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북쪽 땅으로 쫓겨나다 (20)
매실을 식탁에 올려놓고 다듬는 방법을 알려 줬다. 뽀득뽀득 잘 씻은 매실의 꼭지를 딴 뒤, 술로 만들 매실은 따로 남기고 청으로 만들 매실은 진액이 잘 우러날 수 있게 포크로 몇 번 찔러 준다. 그 많던 매실은 자다 일어난 마린이 합류하자 빠르게 사라졌다. 다른 과일청을 만드는 것과 똑같이 매실, 설탕, 매실, 설탕을 반복해 쌓았다. 몸뚱이만 한 유리병을 꽉 채우고 뚜껑을 덮어 주었다.
매실주는 매실을 넣은 통에 매실과 같은 비율의 설탕을 뿌리고, 하루 지나서 술을 넣으면 된다. 원래 술이란 게 오래 묵힐수록 맛있는 거라 잊고 살다가 언제 한번 생각날 때 마시는 게 제일이다. 2년은 묵혀야지. 뒷산에 산삼은 없으려나.
“아, 맞다. 마린, 나 어제 네 친구를 만났어. 달리라고 했나?”
“정말요? 낯을 많이 가리는 친구인데 용케 황자님과 만났네요.”
“마린이 내 걱정 많이 했다면서? 맨날 자기 전에 수면제 먹어야 잔다고.”
“네. 달리도 수면으로 고생을 했었다 하더라고요. 그래서 나아지는 방법 없냐 물어봤었어요. 황자님, 지금은 괜찮으시죠?”
“응, 지금은 멀쩡하게 잘 자.”
“다행이에요, 정말. 아무래도 프레오나 황궁의 기운은 황자님과 맞지 않아요. 이렇게 떠나온 게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과일청을 만드느라 엉망이 된 주방을 깔끔하게 청소하며 마린이 말했다. 프레오나 황궁이 서 있는 땅속엔 천년의 한이 서린 영혼들이 가득 차 있는 것 같다고. 다시는 나를 그곳에 보내지 않겠다는 마린의 포부가 느껴졌다.
“좋다니 다행이네. 그래도 난 조금 아쉬워. 내가 머물던 로테 별궁 지하에 보물이 있다 했거든.”
“보물이요?”
“응, 젠은 뭐 들은 거 없어?”
“전 황궁에 있는 시간보다 밖에 있던 시간이 많았어서 잘 모르겠네요.”
확실한 정보는 아니다. 술에 취했던 타루스가 스치듯 했던 말이었으니까.
[선대 폐하께서 아주 어렸던 내게 해 주신 말이 있었다. 그대가 머물고 있는 로테 별궁에 뭔가 희한한 것이 숨겨져 있다고 말씀하셨지. 뭐, 노망난 호랑이의 착각 같은 거겠지만. 아, 그대가 찾아보는 게 어떤가? 내가 놀아 주지 못할 땐 심심할 테니.]
바보 천치 같은 게, 지한테 피가 되고 살이 될지도 모르는 것을 허상이라 가볍게 넘기는 게 참 멍청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오스먼드가 알았다면 로테 별궁을 뒤집어서라도 보물을 찾았을 텐데.
당시의 나는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고, 최고 권력자인 오스먼드와 타루스의 눈치를 쌍으로 봐야 했을 때라 보물이고 뭐고, 그냥 그 별궁을 태워 버리고 싶었다.
“로테 별궁엔 지하가 없었어요.”
“맞아. 그래서 타루스도 가볍게 넘긴 걸 거야. 하지만 지하가 숨겨져 있다면 말이 다르겠지.”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곳엔 빈방이 많았으니까요.”
“응, 아마 통로가 따로 있었을 거 같아. 진작 둘러볼걸 그랬어.”
“거기서 나온 보물은 없어도 됩니다. 그런 끔찍한 곳, 다시는 생각하지 마세요. 그 개새끼의 성기를 찢어 버리지 못한 게 제게는 가장 큰 후회입니다! 그놈 낯짝은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겁니다.”
마린은 내가 타루스에게 겁탈을 당할 뻔했던 그때의 일을 생각하는 건지,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천천히 심호흡을 하는데도 결국 화를 참지 못해 서슬 퍼런 눈빛을 빛내며 도마 위에 올려진 과도를 쥐었다. 워워, 마린, 릴랙스.
