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북쪽 땅으로 쫓겨나다 (14)
그는 손을 올린 내 뺨을 아프지 않게 꾹 누르며 압박했다. 덕분에 붕어 입술이 된 채 뻐끔뻐끔 작게 항변했다.
“제가 영혼의 색을 보지 못했다고 해도, 당신의 독특한 언행으로 눈치챘을 겁니다.”
“그건 편해서.”
“저야 악마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니 상관없다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닙니다. 악마와 연관된 사람을 교황청에서 가만히 둘 것 같아요?”
“교황청? 여기 교황청이란 것도 있었어?”
“모르셨습니까? 4황자의 기억이 전부 있는 것 아니었어요?”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기억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살아 계실 리가 없으니까요.”
“내가 임기응변이 뛰어나서일 수도 있잖아.”
“임기응변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에이, 난 임기응변으로도 충분히 살았을걸.”
그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철없는 어린아이를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곧이어 한숨을 쉬고 꽉 쥐었던 뺨을 편하게 놓아 주었다.
“로이븐 황태자의 이야기를 했었잖아요. 기억이 없었다면 그렇게 자세히 못 말하죠.”
“그렇지…. 뭐야, 그거 떠본 거였어?”
“조금요. 어쨌든 조심해야 한다는 건 다름없어요. 교황청이 알게 되면….”
“알게 되면…?”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혹시나 으스스한 말이 나올까 긴장돼 침을 꼴깍 삼켰다.
“잡혀가요. 자백할 때까지 고문을 한다는데, 죽는 게 좋을 정도로 괴롭대요. 악마랑 연관이 없어도 있다고 거짓 자백하고 죽는 사람이 많다네요.”
“헉! 어떡해? 교황청이 나 잡으러 오면….”
“제가 구하러 가야죠.”
그는 입꼬리를 올려 작게 웃고는, 다시금 내 뺨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서 봄의 햇살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 안 되겠다. 내일 후회한다 해도 물어봐야겠어.
“젠, 너 혹시 나 좋아해?”
“…모르겠어요.”
“응?”
좋아하냐는 물음에 그는 모르겠다는 말을 남긴 채 입을 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잠자코 그의 말을 기다렸다. 햇살 같던 그의 표정이 다시 차분해진 것으로 보건대 아마 내가 원하는 대답이 나올 것 같진 않았다.
길었던 침묵의 시간이 지나고, 내 뺨을 부드럽게 매만지던 손을 떼어낸 그가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굳이 제 감정의 정의를 내린다면….”
“….”
“전 당신이 미워요.”
밉다. 내가 밉다 말하는 그의 눈은 담담했다. 아닌가, 울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울지 마요.”
그의 다정한 말에 눈앞이 뿌예졌다. 울고 싶은 건 나였다. 젠이 날 미워해도 어쩔 수 없는 거라 생각했지만, 내심 그가 날 좋아해 줬으면 했다. 난 그를 좋아하니까.
그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그의 밉다는 말에 이렇게 서럽지도 않을 테고, 심장이 울렁거리지도 않았을 거다. 어쩌다 그를 좋아하게 된 거지? 미안해서 좋아했었나? 아니다. 미안해서는 무슨, 내가 그렇게 서툰 사람도 아니고.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좋아했을 리가 없다.
그의 잘생긴 얼굴이 좋았다. 그 얼굴이 짓는 미소도 좋았다. 가끔은 찌푸리는 표정도 좋았고, 다정한 목소리도 좋았고, 날 위해 주는 행동도 좋았다. 평소의 부드럽고 가벼운 태도도 좋았으며, 다른 사람이 있을 때만 보여 주는 진중한 태도도 좋았다. 늦게 돌아오면 걱정했다며 타박하는 것도 좋았다. 단칼에 마물을 잡는 그의 강인함도 좋았으며, 별것 아닌 것에 걱정해 주는 게 좋았으며, 무심한 행동에서 나오는 상냥함과 웃을 때마다 보여 주는 다정함도 좋았다.
“밉다는 소리 처음 들어 봐서 그래. 놀라서 우는 거니까 괜찮아.”
“….”
“미안, 내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웃긴 질문이었네.”
“당신을 싫어하진 않아요. 그냥 미울 뿐이지.”
제 계획을 당신이 망쳤거든요. 감정 변화 없이 담담한 그의 어조에 눈물이 멈췄다.
“원해서 백작이 된 게 아니에요. 정치를 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마물을 잡고 싶은 것도 아니었어요.”
