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자님 먹고 싶어요-35화 (35/227)

35. 북쪽 땅으로 쫓겨나다 (21)

더 큰 냄비 안에 조개를 넣고 육수를 조금 더 붓고, ‘록타스’라는 허브를 넣었다. 상점가의 허브 가게에는 생각지도 못한 다양한 허브가 꽤 많았는데, 매운맛이 절실했던 나한테는 의외의 수확이 있었다. 록타스라는 허브는 청양고추랑 비슷한 맛을 냈다. 다 좋았지만 생으로는 먹지 못하는 게 흠이었다.

록타스는 우리 집 뒷산에도 있는데 강한 불에 볶아 수분을 없앤 뒤 서늘한 곳에서 반년 이상을 말려 독소를 없애야 먹을 수 있었다. 독소가 빠지면서 매운맛을 낸다고. 만드는 방법이 까다로워서 그런지 가격이 조금 많이 나왔다. 노반의 핵인싸력으로 할인을 받지 않았다면 사는 걸 고민했을 정도로 비쌌었다. 하지만 아쉬운 놈이 굽혀야 한다고, 간절했던 나는 고민은 했겠지만 결국 굽혔을 거다.

록타스를 넣은 조개탕은 칼칼한 맛이 나는 완벽한 술안주였다. 너무 맵지도 않고 적당한 매운맛. 매운맛이라니, 정말 감격스럽다. 이게 얼마만이야. 내가 조개탕을 간 보며 감동에 허우적거릴 때 마린은 내가 부탁한 데미그라스 소스를 만들었다. 망하면 케첩 뿌려 먹으면 되니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마린은 내 부족한 설명에도 그 어떤 데미그라스 소스보다 완벽한 것을 만들어 냈다.

마지막으로 볶음밥 위에 올릴 오믈렛을 만들어야 했다. 달걀을 풀고 채에 한번 걸러 부드럽게 만들었다. 그다음 우유 조금, 소금으로 간을 맞춰 준다. 프라이팬에 풀어 낸 달걀을 올리고 약한 불로 익히다 재빠르게 스크램블을 만든 뒤, 팬을 기울여 달걀을 한쪽으로 모아 손목 스냅을 이용해 통통하게 만들어 준다. 완성된 도톰한 아몬드 모양의 오믈렛을 볶음밥 위에 올려 준다. 그 위로 데미그라스 소스를 뿌려 주면 완성.

보통 같으면 그냥 대충 휙휙 만들어서 올렸을 테지만, 오랜만에 실력 발휘를 좀 해 봤다. 자취할 때 완벽한 오믈렛을 만들어 보겠다고 달걀 한 판을 다 깼던 기억이 있다. 일주일 내내 달걀 요리만 먹은 자의 심정을 서술하시오.

“노반이랑 젠 불러올게.”

노반과 젠을 찾으러 저택 밖으로 나온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다. 뒷산을 정찰하러 간다던 젠이 텃밭 앞에 쭈그려 앉아 노반을 지켜보고 있었고, 노반은 신이 난 발걸음으로 텃밭을 빙빙 돌며 반짝임을 뿌려 대고 있었다. 노반이 귀여워서 반짝임이 보이는 줄 알았는데 눈을 비비고 봐도 저건 ‘진짜’ 반짝임이었다. 뭐야?

“노반?”

“미르! 나 성장했나 봐!”

“응?”

“이거 보여? 젠이 내가 기특하대!”

노반은 환한 표정으로 반짝임, 정확히 설명하자면 반짝 가루 같은 것을 텃밭에 뿌렸다. 그게 뭐야? 농약? 오구오구, 농약이구나. 이제 그 채소는 못 먹게 됐지만 괜찮아, 노반은 귀여우니ㄲ…. 잠깐.

귀여운 노반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텃밭이 자세히 보였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새싹이었던 텃밭 채소들이 단숨에 열매가 맺히기 전 상태까지 자라 있었다. 저게 뭐야!

“헉!”

“어때?”

“이거 노반이 자라게 한 거야?”

“응! 내가 이렇게 하면 얘네가 빨리 자라!”

“대박! 개쩔어!”

지구에 뭉크의 절규가 있다면 이곳엔 도브로미르의 환희가 있었다. 너무 기쁜 나머지 앞뒤 생각하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그에 노반도 나를 따라 똑같이 소리를 질렀다.

“대박! 개쩔어!”

“아악! 안 돼! 노반, 그런 거 따라 하면 안 된다 했지!”

역시 입을 꿰매야겠다.

노반은 자신이 성장을 했다며 이건 자신의 능력 중 하나인 <식물 성장>이라 했다. 간단하게 말하면 식물을 빠르게 성장시키는 것이다.

