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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먹고 싶어요-32화 (32/227)

32. 북쪽 땅으로 쫓겨나다 (18)

“궁금해?”

“네.”

“왜?”

“제가 모르는 세계니까요. 당신이 어떻게 살다 이곳에 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미워하는 사람이 어떻게 살다 왔는지는 왜 궁금하다는 걸까. 그것 또한 모르겠다.

“죽을병에 걸렸었어. 심장이 많이 아팠거든. 중학교… 그러니까 열다섯 살 때.”

“….”

“지칠 때까지 아프고, 수술하고, 울고…. 그냥 그렇게 살았던 거 같아. 그리고 더 이상은 못 하겠다 포기하려 했을 때 어떻게 운이 됐는지 이식 수술을 할 수 있었어.”

“이식 수술이요?”

“음, 쉽게 말해서 내 심장을 다른 사람의 심장으로 교체하는 거야. 내가 살던 곳은 의학 수준이 높거든. 여기선 이해 못 하는 그런 게 많아.”

대충 알아들을 수는 있다고 계속 말해 달라는 젠에게 어디까지 말해 줘야 하나 고민했다. 노반은 내게 안겨 자고 있었고, 흑마도 적당한 속도로 걷고 있었다. 노반을 핑계 대고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젠에게 거짓말을 하는 건 싫었다.

“병원에서 친하게 지냈던 남자가 있었어. 나보다 형이었는데, 그 형은 나보다 더 어렸을 때부터 아팠대. 나랑 비슷한 처지고, 병실도 가까워서 그 형이랑 친하게 지냈는데….”

형이 생긴다면 그 사람이었으면 좋을 정도로 형을 따랐다. 부모님은 바빴고, 중학교에서 사귄 친구들은 고등학교에 올라가자 연락이 소원해졌다. 그렇게 무기력한 외톨이로 병원에서 지낼 때, 형이 다가왔다. 형은 나와 다르게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보내는 사람이었다. 침대에서 움직이지 못할 땐 책을 읽거나 공부를 했었고,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날에는 밖으로 나가 유명한 곳을 찾아다니며 그곳의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찍힌 사진들은 흑백 사진으로 인화되어 내 병실에 붙여졌다. 어째서 컬러가 아닌 흑백이냐 묻는 내 질문에 형은 말했다. ‘사람은 색으로도 감정을 느낄 수 있대. 나중에 네가 건강해져서 저 사진에 나와 있는 곳을 돌아다니면서 좋은 감정을 느꼈으면 좋겠어.’ 그때의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계속되는 수술에 지쳤고,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냐며 형에게 투정 부리기 일쑤였으니까. 그 투정에 형은 내 눈을 마주 보고 말했었다. ‘내가 본 색을 너도 봤으면 좋겠다.’라고.

운 좋게 성사된 이식 수술이 끝나고 멀쩡해진 심장으로 형이 찍었던 사진에 나온 명소들을 가 봤다. 행복했다. 이게 사는 거구나. 형이 말했던 색으로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 것도 같았다. 검정고시를 치르고 늦게나마 대학에도 들어갔다. 심장이 아팠던 때는 전부 잊고 즐겁게 지냈었다. 형이 생각난 건 아주 뒤였다.

형은 아팠다. 일어나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으며, 산소 호흡기를 달고 죽은 듯 수면 상태에 빠져 있었다.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예전의 형은 금방이라도 털어내고 일어나 여기저기 쏘다닐 것 같았는데, 그때의 형은 걷기는커녕 숨이라도 쉬면 감사할 지경이었다.

형의 부모님이 내게 매달려 울며 말했다. 5년 전, 형의 이식 수술이 정해졌을 때 형은 일부러 몸을 망쳐 수술을 하지 않았고, 덕분에 내가 수술을 하게 됐다고. 그제야 알았다. 난 형의 목숨을 받고 살아난 거다.

“그렇게 살다가 악마 만나서 여기로 온 거지.”

“그럼 당신은 악마한테….”

“형 살렸어. 형 살려 주면 가겠다 했거든.”

“….”

“나 대신 죽으려던 놈 살리고, 나는 여기서 4황자가 된 거지.”

