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북쪽 땅으로 쫓겨나다 (17)
“형아! 이거 진짜 맛있다!”
나와 시아가 심각한 얼굴로 과일을 고르고 있을 때,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노반에게 바나나 하나를 쥐어 줬다. 정말 맛있는 바나나라며 한입 먹어 보라 권하는 노반이 너무 귀여워 장난칠 겸 한입 크게 뺏어 먹었다. 아무 기대 없이 먹은 바나나는 그동안 먹어 왔던 텁텁한 바나나와 다르게 달고 부드러운 과육을 가진 특별한 맛이었다.
노반은 내가 너무 많이 뺏어 먹어서 놀랐는지 순식간에 반이나 사라진 바나나를 멍하니 바라봤고, 그에 소리 내어 웃은 시아가 노반에게 하나 더 쥐어 줬다. 덕분에 바나나 한 송이도 같이 샀다.
오늘 시아의 과일 가게는 내가 다 거덜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시아는 맛있는 과일만 짧은 기간 동안 수입해서 파는데 막무가내로 파는 게 아니라 정말 맛있는 과일만 팔아서 양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하루에 손님 열 명이 오면 영업을 끝내야 하는 정도? 덕분에 없는 과일도 몇 개 있었지만, 원했던 과일은 전부 샀다.
노반의 밝은 인사를 받은 시아는 그만큼 빛나는 미소로 인사를 돌려줬다.
“고마워. 도움이 많이 됐어.”
“도움이 되셨다니 영광입니다. 노반, 미르 님 힘들지 않게 옆에서 잘 도와드려야 한다?”
노반에게 나를 잘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받아 낸 시아는 우리가 떠나기 전, 하얀색의 꽃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건네줬다.
“페라 꽃입니다. 저희 집 뒤편에 페라나무가 자라는데, 오늘 꽃이 피었길래 잔뜩 땄습니다.”
“뭐야, 이런 건 정인에게 줘야 하는 거 몰라?”
“하하, 저에겐 따로 정인이 없으니 오늘 만난 좋은 인연에게 드려야지요. 예쁘게 장식하셔도 좋고, 꽃을 통으로 말려 차로 마셔도 좋습니다.”
꽃 선물은 내가 아닌 정인에게 해야 한다는 장난스러운 말에도 부드럽게 웃은 시아는 좋은 인연에게 드리는 선물이라며 부담 갖지 말고 받아 달라 했다. 저 얼굴에 이런 센스를 가지고 있는데 정인이 없어? 어떻게 없을 수가 있지? 나처럼 결함이 있나?
“고마워. 잘 말려서 차로 마실게. 쓰지 않아서 노반도 마실 수 있겠다. 나중에 또 올게.”
시아에게 받은 꽃바구니는 아공간 주머니에 넣지 못했다. 바구니를 덮을 것이 없어, 주머니에 넣으면 다른 물건들에 이리저리 치이다 흩어질 게 뻔했다.
꽃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곱게 들고 마차를 운전할 마커스를 찾아다녔다. 상점가 입구 주변에 있겠다던 마커스는 털끝 하나 보이지 않았다. 노반과 여러 가게를 둘러보며 마커스를 찾았는데 어디 있나 했더니 액세서리를 파는 가게에 있었다.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릴까 고민해 봤지만, 마커스가 나올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아 그냥 안으로 들어갔다. 마커스의 시선은 노란색의 보석이 달린 귀걸이와 붉은색의 보석으로 꽃을 표현한 브로치에 가 있었다.
“마린은 귀걸이를 하지 않아. 브로치 쪽이 좋겠군.”
“화, 황자님…!”
“얼른 계산하고 이만 가지.”
“헛! 시간이 언제 이렇게….”
분명 아침에 나왔는데, 저녁 먹을 시간이 지나 있었다. 노반을 따라 가게를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주워 먹었더니 배가 고픈지도 몰랐나 보다. 젠이랑 마린은 저녁 잘 챙겨 먹었으려나. 오늘 샤브샤브 해 먹기로 했는데.