정계에 나서지 않는 어린 백작. 젠은 포악한 마물을 잡는 프레오나의 수호 백작이라고도 불렸다.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는 본격적으로 정치를 하지 않기 위함이었고, 마물을 잡는 이유는 정치에 참여하는 것보다는 피를 흘리는 게 나을 거라 생각해서였다.
“여섯 달 뒤에 대대적으로 마물을 잡는 행군이 있어요. 전 그 행군의 지휘관으로 나서게 됐을 거예요. 동료가 죽었다 해도 위험해서 시체조차 찾을 수도 없는 곳이니, 제가 죽었다 해도 기사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테죠.”
“죽으려 했어?”
“정확히 말하면 죽은 척이죠. 신분을 지우고 로웨나 왕국의 동쪽으로 떠나려 했거든요.”
“동쪽이라면….”
“그곳에서 만나야 하는 분이 있어요.”
로웨나 왕국은 산림이 우거지고, 산맥이 높아 ‘자연의 요새’라고 불리는 왕국이다. 내가 이 몸에 들어오기 전, 겁쟁이 4황자가 구하던 ‘미르바’라는 약초가 로웨나산맥에서만 자란다고 알고 있다. 나는 4황자의 기억으로 알게 되어 약초에 중점을 두었지만, 로웨나산맥이 진짜 유명한 이유는 드래곤이 살고 있다고 알려져서다.
“…드래곤?”
“맞아요.”
“전부 사라졌다 들었는데….”
“예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어요. 형체는 보지 못했지만 붉게 빛나는 영혼의 색을 봤어요.”
“….”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 해도, 내가 그 기회를 빼앗았다는 거 아냐.”
“그렇죠.”
단순히 장기 휴가 내고 로웨나 왕국으로 여행 가면 해결될 일이 아닌가 생각하면 쉽겠지만, 로웨나 왕국은 가는 길도 험하고, 다른 제국이나 왕국 사람의 통행을 받지 않는다. 오직 로웨나 왕국의 국민들만 들어갈 수 있다.
자연의 요새라곤 해도 강한 제국의 힘으로 밀고 들어가면 간단하게 함락당할 거라 생각해 그동안 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로웨나산맥의 입구는 마법과는 다른 힘, 드래곤의 힘이 로웨나 왕국을 보호하고 있다. 드래곤의 허락을 받으면 들어갈 수 있다곤 하지만, 이제껏 그 안에 들어간 이방인은 없었다.
“가고 싶으면 가도 돼.”
“아뇨, 오스먼드 폐하가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걸요.”
“오스먼드가 여기 온다고? 왜?”
“제가 필요하게 되면 찾아오겠다고 하셨으니까요.”
“허! …널 살려 준 대가가 그거야?”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인 젠을 향해 헛웃음을 날렸다. 볼모로 온 나는 오스먼드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젠을 버리고 타루스한테 굴려지다 북쪽으로 쫓겨났고, 젠은 오스먼드의 명으로 타루스를 죽이고 자신을 버리는 계획을 세운 놈이 있는 북쪽으로 유배를 왔다. 이건 나에게도 몹쓸 짓이고, 젠에게도 몹쓸 짓이다.
오스먼드 이 빌어먹을 자식, 젠 이프리트는 한 번 쓰고 버릴 패가 아니다 이거지. 어디 찾아오기만 해 봐, 엿 먹은 거 배로 돌려주마.
“오스먼드가 오면… 내가 잘 말해 볼게. 내 말은 들을 거야.”
‘들을 거야’가 아닌, 강제적으로 내 말을 ‘들어야 한다’. 죽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
“당신이요?”
“응, 내가 그놈 목숨 줄을 잡고 있거든.”
“….”
또 무슨 짓을 벌인 거냐는 눈빛이다. 악마랑도 계약했는데, 오스먼드랑 못 할 건 또 뭐야. 젠의 목숨 줄을 오스먼드가 잡고 있다면, 오스먼드의 목숨 줄은 내가 쥐고 있다. 젠을 자유롭게 만들기 위해선 내 목숨 줄을 끊으면 된다. 어려울 거 없어. 빚 갚는다 생각하면 돼.
“그러니까 나 너무 미워하지 마. 일단은 같이 살아야 하니까. 할 이야기 끝났지? 먼저 가 볼게.”
입을 다물고 있는 젠을 두고 밖으로 나갔다. 해가 져 어둑어둑한 밤하늘엔 손톱 달이 떠 있었다. 자연사는 글러먹었네. 악마 네가 이겼어.
* * *
“오늘은 과일청을 만들자.”
“과일청?”
내 무릎 위에 머리를 기댄 노반이 귀여움을 무장한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흑! 내 심장.
