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북쪽 땅으로 쫓겨나다 (16)
“뽀시래기! 귀여워!”
“그치? 우리 뽀시래기 앞으로 나쁜 말 하는 거 아니야, 알았지?”
“응, 뽀시래기 알려 줬으니까, 명존쎄, 핵인싸, 갑분싸는 안 할게.”
아예 기억에서 지워 줘. 앞으로 ‘뽀시래기’ 노반이 ‘명존쎄, 핵인싸, 갑분싸’를 말할 일이 없길 바라며 노반이 안내하는 대로 다양한 가게를 구경했다. 작을 줄 알았던 북쪽 마을은 꽤 컸고, 사람들도 많이 살아서인지 상점가가 굉장히 컸다. 수도 상점가의 3분의 1은 돼 보였다.
고기, 해산물, 채소 등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 만든 피자를 파는 가게, 큼직한 새우와 아스파라거스를 볶아 그 위에 치즈를 올려 오븐에 구운 그라탕 가게, 노릇노릇 잘 구워진 고기와 채소를 같이 먹을 수 있는 꼬치를 파는 가판대도 있었다. 배가 조금 고픈데 뭘 좀 먹을까 가판대를 기웃거렸더니 꼬치 가게 주인이 환한 영업 미소를 지으며 노반에게 꼬치를 건네줬다. 과감하게 어린아이를 이용하겠다는 대범한 영업 스타일이다.
노반은 내 눈치를 한번 보곤 먹어도 된다는 내 신호에 신이 나선 꼬치를 받아 들었다. 당근은 쏙 빼고 고기만 빼 먹는 노반에게 편식은 오늘만 봐주는 거고, 다음에는 절대 안 된다고 강하게 이야기했다. 그에 당근을 안 먹어서 좋은지 밝게 퍼지는 노반의 미소에 나도 꼬치 가게 주인도 마음에 온기가 가득 찼다.
바로 옆에 있는 가판대에서 파는 한입거리의 크림 슈를 샀다. 내 것과 노반 것까지 두 개를 사려 했지만 슈크림 가게의 주인과 노반이 아는 사이여서 하나는 공짜로 줬다. 노반의 말대로 북쪽 마을 상점가에서 노반은 핵인싸다.
“노반, 아는 사람이 많구나.”
“응! 내가 잘생기고 귀엽다고 다들 예뻐해 줘.”
“우와, 노반은 좋겠네.”
“미르도 예뻐! 내가 본 사람들 중에 미르가 제일 예뻐!”
“하하, 예쁘다 해 줘서 고마워. 노반 덕분에 지루하지 않게 구경하네.”
“나만 믿어! 여기보다 더 재밌는 곳 데려가 줄게! 마린이랑 자주 와서 잘 알아!”
그렇게 핵인싸 노반의 상점가 투어가 시작됐다. 가게 문이 열려 있으면 무조건 돌진하려는 노반을 어르고 잘 달랬다. 무슨 가게인지도 모르는데 막 들어가면 안 된다 했지만, 달랜 것이 무색하게 노반을 예뻐하는 상점가 사람들은 활짝 웃는 노반에게 하나라도 더 주지 못해 미안해했다. 식료품 가게와 생활 용품을 파는 가게가 대부분이었지만. 노반의 핵인싸력은 특이하게도 검을 파는 가게의 주인, 시계만 파는 가게의 주인 그리고 인형 가게 주인도 있었다.
“여기는 인형을 만드는 달리야. 달리는 마린이랑 친해. 달리, 여기는 마린이 맨날 말하는 그 황자님! 내가 말한 것처럼 진짜 예쁘지?”
“처, 처음 뵙겠습니다, 황자님! 전 달리라고 합니다! 마, 마린의 친우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미모를 가지고 계신데, 성격도 착하고, 약초에 관심이 많고, 상냥하시고, 다정하시고, 못 하는 게 없으시다고.”
