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자님 먹고 싶어요-29화 (29/227)

29. 북쪽 땅으로 쫓겨나다 (15)

시장과 가까운 마을 입구에서 내렸다. 아직 한낮이라 그런지 장사를 하는 가게는 많았다. 정육점, 채소 가게, 과일 가게, 문구점, 서점, 철물점 등등 다양한 가게가 있었다.

북쪽 마을에 처음 왔을 때는 루독의 딸아이를 진찰하고 시장을 둘러볼 새도 없이 젠과 함께 말을 타고 돌아갔었다. 드디어 둘러보는구나.

시장은 활기가 넘쳤다. 마커스는 마구간에 마차를 두고 오겠다고 먼저 시장을 둘러보고 있으라며 우리를 보냈고, 노반은 저번에 쌀을 주문하고 해콩을 샀던 아줌마가 친절했다면서 그 아줌마한테 한 번 더 가서 인사하겠다며 나를 이끌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슬슬 쌀이 올 때가 됐다.

“네이든 아저씨! 모아라 아줌마는 어딨어?”

“노반! 오랜만이구나! 오늘 모아라는 집에서 쉬고 있단다. 주문했던 아로즈를 가지러 온 거니?”

“응! 여기는 미르! 내가 좋아하는 인간이야.”

노반에게 흥정을 알려 준 해콩 가게 부부 중 남편인 네이든은 노반을 꽤 많이 그리워했는지 밝은 미소로 반겨 줬다. 네이든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한 노반은 곧바로 나를 소개했고, 네이든은 그제야 나를 알아본 건지 고개를 숙였다. 황자가 이런 건 불편하단 말이야.

“앗, 황자님! 인사가 늦은 점 정말 죄송합니다!”

“아닐세, 그대 부부가 노반에게 잘 대해 줬다 들었어. 빈의 품질도 좋았고, 이번 아로즈도 고맙네.”

“아, 아닙니다!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을 한 것입니다!”

“난 괜찮으니 너무 어려워하지 말게.”

고개를 들고 주문한 쌀을 보여 달라 했다. 벼는 아로이즈, 아로이즈에서 난 곡물인 쌀은 아로즈라 불렀다. 어디에서 자랐는지에 따라 쌀의 품질이 달라지는데 내가 원하는 쌀은 희고 광이 나는 백미다. 남쪽에서 자라는 쌀이 찰기가 강하고 진하며, 서쪽의 쌀은 고슬고슬하고 건조하다. 내가 원하는 쌀은 남쪽에서 자라는 쌀이지만, 서쪽에서 자라는 쌀도 쓸모가 많다. 리소토나 빠에야를 만들 때 쓰면 좋다.

네이븐이 건네는 네 포대의 쌀가마를 뜯어 쌀알을 확인했다. 투명하고 균일한 모양, 윤택이 흐르는 자태가 딱 남쪽 쌀이다.

“좋군.”

“루독에게 이야기 들었습니다. 황자님께서 루시를 말끔히 낫게 하셨다면서요?”

“하하, 그랬나….”

아이의 이름이 루시였구나. 다 나았다니 다행이긴 한데, 왜 또 소문이 나 있냐…. 난 야매 의사지 진짜 의사가 아니란 말이다.

“황자님의 미담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것참… 부끄럽군.”

쌀의 가격을 듣고 네이든에게 건네줬다. 노반이 조금 더 깎아 달라고 했지만, 이미 깎은 가격이라 더 깎을 수 없다는 말에 시무룩해졌다. 어릴 때부터 공짜 좋아하면 안 되는데.

쌀 네 포대 전부 아공간 주머니에 넣었다. 마린이 가끔 가져와서 쓰는 건지 아공간 주머니를 본 상인들은 놀라지 않았다. ‘마법사의 제국인 세네카에서 왔으니 신기한 걸 가지고 있구나.’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다행이다. 이 무거운 걸 어떻게 들고 가긴 해야 하는데 내가 들 수는 없고, 노반한테 시킬 수도 없고, 해답은 아공간 주머니뿐인데. 상인들이 신기하게 여겨 뺏으려 들면 일이 커질 것 같아 걱정했었다.

“모아라 아줌마도 보고 싶었는데.”

“미안하구나. 모아라가 감기에 걸려 오늘은 오지 못했어. 다음에는 다 나아 있을 거야.”

네이든의 말을 들어 보면 날이 조금 쌀쌀해져서 상인들 사이에서 감기가 돌고 있단다. 단순한 감기라 의사를 볼 필요는 없지만, 영주성에서 의사와 함께 약사도 데려가 버려서 약을 구할 수가 없단다. 이거 나한테 약 달라고 돌려 말하는 거 맞지?

분노에 찬 네이든의 이야기를 들은 노반이 당장이라도 영주성을 부술 기세라 얼른 아공간 주머니를 뒤져 환으로 만들어 놓은 감기약을 찾았다. 새끼손톱만 한 작은 환이 가득 들어 있는 유리병을 네이든에게 건넸다.

“감기에 좋은 환일세. 한 알만 먹고 푹 쉬면 나을 거네. 약이 안 듣는다고 두 알 이상 먹지 말고 꼭 한 알만 먹게.”

“헉! 정말 감사합니다! 마을 사람들과 같이 먹겠습니다!”

“그래, 다들 꼭 나았으면 좋겠군.”

고맙다고 무릎을 꿇으려는 네이든에게 얼른 인사한 뒤, 아직도 화가 나 있는 노반을 끌어안고 서점으로 들어갔다. 우리 노반 화난 건 알겠지만 진정하자.