타루스에게 안 좋은 일을 당한 다음 날, 황태자고 뭐고 타루스를 찾아가 그곳을 찢어 버리겠다는 마린을 극구 말렸었다. 당한 게 아니라 당한 척한 거라고 어르고 달래며 그놈 대가리도 몇 번 세게 때렸다 말했지만,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은지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암살 꼬챙이를 들고 흥분한 마린을 달래느라 진땀 뺐었다. 그립네. 맨날 단도랑 꼬챙이 들고 타루스와 오스먼드 욕을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묵묵히 주변을 정리하던 젠이 아직도 화가 나 있는 마린에게 조용히 말했다.
“어쩌죠, 그놈은 이미 제가 죽여 버려서.”
“늦게라도 가서 시체를 갈가리 찢었어야 했어요.”
“찢을 시체도 없을 거예요. 난도질을 해서 마물들 밥으로 던져 줬거든요.”
타루스 본인이 들으면 웃지 못할 이야기를 하는 젠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새겨졌다. 잘생긴 얼굴로 그런 무서운 말을 말하니까 더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나도 중증이다.
마린은 젠의 말에 조금 놀랐지만 곧이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타루스한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황제님을 제외하고도 산처럼 쌓여 있다고, 그러니 반인륜적인 일을 당했어도 그놈한텐 응당 당해야 할 일이라고.
“잘하셨어요. 그놈은 그래도 싸요.”
“이제 괜찮지? 타루스는 젠이 해결했으니까….”
“그 할배들 엉덩이도 찢어 버리고 싶었습니다.”
아, 귀족들도 있었다. 이미 몇 명은 꼬챙이에 찔렸을 거다. 간간이 ‘누구누구의 엉덩이에 이상한 쇠꼬챙이가 꽂혔는데, 의자에 앉으려다가 다쳤다더라.’, ‘누구누구의 오른쪽 발에 기다란 못이 박혔다더라.’ 등등 무서운 소문들이 돌았었다. 꽤 이름 있는 귀족들이 피해를 입었는데도 끝끝내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범인은 누구보다 철두철미한 사람이라 아무 흔적 없이 상대를 조져 놨을 테니까.
물론 난 범인이 누군지는 모른다. 그 꼰대들은 범인한테 감사해야 했다. 숨 쉬는 데엔 문제없고, 엉덩이 조금 불편하고, 발 조금 저는 정도면 싸게 먹힌 거다.
“왜 하필 엉덩이를 노리는 건가요? 없어서 불편한 곳이라면 팔이나 다리도 있는데.”
“그러게. 왜 엉덩이야?”
하고많은 부위 중 어째서 엉덩이를 노리는 거냐는 젠과 내 물음에 마린은 뭘 그렇게 당연한 걸 묻느냐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수치스러워 의사에게 못 보일 곳을 노려야 합니다.”
“아….”
큰 깨달음을 얻었다.
* * *
늦은 점심 겸 이른 저녁을 먹기로 했다. 놀랍게도 모두 첫 끼다. 과일청을 만드느라 시간이 많이 지나기도 했고, 다들 별것 아닌 일에 정신이 팔려 밥 먹을 생각을 못 했었다.
젠은 어제 저녁부터 나를 찾으러 돌아다니느라 먹지 못한 상태이고, 마린은 나를 걱정하느라 아침도 그렇고 음식 같은 음식을 먹지 못했다. 물론 노반도 나도 아침 일찍부터 끌려 나오느라 밥은커녕 콩 한 쪽도 보지 못했다. 그나마 과일청을 만들며 과일 몇 개 집어먹었지만 그것 빼고는 먹은 게 없다.
젠은 뒷산을 정찰하러 간다며 나갔고, 노반은 잠시 들어왔다가 물뿌리개와 천연 영양제를 들고 텃밭으로 다시 나갔다. 결국 남겨진 마린과 나는 든든하게 먹을 수 있는 저녁 메뉴를 고심했다.
“쌀도 있으니까 본격적으로 만들어 보자. 아, 너무 설렌다.”
쌀을 개봉하는 날이다. 반찬으로 무엇을 먹을지 생각하는 건 미뤄 두고, 우선 쌀을 씻고 밥을 안쳤다. 냄비 밥이라 조금 아쉽긴 하지만 이거라도 어디야. 나중엔 가마솥을 만들어 윤기 나는 밥을 지어야지. 보존 마법도 걸어 둬서 전기밥솥도 만들면 좋을 텐데. 장독대도 만들어야 할 테고. 에반스터 경, 너 언제 오는 거야? 이런 거북이 같은 놈.