밝은 갈색 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여자는 가게 안에 있던 소파에 가만히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레 들이닥친 노반에 화들짝 놀라며 횡설수설 인사했다. 그러고는 낯부끄러워지는 소리를 하기 시작했는데, 노반의 말에 따르면 항상 마린이 나를 자랑할 때마다 늘어놓는 말이란다.
“달리라고 했나? 앞으로도 마린을 잘 부탁하네.”
“아, 아닙니다. 저도 마린에게 항상 도움을 받는걸요.”
“마린에게 그대 같은 친구가 있어 다행이야. 정말 고마워.”
수수하게 웃은 달리는 잠깐 기다리라 하곤, 그녀의 키보다 크고 뚠뚠한 귀여운 연보라색 악어 인형을 가져와 내게 건네줬다. 이거 껴안고 자면 딱일 사이즈다.
“비록 보잘것없는 솜씨지만 황자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수면에 도움이 되는 은은한 향이 나도록, 말린 라트리카 꽃잎과 수로카 꽃잎을 인형 안에 넣었습니다. 사용한 천도 부들부들해서 안고 자면 편하고 좋을 것입니다. 어제 막 완성한 새 제품입니다!”
헉, 너무 좋다. 사실 안고 잘 베개가 필요하긴 했다. 게다가 품에 딱 맞을 사이즈와 중독될 것 같은 부들부들한 촉감, 내 취향을 저격하는 귀여운 인형이다. 달리는 오늘 날 처음 봤을 텐데 어떻게 알고 이런 걸 주는 거지?
“마린이 황자님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황궁에 계셨을 때, 항상 아멜로 잎으로 수면을 취하셨다고. 주제넘지만 이것이 황자님의 수면에 도움이 될까 해서….”
“주제넘긴, 정말 고맙네. 오늘부터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아.”
그동안 마린이 내 걱정을 많이 했나 보다. 달리도 참 착한 친구다. 그냥 ‘그랬구나, 황자님이 고생이네.’라고 맞장구만 쳐도 됐을 텐데 이렇게 수고스럽게 인형도 만들어 주고. 천성이 착한 사람인가 보다. 달리에게 정말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방을 내줄 테니 나중에 저택에 놀러 오라 권했다.
달리에게 인사를 한 뒤, 인형 가게를 나오자 슬슬 배가 고파졌다. 아까 지나쳤던 그라탕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노반이 가장 보여 주고 싶어 했던 과일 가게를 찾았다.
노반은 베리 말고도 단것이라면 환장을 했다. 파인애플도 좋아했고, 복숭아, 사과, 바나나, 오렌지, 딸기 등등 단맛이 나는 과일이라면 가리는 것 없이 전부 좋아했다. 단, 자몽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단맛은커녕 시고 쓴맛이 난다고 전부 젠에게 넘겼다. 젠은 편식하면 좋지 않다고 말하면서 노반이 내팽개친 자몽을 대신 먹어 줬다. 젠은 노반한테만 츤데레다.
과일 가게에 들어가기 전, 노반은 상냥한 과일 가게 주인에 대해 알려 줬다. 주인 ‘형아’는 감기에 걸리지 않고 가게에 나와 있었으면 좋겠다며 내 목을 끌어안았다. 어떤 놈팡이길래 우리 노반이 보고 싶어 하는 건지 얼굴이나 보자고, 당당한 걸음으로 과일 가게로 들어갔다.
가게 주인은 나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남자였다. 당당하게 들어간 것과 다르게 주인 ‘형아’의 얼굴을 보고 순간 가게를 잘못 들어온 줄 알고 다시 나갈까 망설였다. 남자는 화려하게 빛나는 금색의 머리칼과 푸른 바다가 담긴 눈동자를 갖고 있었고, 딱 붙은 갈색의 상의 위로 의외로 단단한 잔 근육이 비쳤다. 뭐야, 티비에서 봐야 할 것 같은 미모가 어째서 시골 마을 과일 가게 주인을 하고 있는 거지?
“형아! 나 왔어!”