노반의 능력을 들은 젠은 그 능력이 식물에만 국한되는 것인지 확인해 보려 뒷산에서 아기 토끼를 잡아 왔고, 그 토끼에게도 반짝 가루를 뿌려 봤지만 생명을 가진 움직이는 것은 성장하지 않아 오직 식물에만 가능한 것임을 알게 됐다.

드로이프는 성장을 하면서 능력을 얻게 되는데, 보통은 치유에 관한 능력이거나 빛과 관련된 능력이지만 희귀한 몇몇 드로이프는 성장기의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한 능력이 발현된다고 한다. 노반은 텃밭의 채소가 무럭무럭 얼른 자랐으면 해서 <식물 성장> 능력을 얻은 것 같다는 젠의 추론이 있었다.

젠 대신 뒷산의 마물을 전부 때려잡는다는 큰 포부는 기억이 나질 않는 건지, 노반은 강한 공격 능력 대신 얻은 <식물 성장> 능력이 아주 기쁜 듯했다. 그래, 네가 좋으면 나도 좋단다.

“미르! 내가 앞으로 쑥쑥 자라게 해 줄게!”

“우와, 너무 고마운데? 그렇지만 무리하면 안 된다?”

“응!”

“좋아. 밥 먹자!”

도도도 달려오는 노반을 꽉 끌어안고 저택으로 들어갔다. 내 목을 끌어안은 노반은 앞으로 자신이 키워 낼 채소의 이름을 나열했다. 감자, 양파, 쪽파, 대파, 마늘, 고추, 생강 등등 그동안 먹었던 채소들을 전부 이야기했다. 당근만 빼고.

“당근은?”

“…미르가 원한다면.”

“하하, 당근이 얼마나 맛있는 채소인지 아직 노반은 모르는구나.”

“난 당근 싫어. 맛없어.”

“갈비찜에 들어간 당근을 못 먹어 봐서 그래. 간장 완성되면 만들어 줄게.”

“으음…. 알았어.”

당근 이야기로 침울해진 노반은 식탁 위에 차려진 데미그라스 소스를 덮은 오므라이스를 본 뒤 환한 미소를 지었다.

“우와! 이게 뭐야?”

“음, 오믈렛을 올린 볶음밥, 오므라이스라고 해.”

아기 토끼를 뒷산에 풀어 주고 온 젠까지 식탁에 앉자 오믈렛을 가를 나이프를 들었다.

“잘 봐, 이게 하이라이트야. 아니, 오므라이스의 묘미야.”

오믈렛의 중간을 갈랐다. 그에 갈색의 데미그라스 소스를 입은 오믈렛이 양쪽으로 펴지며 사르르 연노란 달걀 이불이 나와 볶음밥을 감싸고 늘어졌다. 이거지!

“우와!”

“자, 노반도 해 봐.”

노반은 신기하거나 처음 본 것이 있으면 항상 ‘우와!’를 외친다. 아무리 아이라도 300년 이상을 산 존재라 웬만한 것에는 놀라지 않았지만, 내가 한 음식은 대륙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음식이라 항상 신기하다며 ‘우와!’를 남발했다. 이 맛에 요리하지.

젠과 마린도 내가 한 대로 따라 오믈렛을 갈랐다. 노반은 영상 구슬로 찍어야 한다며 쫄래쫄래 나가선 속이 비어 있는 영상 구슬을 가져왔다. 나중에 또 만들어 준다고 했지만, 오믈렛을 처음 가르는 행복한 기분을 꼭 찍어야겠다며 바로 맞은편에 앉은 젠에게 영상 구슬을 넘겼다.

나는 젠에게 눈치를 줬다. 그 영상 구슬을 내게 넘겨라. 노반은 내가 찍어 줄 것이다. 하지만 젠이 내게 영상 구슬을 넘겨주기 전, 신이 난 노반이 오믈렛을 가르기 시작해 영상 구슬을 들고 있던 젠은 서둘러 노반을 찍어야 했다. 결국 노반의 첫 오믈렛 가르는 영상을 찍은 것은 젠이 되었다.

“젠! 나 이렇게 하는 거 잘 찍었어?”

“네, 잘 나왔을 거예요.”

“이제 줘!”

젠에게 영상 구슬을 돌려받은 노반은 쪼르르 달려가 거실 책꽂이 비어 있는 곳에 영상 구슬을 올려놨다. 원래 밥 먹을 때는 자리를 비우지 않는 게 예의지만 뭐 어때. 귀여우니까 봐주자. 대신 갈비찜의 당근을 처음 먹는 노반은 꼭 내가 찍을 것이다.

오므라이스를 한 입 먹었다. 조금 심심할 수 있는 오므라이스에 데미그라스 소스가 풍미를 더해 줬다. 역시 마린, 소스 없었으면 무슨 맛으로 먹었을지.

“맛있어! 나 오므라이스 좋아!”

“그치? 소스는 마린이 만든 거야.”

“마린, 맛있어! 마린은 못 하는 게 없네! 쿠키도 맛있고, 머핀도 맛있어.”