겁쟁이 4황자는 볼모의 신분과 퍼디스를 벗어나기 위해 악마를 불렀고, 악마는 그 영혼을 먹기 위해 내 영혼을, 나는 형을 위해 이곳에 왔다.

형을 살리고 이 세계에 온 건, 형에 대한 죄책감보단 멍청했던 어린 날의 속죄다. 이식 수술을 받지 않으려 몸을 망친 형의 결정은 내 살고 싶다는 투정에 흔들렸기 때문이니까. 일찍 철이 든 형은 철없이 어린 내게 무모한 어른이 할 법한 양보를 했던 거다.

그래서 젠에게는 미안한 감정이 크다. 나는 젠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살고 싶었으니까. 오만하게, 주제도 모르고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했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미안. 전에도 남의 목숨으로 살았었는데, 이번에도 남의 목숨으로 살려고 했어.”

“사과하지 마세요.”

“응, 할 자격도 없지.”

심장이 시큰했다. 젠은 흑마의 속도를 빠르게 올렸다. 사과도 하지 말고, 말도 하지 말라고.

노반은 빠른 속도에도 내게 딱 붙어 잠을 자고 있었다. 이런 아슬아슬한 곳에서 잠이 오다니 노반도 대단하다. 젠은 노반을 꽉 붙잡고 있는 나를 확인한 뒤 고삐를 강하게 쥐고 흑마의 속도를 더 올렸다. 그는 몸을 당겨 내 귓가에 가까이 붙어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젠 모르겠어요. 당신을 미워하고 있는 건지, 그저 미워할 사람이 필요한 건지.”

“….”

“어제 당신이 들어오지 않아서 걱정했어요. 해가 지고 바로 당신을 찾으러 갈 정도로요.”

“뭣…. 윽!”

오늘 아침이 아닌 어젯밤부터 찾으러 다녔다는 그의 말에 깜짝 놀랐다. 왜 그랬냐고 말하려다 혀를 씹었다.

“말했죠, 달리는 말 위에서 말하면 혀가 끊어질 수도 있다고.”

아는 놈이 속도를 올려? 저번에도 그렇고 은근 막무가내다. 대답을 듣지 않으려고 말을 타면서 이야기하는 남자는 전 세계에 이 남자밖에 없을 거다. 그는 고삐를 한 손으로 잡고, 자유로워진 오른손으로 내 턱을 부드럽게 그러잡았다. 또 고개를 올리려 하나 생각했지만,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그의 손가락은 내 입술을 향했다.

도톰한 입술을 문대며 벌리고는, 작게 벌려진 입 안으로 손가락을 넣었다. 안으로 들어간 그의 손가락이 다물린 잇새를 벌렸고, 내 말랑한 혀에 닿고 나서야 그것을 빼냈다.

“피는 안 나네요. 많이 아파요?”

“므츤그으느으즌쯔?”

미친 거 아니야 진짜…? 얘는 확인을 뭐 이렇게 해?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 않은 것 같은데 당한 나만 민망해 죽겠다. 얼굴이 새빨개졌다. 젠이 내 얼굴을 볼 수 없는 뒤에 있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안 미쳤어요. 혀는 세게 물면 피가 안 멈추는 경우가 많으니 빠르게 응급처치를 해야 돼요.”

“그르드! 으근 느므으승흐즈느!”

“…알았으니까, 나중에 말해요.”

이러다간 말 위에서 손도 잡고, 뽀뽀도 하고, 키스도 하고, 그것도 하고, 그것도 하고, 그것도 하겠다. 다음부터는 절대 젠과 말을 타지 않을 거다. 이놈의 흑마만 타면 음란 마귀가 달려드는 기분이다. 내가 승마를 배우든가 해야지 원.

젠의 민망한 확인 행위로 인해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저택에 도착했다. 저택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마린을 보자 곧바로 얼굴이 새하얘졌다. 내 걱정을 얼마나 한 건지 턱까지 내려온 다크 서클, 산발이 된 머리, 푸르뎅뎅한 입술. 그리고 북쪽으로 쫓겨난 날부터 매일매일 다른 옷을 갈아입는 낙으로 살던 마린이 어제와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마, 마린….”

