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자님 먹고 싶어요-33화 (33/227)

33. 북쪽 땅으로 쫓겨나다 (19)

어제 상점에서 사 온 것들을 식탁 위에 늘어놓았다. 부탁받은 책과 설탕, 꿀, 쌀. 몇 개 사지 않았지만 대용량으로 몇 포대씩 사서 그런지 큰 식탁이 꽉 찼다.

시아의 과일 가게에서 사 온 과일은 진작 빼놔, 포폴라 잎을 말린 가루와 자스테 농축액을 황금 비율로 섞어 만든 천연 세제를 푼 물에 담가 놨다. 최상등급 과일이라 농약이 묻어 있진 않을 테지만 단맛이 나는 과일에는 벌레가 꼬이는 법이라 깨끗하게 씻어야 했다.

젠은 열심히 달린 흑마를 챙기러 마구간에 들어갔고, 마린은 내가 돌아오지 않는 동안 긴장하다 안심을 해서인지 피곤하다며 과일청 만드는 건 잠깐 눈을 붙였다가 도와주겠다고 했다. 노반은 잠에서 깨 텃밭을 확인하러 마당으로 나갔다.

요즘 노반의 생활 패턴은 집-텃밭-집의 연속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냉장고에서 알아서 베리를 꺼내 먹는다. 과즙이 가득 묻은 입술로 내게 달려와 뽀뽀를 해 준 뒤 텃밭을 보러 나간다. 아침을 먹고 나면 젠의 감시하에 공부를 하고, 공부가 일찍 끝나면 책 한 권을 읽고 점심을 먹는다. 점심을 먹은 뒤엔 티타임을 즐기는 우리의 옆에서 낮잠을 잔다.

잠에서 깨면 또 텃밭을 보러 나간다. 저녁을 먹기 전까지 텃밭을 돌보다, 저녁을 먹고 나면 그날의 설거지 담당을 도와 그릇의 물기를 닦는다. 목욕을 한 뒤, 자기 전 마지막으로 텃밭을 보러 나간다. 원하는 만큼 텃밭을 보다 저택으로 돌아오면 내 방으로 들어와 동화책을 읽어 달라 조르다 노반을 찾으러 온 젠에게 잡혀 그의 방으로 들어가 잠을 잔다.

텃밭에 보물이라도 숨겨 뒀는지 확인하러, 하루는 텃밭을 구경하는 노반을 구경하러 나갔다. 가만 보니 텃밭을 향한 노반의 애정은 나보다 더한 정성이었다. 땅이 마르지 않게 물도 적당히 주고, 단 한 마리의 벌레도 꼬이지 않게 작은 새싹의 주위를 감시했다.

그것을 제외하곤 눈도 깜박하지 않은 채 곧게 서 있어서 궁여지책으로 식물은 노래를 불러 주거나, 칭찬같이 좋은 말을 해 주거나, 재밌는 내용의 책을 읽어 주면 더 싱그럽고 맛있게 자란다는 뻔한 이야기를 해 줬다. 그리고 노반은 그날 이후로 책을 읽는 시간을 포함해 거의 모든 시간을 텃밭에 쏟아부었다.

“잘한 건지 모르겠네.”

“무엇을요?”

뽀득뽀득 소리가 날 정도로 과일을 씻고 있는데 귓가에 젠의 목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 돌아본 곳에는 편한 옷차림의 젠이 순진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깜짝이야.

“노반 말이야.”

“노반이라면 지금 텃밭의 채소들에게 노래를 불러 주고 있어요.”

“하, 저걸 찍어 놔야 하는데. 카메라가 없는 게 천추의 한이다.”

“카메라…. 영상 구슬 같은 건가요?”

“응. 정확히 말하면 몇천 개의 영상 구슬을 하나로 합친 거랄까.”

아공간 주머니에 영상 구슬이 몇 개 있긴 했다. 영상 구슬은 세네카의 황실 마법사가 만들어 낸 마법 물건인데 조금 흐릿하게나마 상황을 찍어 저장하는 물건이다. 장점은 상황을 저장할 수 있다는 것이고, 카메라라는 기똥찬 물건을 알고 있는 내가 영상 구슬에 느끼는 단점은 아주 많았는데,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1. 화질이 오래된 필름 카메라 같다. 2. 영상 구슬 한 개에 딱 한 장면만 담을 수 있는데 길어야 1분이다. 3. 1회용이다. 4. 유리로 만든 것이라 깨지면 말짱 도루묵. 5. 너무 크다. 6. 무겁다. 7. 어두운 곳에서만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쓸데없다는 거다.