브로치를 계산하고 나온 마커스는 정말 미안한 표정으로 해가 져서 마차로는 움직이기 힘들다며 오늘은 마을에서 주무시고 내일 아침에 가는 게 어떻겠냐 물어 왔다. 딱히 상관은 없지만 마린과 젠이 걱정할 게 걸렸다.
“어쩔 수 없군. 근처에 여관이 있나?”
“괜찮으시다면 저희 집으로 오십시오!”
“아닐세. 그대가 불편하지 않겠나.”
“손님방이 제대로 있습니다. 전혀 불편하지 않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손님방도 따로 있다 하고 저녁은 먹지 않아도 배부르니 조금 불편해도 마커스의 집에서 하룻밤 묵어도 괜찮겠다.
노반은 낮잠 시간을 건너뛰어서 그런지 슬슬 눈꺼풀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앞장서 걷는 마커스에게 페라 꽃바구니를 넘기고 꾸벅 고개를 떨구는 노반을 조심히 안아 들었다. 안기자마자 바로 내 어깨에 기대 눈을 감은 노반의 등을 약하게 토닥여 주며 재웠다. 시장에 처음 가는 나를 위해, 자주 왔던 자신이 구석구석 구경을 시켜 준다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빨빨거리더니 많이 피곤했나 보다.
마커스의 집은 상점가와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꽤 거대한 2층집이었는데, 1층 끝 방이 가장 잘 꾸며진 손님방이라며 나와 노반을 안내해 줬다. 두 명은 거뜬히 잘 수 있는 침대와 간단한 가구들이 있었다.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바로 잘 거니 내일 아침에 보자며 마커스를 보냈다.
방 안에 따로 있는 욕실에 꾸벅꾸벅 조는 노반을 데려가 씻겼다. 수건으로 물기를 털어낸 노반을 침대에 눕혀 주고, 나도 빠르게 샤워를 마쳤다. 항시 아공간 주머니에 들어 있는 잠옷을 꺼내 입고 푹신한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노반 덕분에 너무 재밌는 하루였어. 정말 고마워.”
“낑….”
피곤해 자는 와중에도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여우의 모습으로 변한 노반은 짧게 대답을 하곤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 * *
눈을 뜨니 보이는 것은 얼음 색의 털이었다. 진작 잠에서 깼는지 팔팔해 보이는 노반의 얼굴이 내 눈앞까지 와 있었다. 아침부터 내 심장을 혹사시키려고 작정했나 보다. 귀여워.
“미르!”
“우리 귀여운 노반이네. 잘 잤어?”
“응! 일어나! 젠이 왔어.”
“젠?”
아직 비몽사몽한 상태지만 잠옷 소매를 잡고 질질 끄는 노반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반의 안내를 받으며 거실로 나가니 덜덜 떨고 있는 마커스와 그 앞에 앉아 고상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는 젠이 있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지?
“젠?”
“황자님.”
“어, 어어… 웬일이야?”
“모시러 왔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마커스는 젠에게 크게 혼나기라도 했는지 내 눈치를 슬쩍 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자기보다 어린 사람한테 혼나고 벌벌 떠는 어른이라니, 마치 내 미래 같은걸? 하하.
그보다 젠에게 혼이 났다니, 아예 무시하는 거면 몰라도 화낼 사람으로는 안 보이는데. 항상 차분한 젠이 성질내는 것도 보고 싶다.
“그… 시간이 늦어져서.”
“노반한테 들었어요.”
“그랬구나. 빠르네.”
“이제 갈까요?”
“아, 응.”
크게 잘못한 건 없지만 왠지 무릎 꿇고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할 것 같다. 집에 못 들어간 건 미안하지만 내 잘못이 아닌걸. 그리고 내가 왜소하고 작고 남성이지만 과하게 예쁘고, 사랑스럽긴 하지만 어른인걸. 크흠.
어지간히도 크게 혼났는지 젠의 눈치를 보며 덜덜 떠는 마커스에게 다음에 또 보자는 인사를 한 뒤 집 밖으로 나가는 젠을 따라나섰다. 노반은 먼저 나와 젠의 흑마 위에 올라타 있었는데, 저놈의 흑마 내가 탔을 때는 지옥의 콧김을 뿜으며 온몸으로 마음에 안 든다는 표현을 했으면서 노반이 올라타니 이렇게 안정될 수가 없을 정도로 안정되어 있다. 차별 쩌네, 진짜. 근데 우리 또 저 말 타고 가는 거야? 그냥 마커스한테 마차 몰아 달라고 하면 안 될까?