“노반이 좋아하는 과일들을 설탕이랑 같이 절이면 차를 더 맛있게 마실 수 있어. 노반은 홍차 싫어해서 안 마시잖아.”
“응! 그거 너무 써. 난 싫어.”
쓴맛을 싫어하는 노반은 도라지 같은 쓴 나물은 물론 홍차, 커피 등등 가리는 게 꽤 많았다.
매일 점심을 먹은 뒤, 날이 좋고 별일이 없으면 티타임을 즐겼다. 마린은 홍차, 젠은 커피, 나는 주는 대로 잘 마시지만 노반은 홍차와 커피 둘 다 싫다며 적당한 온도로 데운 우유를 마셨다. 처음에는 마린이 구워 주는 쿠키와 스콘과 함께 먹는 데운 우유가 너무 좋다며 밝게 웃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자기도 우유가 아닌 어른들의 음료를 마시겠다며 내 홍차를 뺏어 홀짝홀짝 마시다 바로 뱉어 냈다.
타루스 황태자가 내게 대접했던 그래너스 차가 있으면 좋았을 테지만 그 차는 아주 희소한 것은 물론, 프레오나 제국의 황궁에서만 마실 수 있는 것이라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그래서 대신 생각한 게 과일 청이다. 티타임엔 홍차와 커피만 마시라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노반은 씁쓸한 맛을 싫어하는 것뿐이고 과일을 아주 좋아하니 과일청이 딱이다.
“복숭아랑 레몬, 베리… 또 뭐 있지? 노반이 좋아하는 과일 다 말해 봐.”
“바나나!”
“으음, 그건 청으로 먹기보단 그냥 먹는 게 나아. 또 뭐 좋아해?”
“사과! 파인애플! 석류! 포도! 그리고 미르도 좋아!”
“아흑!”
들었어? 다들 들었냐고. 방금 노반이 내가 좋다 그런 거 맞지? 아아, 어떡해! 너무 귀여워, 사랑스러워.
“귀여워. 이대로 죽어도 좋아.”
“안 돼!”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주접에 진심으로 놀란 노반이 내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으며 안 된다 소리쳤다. 암암, 아직 안 죽어요. 내가 우리 노반 장가가서 아들딸 낳고 오순도순 살고 손녀 손주 보는 것도 다 보고 죽을 거다. 한 천년은 더 살아야겠네.
“억! 허리…!”
“아! 미안해!”
노반은 화들짝 놀라 떨어져선 고사리 손으로 내 허리를 주물렀다.
“같이 마을에 다녀올까? 설탕도 사고, 책도 사러 가자.”
“좋아!”
마을로 가려면 말을 타거나 마차를 타야 했다. 덕분에 가끔 오는 마커스의 마차를 빌려 타거나, 말을 탈 수 있는 젠이 있어야 갈 수 있다. 젠과는 그날 이후 조금 어색해져서 식탁 앞을 제외하곤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오늘은 마커스가 있으니 걱정 없이 마을에 갈 수 있다. 마커스는 마린의 부탁으로 식자재를 운반하는데 가끔 아무 이유 없이 올라오기도 한다. 마린한테 반했나 보다. 하지만 안 된다. 우리 예쁜 마린을 아무한테나 줄 수 없지.
“마커스, 부탁하네.”
“네, 황자님. 걱정 마십시오.”
“고맙네.”
젠은 엊그제부터 창고 뒤에서 오우거의 가죽으로 방어구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고, 마린은 이번에 마커스가 가져다준 차와 함께 최근 읽기 시작한 《큰 아씨들》을 마저 읽고 있겠다며 돈과 이것저것 들어 있는 아공간 주머니를 내게 넘기곤 잘 다녀오라 인사했다.
노반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마차 내부는 깔끔했고 부드러운 양털 쿠션도 놓여 있었는데 마커스가 마린을 위해 가져다 놓은 것이라 짐작했다. 그래도 우리 마린은 안 돼.
마차에선 노반과 간단한 게임을 했다. 시작은 간단하게 끝말잇기를 했는데, 노반이 요즘 젠과 함께 책을 읽어서 그런지 나보다 알고 있는 단어가 많더라. 그래서 한국에서 쓰는 말을 몇 번 섞었더니 ‘핵인싸’, ‘갑분싸’, ‘명존쎄’ 등등 이상한 말을 배워 버렸다. 다 내 잘못이야. 진짜 입을 꿰매 버리든가 해야지. 애를 상대로 이상한 승부욕이 돋아서는.
“마린이랑 젠한테는 비밀이야. 알지?”
“응, 말하면 갑분싸!”
“내가 미안해….”
“미르 건들면 명존쎄!”
“아흑….”
돌아가면 내 입을 꿰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