하나 써 보긴 했다. 노반이 라즈베리를 짭짭대며 먹는 것과 그걸 지켜보는 젠을 찍은 영상 구슬이 아공간 주머니에 들어 있다. 단 한 번만 볼 수 있으니 아껴 뒀다 죽기 전에 봐야지.

“당신이 살던 곳은 신기한 게 많네요.”

“응, 많았지. 자동차, 스마트폰, 노트북, 티브이, 인터넷, 와이파이, 데스크, 체어, 이레이저….”

인터넷부터 생각나는 게 없었다. 정말 신기한 게 많다는 그의 시선을 피해 다시 과일을 씻는 데 집중했다. 유자, 레몬, 오렌지, 딸기, 블루베리, 사과 순으로 씻었다. 남은 파인애플과 자몽, 복숭아, 석류, 키위는 껍질만 따로 까면 되는 거라 씻을 필요가 없었고, 매실은 다듬는 과정이 손이 많이 가는 터라 조금 더 담가 놨다.

내가 과일을 씻는 동안 젠은 식탁에 앉아 단단한 석류 껍질을 갈라 알맹이를 분리하는 작업을 했다. 알맹이를 빼내는 기다란 손가락이 유려했는데, 저 손가락이 내 입술을 만지고 안으로 들어왔다 생각하니 머리에 열이 올라 터질 것 같았다. 이래서 일상생활 가능하겠냐. 피 끓는 청춘도 아닌데 창피하게 이러지 말자.

그는 그 많던 석류와 알맹이를 삽시간에 전부 분리하고 곧바로 선반에 꽂혀 있는 단도를 잡아 키위 껍질을 깎았다. 껍질에 과육이 최대한 남지 않게 깎았는데, 소름 돋을 정도로 깔끔했다. 검을 다루는 사람이라 그런가, 젠은 조각가를 해도 잘했을 것 같다.

껍질을 제거한 자몽과 깨끗하게 씻은 레몬, 오렌지를 일정한 크기로 얇게 썰어 안에 들어 있는 씨앗을 제거했다. 레몬을 자를 때 레몬즙이 튀어 눈에 들어갈 뻔했지만 다행히 긴 속눈썹이 막아 줬다. 십년감수했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정시킬 때 젠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름이 뭐예요?”

“응?”

“당신 이름이요. 불리는 이름이 따로 있다면서요.”

이름. 호적에 들어간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불리던 이름은 정확히 기억한다.

“도연….”

“도연?”

“응, 이도연. 성이 이, 이름이 도연. 짧게 ‘연이’라고 불렸어.”

“이도연…. 확실히 이곳과는 다른 이름이네요.”

“내가 살던 곳은 그런 느낌이야. 다른 나라에 가면 피터나 마커스…. 여기서도 있을 법한 이름 많이 있어. 내 이름은 발음하기 어렵나? 연, 도연. 아닌데.”

“할 수 있어요. 도연, 예쁜 이름이네요.”

“그치? 사실 여자애 이름이야. 내가 여자애인 줄 알고 할아버지가 도연이라 지었었어. 그리고 내가 좀 많이 예뻤거든.”

아기 때는 물론,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예쁜 외모로 관심을 많이 받았었다.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는 연예 기획사에도 몇 번 캐스팅 당했었고, 조금 과장해서 납치도 당할 뻔했다. 이런 면은 4황자인 도브로미르랑 비슷하다. 성격은 정반대지만.

“부를 이름이 생겨 좋네요.”

“도연이라 부르게? 마린이나 노반이 들으면 놀랄 텐데.”

“이미 다 알고 있을 거예요, 특히 마린은.”

“뭐? 아, 아니지. 그렇겠다. 티를 그렇게 냈는데 모르면 바보지.”

“잘 아시네요.”

“…그래도 이름은 미르로 불러 줘. 이 몸은 이제 내 몸인데 적응해야지.”

