그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

“전 영혼의 색을 볼 수 있어요. 인간은 살구색, 마물은 대체적으로 어두운 녹색, 노반은 연한 파란색. 그밖에 다른 종족들도 고유의 색을 가지고 있어요.”

마법은 아니다. 영혼의 색을 보는 것도 초능력이라 할 수 있다면, 젠은 ‘초능력자’인 건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괴리감이 느껴졌다 했으니 처음부터 들켰겠구나. 이런 식으로 들킬 수도 있다니. 마법 쓰는 놈들은 걱정 안 해도 된다 생각했지만 젠같이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조심해야겠구나. 근데 내가 그런 특별한 사람들을 어찌 알고 조심한대.

“근데 나는 네가 알고 있는 인간의 색이 아니다, 뭐 그런 거지?”

“믿으시네요?”

“못 믿을 건 또 뭐야. 네 말대로 난 인간이지만, 다른 곳에서 왔으니까.”

“다른 곳이요?”

“응, 다른 곳.”

“신기하네요. 어떻게 오신 건지 알려 줄 수 있어요?”

그의 눈동자는 올곧게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손이 심장에서 어깨, 어깨에서 목, 목에서 뺨으로 이어졌다. 내 뺨을 부드럽게 감싼 그의 손에서 따듯함이 전해졌다. 영악한 자식, 이런 분위기에서 말할 수 없다고 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

“너 악마 알아?”

“알죠, 좋아하진 않지만.”

“걔가 날 데려왔어.”

“…그랬군요.”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내 뺨을 간지럽혔다. 한 뼘이면 닿을 거리에 젠의 얼굴이 있다. 아, 나는 저 얼굴에 약한 걸지도 몰라. 또 줏대 없이 심장이 뛰잖아.

“4황자는 볼모로 잡혀가기 전에 악마랑 계약을 했어. 3황자한테서 벗어나고, 프레오나 제국으로 가기 싫다는 것이었지. 아마 3황자를 볼모로 보내고 자신은 세네카 제국에서 살고 싶어 했던 것 같지만. 퍼디스는 영리한 사람이라 볼모로 갈 일이 없었고 황태자와 능력 있는 2황자가 갈 일은 없으니, 결국 악마는 4황자의 영혼을 바꿔 버린 거지. 영혼과 계약을 했으니 그 영혼만 볼모로 안 가게 해 버리면 그만이니까. 퍼디스한테서도 벗어나고.”

“교활하네요.”

“악마가 그렇지 뭐. 그래서 악마는 4황자의 영혼을 꺼냈고, 비어 버린 육체를 나로 채운 거야.”

“당신… 계약을 한 거예요, 악마랑?”

“응, 당연히 했지. 두 번이나 했는걸?”

“네?”

놀란 표정의 젠을 안심시켰다. 저렇게 놀란 얼굴은 또 처음 본다. 항상 차분한 표정과 살포시 웃는 얼굴이 전부였으니까.

“악마에게 바친 건 내 이름뿐이야. 악마 말로는 이름으로 계약을 하면 이름이 불리던 때의 기억을 잃게 되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잊히는 것을 겪게 된다. 연약한 인간의 정신은 붕괴될 것이다. 그러니 영혼 계약을 하는 게 내 이승 생활에 더 안전하다. 이러긴 했는데, 당연히 영혼 계약하려고 구라 치는 거 이름으로 막은 거지.”

“이름….”

“걱정돼?”

“당연하죠. 악마는 믿을 게 못 돼요. 게다가 당신의 언어로 호구라고 하죠? 안 그래도 착해 빠졌는데 교활한 악마와 계약이라니.”

“내가 호구란 말도 썼구나…. 들킬 만했네.”

“들키는 건 상관없는 겁니까?”

“응, 따로 숨기라는 말은 없었으니까 괜찮아. 그리고 내가 유리한 계약이었으니까 걱정 마.”

그는 유리하다는 내 말을 믿는 듯한 눈치가 아니었다. 잊은 것 같은데, 내가 너 저승길로 보내려던 사람이거든? 난 착한 사람도 아니고, 악마도 교활하지만 멍청한 놈이 있는 거다. 난 운 좋게 멍청하고 급한 놈이 걸린 거고.

“따지자면 사기 계약이긴 한데.”

“사기요?”

“나 이름 두 개거든.”

“….”

불리는 이름 따로, 호적 이름 따로. 호적 이름을 악마에게 주었으니 불리는 이름은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러니 악마의 말대로 정신이 붕괴될 일도 없을뿐더러, 쓰레기를 주고 금을 사온 격이니 따지자면 사기 계약이지.

“그러니까 내 정신이 붕괴할 일은 없을뿐더러, 영혼도 멀쩡해.”

“악마가 그렇게 쉽게….”

“인간한테 당할 정도면 어지간히 급했었나 봐. 당시 상황에 맞는 영혼이 나밖에 없었다 그랬거든. 그러니까 내가 악마한테 잡혀간다는 걱정은 안 해도 돼. 난 악마보다 오스먼드가 더 무서워.”

“당신이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는 있는 거예요?”

이거까지 말해 줘야 하나. 뭐 상관없겠지. 솔직히 거의 불가능하니까.

“자연사하면 돌아가게 해 준댔어. 거의 불가능이지.”

“그러네요.”

“빈말이라도 가능하다고 해 주면 안 돼?”

“쥐 죽은 듯 이곳에 박혀 있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네요.”

“….”

“돌아가고 싶어요?”

“응.”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돌아가고 싶다고.

영혼을 바꾸는 계약이 가장 까다롭다고 그 악마가 말했었던 것 같다. 자기처럼 유능한 악마가 아니면 시도도 못 한다고 자랑도 했었던 것 같고.

악마가 인간의 영혼을 바꿀 수 있는 조건 중 하나는, 계약하게 될 사람과 반대의 감정을 느끼고 있는 사람의 영혼이어야 한다는 거다. 4황자는 슬프고 현실에서 도망가고 싶었으며 죽고 싶었고, 난 기뻤고 현실을 느끼고 싶었으며 살고 싶었다.

“어차피 죽어야 돌아가는 거면, 지금을 행복하게 보내자고 생각하고 있어.”

“…절대 불가능이네요.”

“그렇지? 인간의 자연사 비율은 4퍼센트도 안 돼. 더구나 여긴 법도 없고, 전쟁 나면 개나 소나 썰어 대는 세상인데, 제국의 황자라면 더더욱 불가능이지.”

“자연사도 불가능이지만, 당신의 행동이 더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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