노반은 과일 가게 형아가 반가운지 그 어떤 때보다 밝게 인사를 건넸다. 방금까지 다른 상인들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극강의 친근함이 느껴졌다. 남자는 노반을 안고 온 나와 눈이 마주치자 놀랐는지 잠시 굳었다. 곧이어 바로 정신을 차리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세네카의 4황자를 뵙습니다.”
“아, 반갑네.”
남자는 내게 미소를 짓고는 잊고 있던 노반의 인사를 받아 줬다.
“노반, 오랜만이네. 저번에 준 포멜로는 어땠어? 별로지?”
“완전 별로였어!”
“하하하, 그래서 말했잖아, 네가 안 좋아할 거라고.”
“그치만 미르 머리색이랑 똑같은걸.”
“아아, 그래서 그렇게 고집을 부렸던 거였어?”
포멜로는 자몽을 뜻한다. 항상 달달한 과일만 사 왔던 노반이 뜬금없이 씁쓸하고 신맛이 나는 자몽을 사 온 게 신기하긴 했었는데 내 머리색과 비슷해서 사 온 거였단다. 비록 먹지는 못했지만 내 생각을 하며 자몽을 사 온 노반이 기특해 꽉 껴안아 줬다.
“노반, 내 생각 해 준 거야? 너무 고마워.”
“미안해. 미르 생각해서라도 다 먹고 싶었는데 너무 맛이 없었어. 그건 미르랑 달라.”
노반은 내게 안긴 채 내 머리카락을 만지며 자몽이 얼마나 쓰고 맛이 없는 과일인지 줄줄 늘어놓았다. 기대한 만큼 실망도 큰 법이다.
“아! 미르! 여기는 과일 가게 주인 형아야. 나한테 항상 맛있는 과일을 알려 주는데, 형아가 준 건 다 맛있어.”
확실히 노반과 마린이 시장에 다녀올 때마다 과일을 한가득 사 왔는데, 사 온 과일 전부 맛있었다. 당도도 적당하고, 식감도 좋았고, 향까지 좋았다. 그게 전부 저 남자가 골라 준 거라 이거지?
“시아니스라고 합니다. 편하게 시아라고 불러 주세요.”
“그대도 편하게 미르라 부르게.”
“어찌 제가 감히 황자님의 존함을….”
“괜찮네, 그대는 노반이 좋아하는 이가 아닌가.”
“아… 네, 알겠습니다, 미르 님.”
미르 님. 젠이 나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내가 다른 곳에서 온 사람인 걸 알게 된 후부터는 당신 혹은 황자님이라 불렀다. 아마 신경 써 주는 것일 테지. 아무리 도브로미르의 몸 안에 들어와 있다고 해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처음 시아의 금색 머리칼을 봤을 때, 고아한 젠의 눈동자가 생각났다. 이것도 중증이네.
“당도와 과즙이 꽉 찬 과일을 찾고 있네만, 도와줄 수 있겠는가?”
“따로 쓰일 곳이 있습니까?”
“설탕과 꿀을 사용해 절여 먹을 생각이네.”
“아, 그런 거라면… 조금 더 익은 과일이 좋을 듯합니다.”
노반이 좋아하는 과일과 내가 과일청으로 만들고 싶어 했던 과일을 알려 줬다. 매실, 유자, 키위, 석류, 사과, 오렌지, 자몽, 복숭아, 파인애플, 레몬 등등. 청으로 만들 수 있는 과일이라면 전부 구입했다. 이대로라면 우리 집이 과일청 장사를 해야 할 판이다.
“고마워, 덕분에 맛있게 만들어질 것 같아.”
과일을 고를 동안 시아와 친해져 편하게 말을 놓기로 했다. 노반이 과일을 이렇게 좋아하는데 한두 번 볼 사이도 아니고 나이도 비슷한 것 같으니 그냥 편하게 대하겠다고 하자 그래도 자신은 평민이니 존댓말을 쓰겠다면서 편하게 대해 주셔서 감사하다며 상냥하게 웃어 줬다.
내 촉이 말하는데, 너는 평민 아니야. 물론 얼굴이 평범하지 않다는 이유도 있지만, 언행이 딱 귀족의 교육을 받고 자란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