파인애플은 껍질을 깎아 중간 심을 제거하고 원통형으로 잘랐다. 복숭아는 보슬보슬한 껍질을 깎고 속 씨앗을 제거한 뒤 큐브 모양으로 잘랐다. 누가? 젠이. 내가 힘이 없어 단단한 파인애플 껍질 하나 못 자르고 고전하고 있는 꼴을 본 그가 대신해 줬다. 나는 완벽한 칼 솜씨를 자랑하는 젠 앞에서 조용히 남은 과일을 잘랐다. 유자는 난도질을 하는 것처럼 썰어 놨고, 딸기와 블루베리의 꼭지를 따고, 딸기는 대충 썰었다. 젠의 솜씨와 너무 비교되는데.

매실을 제외한 모든 과일을 다듬은 뒤 미리 소독한 유리병을 식탁 위에 늘어놨다. 2L가 조금 넘는 큰 유리병이었는데, 과일을 워낙 많이 사서 그런가, 2L도 조금 작은 것 같다. 적당히 살걸. 매실은 아예 장독대 사이즈다.

“잘 보고 배워!”

앞에 유리병을 하나 놓고 젠에게 과일청 담그는 법을 알려 줬다.

유리병 밑에 잘 다듬은 과일을 포개 넣고 그 위에 설탕과 꿀을 올린다. 그 위에 처음과 똑같이 과일을 올린 뒤 설탕과 꿀을 넣는 것을 반복한다. 과일과 설탕을 1:1로 넣는 것이 기본이고, 꿀은 충분히 넣어 주되 너무 많이 넣지는 말아야 한다. 내 거지 같은 설명을 한 번에 알아들은 젠은 유리병을 자신의 앞으로 가져와 자몽청을 만들기 시작했다.

“석류는 설탕이랑 꿀을 두 배로 넣어야 돼. 레몬 남은 거 조금 넣으면 좋은데 레몬이 남으려나. 아아, 파인애플이 제일 편해. 과육이랑 설탕이랑 섞은 다음에 쌓을 필요 없이 전부 밑에 깔고, 그 위에 설탕이랑 꿀 부으면 돼.”

내가 손이 덜 가는 유자, 키위, 딸기, 블루베리, 복숭아청을 만들 때 젠은 자몽, 파인애플, 석류, 레몬, 오렌지, 사과청을 만들었다. 속도 차이 무엇이지? 분명 내가 알려 주는 입장이고 나도 나름 열심히 했는데, 나보다 훨씬 빠르게 끝낸 그가 만든 과일청이 더 꼼꼼하고 예쁘게 쌓여 있었다. 도대체 못 하는 게 뭐야.

찻잔이 장식되어 있는 찬장 옆에 있는 선반 위에 완성된 과일청을 올려놨다. 유자, 레몬, 자몽, 키위, 복숭아, 딸기, 블루베리, 석류, 사과, 오렌지, 파인애플 순으로 장식했다. 색색의 과일청이 고운 빛을 뽐내고 있었다.

“이건 뭐예요?”

“아, 이건 시아한테 가져다주려고.”

1L도 안 되는 작은 유리병에 유자청을 따로 만들었다. 좋은 과일을 준 보답과, 배꽃을 준 보답, 그리고 노반을 아껴 주는 것에 감사 인사를 전할 겸, 유자 향을 좋아한다는 시아의 것을 만들었다. 물론 내게 소시지 베개를 선물한 마음씨 고운 달리의 몫도 따로 준비했다.

“아, 노반이 말했던.”

“노반이 시아에 대해 말했었어? 언제?”

“과일 먹을 때요. ‘과일 가게 형아는 대단하다. 항상 맛있는 과일만 준다.’라면서.”

“난 왜 한 번도 못 들은 것 같지?”

“미르 님은 귀 닫고 노반이 먹는 것만 보잖아요.”

그랬다. 과일을 우물우물, 뇸뇸뇸, 찹찹 먹는 노반을 보면 내 세상이 저 멀리 날아가는 듯했다. 너무 귀여워서 그것만 보게 된달까.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 흠! 매실, 매실 마저 만들고 밥 먹자.”

미리 담가 놓았던 매실을 빼냈다. 어마어마한 양이다. 매실액은 요리할 때도 쓴다지만 너무 대책 없이 많이 사 왔다. 10년은 먹겠는데?

“술도 담가야겠다.”

“술이요?”

“매실주라고, 그냥 조금 달달한 술. 젠은 술 좋아해?”

“약주 정도라면 좋아합니다.”

“다행이네. 이게 딱 약주로 마시면 좋은 술인데, 문제는 지금 담가도 1년은 있어야 돼.”

그때의 나와 네가 같이 있다면 마실 수 있겠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