“현조라는 이름의 소왕국에서는 아로즈가 주식이라 들었습니다.”
“현조? 처음 듣는데.”
“옛날에 사라진 왕국 중 하나입니다.”
“사라진 왕국…. 그럼 이제 없는 거네?”
“여기저기 흩어져서 찾긴 어려울 거예요.”
“어쩔 수 없지 뭐.”
조금 기대했다. 현조라는 이름도 동양의 느낌이 나고 무려 주식이 쌀이라는데, 프레오나와 세네카에선 먹을 수 없는 다양한 요리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사라진 왕국은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내게 중요한 건 ‘어떤 음식을 해 먹어야 오늘도 잘 먹었다.’라는 소리를 들을지다. 간장이나 고추장이 있다면 여러 가지 밥반찬을 해서 먹었을 테지만 장이 없는 지금은 밥이랑 같이 먹을 반찬이 딱히 생각나지 않는다. 어쩌지.
“뭘 먹어야 잘 먹었다 소문이 날까….”
“소문이요?”
“진짜 소문이 나고 싶은 건 아니고, 그냥 유행어 같은 거야. 많은 사람들이 인정할 만한 현명한 결정 같은.”
이젠 다 들킨 마당에 편하게 지내기로 했다. 노반의 언어 습관을 신경 써야 했기에 자극적인 단어는 쓰지 않을 테지만. 핵인싸, 명존쎄, 갑분싸는 정말이지 아득해진다.
냉장고에는 없는 거 빼고 다 있어서 어떤 메뉴든 생각하기만 하면 만들 수 있다. 돼지고기, 소고기, 닭고기, 염소고기, 고등어, 갈치, 조개…. 아, 조개탕 해서 먹을까. 칼칼한 조개탕이랑 간단하게 오므라이스 해 먹어야겠다.
첫 쌀밥을 오므라이스로 만드는 건 아깝지만, 진짜 쌀밥은 가마솥을 만들면 제대로 먹기로 하고 오늘은 오므라이스 먹을 거다.
“오므라이스랑 조개탕 해 먹자. 오므라이스는 밥이랑 채소랑 볶고, 그 위에 오믈렛을 덮는… 뭐 그런 건데 맛있을 거야.”
조개탕은 소주랑 같이 먹어야 하는데, 여긴 소주가 없다. 어쩔 수 없이 위스키나 와인과 함께 먹어야겠다. 조개는 해산물이니 백포도주랑 먹는 것도 나쁘지 않지.
오므라이스의 볶음밥을 만들기 위해 밥과 함께 볶을 채소를 마린에게 부탁했다. 양파, 감자, 당근, 버섯을 잘게 잘라 유채 기름을 두른 프라이팬에 볶다 잘 익은 쌀밥을 넣고 볶는다. 가장 기본인 볶음밥이 완성되고, 밥그릇 모양으로 널찍한 그릇에 담았다.
나는 조개탕을 끓이기로 했다. 해감한 조개를 빡빡 문질러 씻고, 파뿌리와 다시마를 우려낸 육수에 넣었다. 남기는 게 부족한 것보다 낫다는 신조에 따라 손이 커서 그런가 가득 쏟아 넣은 조개 덕분에 냄비의 육수가 넘쳤다.
“으악!”
“조금 더 큰 냄비를 꺼낼까요?”
“응, 그래야겠다. 다 먹을 수는 있으려나.”
“네 명이니까 충분할 것 같아요.”
하긴, 끼니를 거를까 말까 했던 내 짧은 입도 이곳에 온 이후부터 입맛이 돌아오면서 먹는 양을 늘려 가고 있고, 노반은 성장기의 드로이프라 웬만한 성인 남성보다 많이 먹고, 소식할 것처럼 보이는 젠도 주는 건 또 잘 먹는다. 의외였지. 마린은 슬로푸드 파이터다. 다들 많이 먹으니 그동안 남는다는 걱정 없이 음식을 대량으로 막 하긴 했었다. 이제 와서 걱정하는 것도 웃기지.
오므라이스는 호불호가 거의 없는 음식이니 다들 잘 먹을 것 같고, 조개탕은 남으면 내일 아침 리소토 해 먹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