“나중에 또 만들어 줄게요. 많이 먹어요, 노반.”

“응!”

조개탕도 먹었다. 오므라이스와 조개탕이라니, 다 만들고 나니 언밸런스한 조합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입을 벌린 조개에서 조갯살을 떼어 냈다. 통통한 조갯살이 일품이었다. 해안이 근처라 그런지 이곳은 해산물의 품질이 너무 좋았다. 소주 생각나네. 하, 이거 진짜 일품 술안주인데.

“안 되겠다. 딱 한 잔만 마시자. 같이 마실 어른?”

“전 괜찮습니다.”

“그럼 젠 당첨.”

저녁이기도 하고, 메인 요리인 오므라이스는 다 먹어 가고, 안주로 제격인 조개탕이 남았으니 술을 까면 딱 좋을 타이밍이었다. 마린은 내가 예의를 차려야 하는 황자인 거랑은 별개로 원래부터 술을 잘 안 마셨고, 남은 어른인 젠과 함께 마셔야겠다. 어른이 셋이나 되는데 혼자 마시면 무슨 맛이야.

“나도!”

“넌… 조금만 마시자.”

손을 번쩍 들고 자신도 마시겠다는 노반에 고민하다 승낙했다. 아무리 아기라 해도 300살을 어린애 취급할 수는 없지. 딱 한 모금만 주자. 영상 구슬부터 찾고.

찬장에 있는 럼(Rum)을 꺼냈다. 상점가에서 가장 오래된 가게에서 팔던 특별한 럼인데 가게 주인이 말하길, ‘우르카스’ 해적단한테서 구한 거란다. ‘바다 위의 지배자’, ‘바다 위의 선 왕국’이라 불리는 해적단인데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지만 술을 권하던 표정이 의기양양했으니 믿을 만하지 않을까. 맛없기만 해 봐라.

소주잔보다 조금 큰 유리잔을 세 개 꺼냈다. 노반은 딱 한 모금, 젠과 내 잔은 컵의 반을 채웠다. 럼주의 색을 보니 물과 같이 투명한 색이었다. 숙성이 얼마 안 된 럼이라 단맛보다는 향과 알코올 맛이 강할 거다. 이건 칵테일로 마셔야 좋은데.

“노반, 사과 주스가 좋아, 오렌지 주스가 좋아?”

“으으으음…. 오렌지!”

노반은 머리를 싸매며 고민하다 오렌지 주스를 선택했다. 오렌지 승! 냉장고에서 미리 갈아 놓은 오렌지 주스를 꺼내 럼과 섞었다. 그저 알코올 맛이 살짝 나는 오렌지 주스다.

“여기. 아직 마시지 마. 젠은 섞어 마실래?”

“전 그냥 주세요.”

“응, 여기.”

나는 사과 주스를 아주 조금 섞었다. 럼은 단맛으로 먹는 술인데, 단맛이 안 나면 무슨 재미로 마셔.

“노반, 처음 마시는 거니까 천천히 마셔야 한다?”

“응? 처음 마시는 거 아니야.”

“잉?”

“전에 같이 살던 인간이 가끔 줬었어. 여우 모습이어서 잘 마시지는 못했지만.”

“그 쌰…. 못돼 먹은 시키가….”

그 태워 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 여우한테 술을 주는 놈은 어떤 정신머리를 가지고 있는 거야? 진짜 이해가 안 되네! 만나기만 해 봐, 목젖 끝까지 독주로 채워 버릴 테다.

“미르, 이것도 맛있다! 미르가 하면 다 맛있어!”

“그래? 노반은 오늘 텃밭 보느라 힘썼으니까 그것만 마시고 자는 거야, 알았지?”

“응! 내일도 힘낼 거야!”

“그래그래.”

크흡, 내 새끼.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내 새끼. 아아, 하나님, 부처님, 알라신, 시바신, 그밖에 모든 신들아, 우리 노반 귀엽지? 악마야, 사탄아, 악귀야, 귀신아, 세상 모든 어두운 존재들아, 우리 노반 귀엽지? 귀여운 존재 콘테스트가 있으면 우리 노반은 단연코 1등이었을 거야. 아니지, 누가 우리 노반을 심사해.

비루한 심장을 가진 나는 노반의 귀여움에 한 대 거하게 치여서는 고개를 젖힌 채 입을 막고 발을 동동 굴렀다. 그 모습을 본 젠이 피식 웃었다. 그를 바라본 채 난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노반 귀여운 거 처음 봐?

“왜?”

“귀여워서요.”

“그치? 우리 노반이 세상에서 제일 귀여워.”

“미르 님도 귀여워요.”

젠은 그 말을 남기고 잔에 남아 있는 럼을 단숨에 마신 뒤 자리를 피했다. 그와 나를 번갈아 본 마린의 음흉한 눈빛이 내게 꽂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