“황자님!”

“마린, 꼴이 왜 이래? 어디 아파? 왜 똑같은 치마를 입고 있어?”

“황자님이야말로 괜찮으신 거죠? 돌아오지 않으셔서 얼마나 놀랐는지.”

빠르게 달려온 흑마를 안정시킨 뒤, 젠이 먼저 내려 마린을 보고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안전하게 잡아 내려 줬다. 발이 땅에 닿자마자 마린에게 달려가 내 안전을 확인시켰다.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 돌아 다친 곳 없고, 열도 없으며, 이상한 생물도 데려오지 않았다고 확실히 확인받았다. 그에 조금 안심한 듯한 마린은 우리를 데려간 마커스를 향해 화를 내기 시작했다.

“마커스는 뭘 했길래….”

“아니, 마커스가 아니라… 내가 신나서 돌아다니다가 늦은 거야.”

돌아오지 못한 이유가 마린에게 선물로 줄 치장품을 고르다 늦었기 때문이라는 걸 알면 마커스는 마린에게 고백은커녕 말도 못 붙일 게 뻔하기 때문에 내가 잘못해서 늦었다고 잘 둘러말했다. 마커스 너 나한테 잘해야 돼, 알어?

“아! 배꽃!”

“네?”

“시아가 페라 꽃을 선물로 줬는데, 마커스 집에 놓고 왔어.”

페라 꽃, 하얀색의 배꽃이 한가득 담긴 바구니는 마커스의 손님 방 테이블에 놓여 있을 거다. 젠이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에 챙길 정신이 없었다. 생각해서 챙겨 줬을 텐데 두고 온 게 너무 미안하다.

“시아라면…. 아! 과일 가게 청년 말씀하시는 건가요? 잘생겼죠?”

“응, 잘생겼더라. 왕자님같이 생겼던데.”

“엇, 어떻게 아셨어요? 그분 왕자님 맞아요.”

“응…?”

“아스본 왕국의 왕자님이세요. 제 기억이 맞는다면 다섯째였나… 아마 그럴 거예요.”

흔한 평민 엑스트라의 미모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왕자님이 왜 거기서 나와?

아스본 왕국이라면 세네카 제국과 제일 가까이에 있고, 왕의 정조 관념이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만큼도 못해서 갈아치울 왕족이 넘쳐난다는 그 아스본 왕국이었다. 운 좋게 값비싼 보석이 많이 묻혀 있는 철광산이 있어 넘쳐나는 왕족 모두가 호화롭게 지낸다는 아스본 왕국의 왕자가 왜 프레오나 제국 북쪽 마을에서 과일 가게를 하고 있는 거야?

“마린이 알고 있다는 거 시아도 알아?”

“네, 저번에 물어봤어요. 비밀로 해 달라 해서 말하진 않았지만, 황자님이라면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

“생각해 보니 그러네. 금발에 파란 눈, 아스본 왕족의 특징이잖아.”

“연회에서 뵈지 않았을까요? 아스본 왕국은 세네카 제국과 가까우니 왕래가 잦았을 것 같은데.”

4황자의 기억을 이리저리 살펴봐도 시아에 관한 기억은 없다. 아, 그의 누나의 기억이라면 있다. 메이븐의 옆에 딱 붙어 있는 4황자에게 다가와서는, 강한 아우라로 저리 꺼지라 했었지. 4황자는 괜히 쫄아서 주춤거렸고, 메이븐의 시종이 나서서 그녀를 쫓아냈었다. 생각해 보니 메이븐도 인기가 많았다. 황제와 제일 닮아 황자들 중 가장 잘생겼고 능력도 좋으니. 황태자인 로이븐을 노리다가 실패하면 메이븐으로 갈아타는 영애들이 꽤 많았었다.

“그의 누이는 기억하고 있어, 시아는 모르지만. 왜 왕궁을 나왔을까?”

“무슨 사정이 있던 거겠죠.”

“그런 거겠지.”

집 나온 왕자라…. 일찍부터 독립하고 철들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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