“영주는 뭐 하는 인간이야? 정말 이기적이야!”

“맞아. 영주가 한 짓은 정말 이기적인 짓이야. 하지만 노반, 사람은 원래 이기적인 생물이야. 영주가 나쁜 짓을 한 건 맞지만, 한편으로는 이해도 돼.”

“뭐어? 미르도 이기적이야?”

“그럼, 나도 노반이 아프면 의사들을 잡아서 노반에게 집중 치료를 시키고 싶은걸? 소중한 것을 지키려면 뭐든 하는 게 인간이야.”

“끄응….”

노반은 마음에 안 들지만 자신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내가 기쁜지 별말 하지 않았다. 그래도 옳고 그른 건 제대로 알려 줘야지.

“하지만! 그렇다고 남들에게 피해가 가게 하면 안 돼. 아들을 생각하는 영주의 마음은 알지만, 영주가 하는 짓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있잖아. 맞지?”

“응, 정말 이기적이야.”

“맞아. 노반은 저러면 안 돼, 알았지?”

“응, 난 절대 저러지 않아. 영주 명존쎄!”

아, 영주를 탓할 게 아니라 내 주둥이를 먼저 탓해야 했다.

“노반, 젠이 사 오라던 책이 뭐였지?”

“…대류그 여사… 저차 개로….”

“응?”

노반은 어지간히 읽기 싫은 건지 웅얼웅얼거리며 내 눈을 피했다. 마음 같아서는 ‘하기 싫으면 하지 마! 안 해도 돼! 노반은 나랑 평생 띵까띵까 놀면서 베짱이처럼 살자!’라고 하고 싶지만, 노반은 인간처럼 짧은 생을 사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니 알아 놔야 하는 건 전부 알아 놓는 편이 앞으로 노반의 미래에 도움이 될 것이다.

“《대륙의 역사》… 《정치 개론》… 《대륙의 경제》….”

“그리고?”

“끝이야!”

“그럴 리가. 잘 생각해 봐.”

“정말 끝이야!”

온몸으로 믿어 달라 호소하는 노반을 향해 평소의 마린처럼 웃어 줬다. 후후.

“노반이 보고 싶은 책은 없어?”

“내가 보고 싶은 책?”

“응, 저런 것만 보면 지겨워서 책 싫어질걸? 보고 싶은 책 없어?”

“있어!”

노반은 쫄래쫄래 달려 나가 가판대에 올려져 있는 《아트리아의 여행》이라는 제목의 책을 집어 왔다. 어린이용 동화인 줄 알았더니 세네카 제국 출신 유명한 작가의 장편 소설이더라.

“이거?”

“응! 마린이 재밌게 읽었던 책이라고 그랬어. 그래서 나도 읽어 보려고!”

“그랬구나. 나도 아직 안 읽어 본 책이야. 노반이 읽고 나한테 알려 주면 되겠다.”

“응! 내가 미르 잘 때 읽어 줄게!”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자기 전에 책을 읽어 주는 것을 잊어버리면 삐지기 일쑤였는데, 이제는 자기가 읽어 준다며 기대에 차서는 서점 안을 방방 뛰었다.

젠이 부탁한 책을 비롯해 마린에게 선물할 책, 그리고 내가 읽을 책을 따로 산 뒤 서점 주인에게 책값을 지불하고 아공간 주머니에 넣었다. 뭐 한 것도 없는데 그동안 저택에서만 뒹굴었던 집돌이라 그런가 꽤 지친다. 집에 언제 가지.

서점을 나서서 설탕을 파는 가게를 찾아갔다. 설탕 가게 주인도 노반과 안면식이 있는 건지 백설탕 두 포대를 사고 다른 꿀보다 당도가 높아 비싸다는 하이스 꿀도 싼 가격에 두 통이나 샀다.

노반의 밝은 미소는 사람을 홀리는 재주가 있다. 진짜 홀리는 건 아니지만 뭐랄까, 마음이 흐물흐물해진다. 동화책에 나오는 캐릭터에 노반을 대입해 보면 나그네의 외투를 두고 경쟁하는 해와 바람에서 나오는 해와 같은 미소를 가지고 있다. 미소 한 방에 마음이 풀어진다.

“나 핵인싸 맞지!”

“….”

정정한다. 고집 열라 센 바람이다.

“노반, 앞으로 명존쎄, 핵인싸, 갑분싸 전부 금지.”

“뭐? 재밌는데!”

“노반이 명존쎄, 핵인싸, 갑분싸라고 할 때마다 내 마음이 너무 아파.”

“뭐어? 미르 괜찮아?”

심장을 부여잡는 시늉을 했더니 앞서 달려가던 노반이 깜짝 놀라 다시 내 쪽으로 달려왔다. 옷자락을 당기는 노반을 안아 올리곤 부푼 볼을 아프지 않게 콕콕 찌르며 말했다.

“노반이 명존쎄, 핵인싸, 갑분싸만 말 안 하면 돼.”

“그치만… 지금은 미르랑 둘이 있을 때니까… 젠이랑 마린 앞에서는 안 할 거야. 약속할게!”

노반의 장화 신은 고양이 눈빛에 마음이 약해진다. 안 된다. 이런 버릇은 초장에 잡아야 한다.

“흠흠! 명존쎄, 핵인싸, 갑분싸 말 안 하는 대신 다른 거 알려 줄게.”

“응! 뭐?”

“‘뽀시래기’. 노반처럼 사랑스럽고 귀여운 존재한테 ‘뽀시래기’라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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