“또 말 타고 가?”
“네.”
“…나 쟤 무서운데.”
흑마가 무섭기는 하지만 젠만큼은 아니다. 그와 말을 탈 만큼 가까이 붙어 있고 싶지 않다. 뒤에서 느껴지는 다정한 온기도 서럽고, 떨어지지 않게 잡아 주는 손도 서럽고, 차였는데 줏대 없이 뛰는 내 심장도 서럽다.
말이 무섭다는 핑계로 어기적거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젠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더니 손을 뻗어 자신의 손과 내 손을 겹쳐 잡곤 흑마의 갈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안 무섭죠?”
“무서워.”
“그때는 심술부린 거예요.”
겹쳐진 손으로 갈기를 쓰다듬다 흑마가 놀라지 않게 천천히 얼굴 쪽으로 손을 옮겼다. 흑마의 투명한 눈에 그와 내가 비쳤다.
“마린이 많이 걱정하고 있어요.”
“마린이?”
“네. 잠도 잘 못 잔 것 같던데, 얼른 가서 안심시켜 줘야죠.”
흑마를 쓰다듬던 손을 떼어 내곤 그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내 옆구리에 손을 끼워 흑마의 안장 위로 올려 줬다. 저번처럼 순식간에 시야가 바뀌었다. 먼저 올라타 있던 노반은 주변을 돌아보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뒤, 작은 여우로 변해 내 품에 안겼다. 그래, 너라도 같이 있어서 다행이다.
젠은 여우로 변한 노반을 힐끔 보고는 내 뒤에 올라타 흑마를 출발시켰다. 저번과는 다르게 느긋한 속도로 걷고 있어 다행히 입을 열 수 있었다.
“그… 젠, 너도 많이 걱정했어?”
“네, 어디서 길을 잃고 헤매고 계시지 않을까 걱정 많이 했어요.”
“에이,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내가 너보다 몇 년은 더 살았…지.”
“그래요?”
“….”
그러고 보니 젠이 몇 살이더라. 스무 살은 넘었겠지, 아마 스물셋 정도 됐으려나. 많이 쳐 줘야 스물여섯인데. 물론 스물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동안이긴 하지만, 스물은 너무 어리지? 내가 나이가 있는데. 아니, 대차게 까였는데 나이가 뭔 상관이야. 어른이 되어도 꼰대가 되진 말자.
괜히 어색해져 젠의 눈치를 봤다. 그는 그런 나를 눈치채고, 피식 웃어넘기며 나와는 다른 차분한 태도를 보였다. 넌 어른이구나. 난 어른의 탈을 쓴 꼰대고.
“당신이 살던 곳은 어떤 곳이었어요?”
“조…. 아니, 많이 별로야.”
“뭐가요?”
“이것저것 전부. 돈 없으면 못 사는 세상?”
“돈…. 그건 여기도 같지 않아요?”
“여기랑은 많이 달라. 돈 있는 놈들이 다 해 먹거든. 아, 그건 비슷하려나. 그래도 내가 살던 곳은 정도가 없었어.”
외모지상주의를 넘어선 황금만능주의, 돈이 있으면 뭐든 가능했다. 민주주의를 따르는 법치 국가여도 뉴스에선 어느 국회 의원이 이랬네, 모 기업 회장 손주가 그랬네, 등등 말이 많았다. 하지만 진짜 나쁜 놈들은 알려지지도 않고 편하게 살아 숨 쉬고 있는, 그런 더러운 곳에서 뼈 빠지게 살다가 죽는 게 태반인 세상.
“당신은 어떻게 살았어요?”
궁금해서 묻는 걸까, 할 말이 없어서 묻는 걸까. 조금이라도 나한테 관심을 가져 줘서 고마워해야 할지, 왜 다정하게 대해 주냐 화를 내야 할지 모르겠다. 전부 모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