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북쪽 땅으로 쫓겨나다 (22)
노반의 성장 버프를 받은 채소들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랐다. 덕분에 몇 주는 더 있어야 수확할 수 있는 고추와 마늘도 빠르게 수확했다.
일주일 전 수확한 홍고추는 깨끗한 천 위에 늘어놓고 햇볕에 건조했다. 완전히 말린 홍고추를 정리한 뒤 거짓말처럼 소나기가 내렸다. 건조하는 동안은 비가 안 와서 다행이다.
말린 홍고추는 전부 빻아서 고춧가루로 만들어야 했는데 양이 워낙 많아 조금만 빻아 놓기로 했다. 고춧가루로 뭘 할 수 있더라. 아, 생선 조림을 해야겠다. 꽁치나 갈치, 고등어도 괜찮고. 회 떠서 먹고 남은 뼈로 매운탕을 하는 것도 좋겠다.
“미르! 오늘 상점가 가기로 했는데 같이 갈래? 전에 아저씨랑 아줌마들이 미르 잘 있냐고 물어봤었어.”
“응? 나도? 그래, 시아한테 줄 것도 있으니까 가자.”
“형아한테?”
“응. 저번에 과일 엄청 많이 사서 과일청 담근 거 기억해?”
“기억해! 난 키위가 맛있었어! 형아한테 그거 줄 거야?”
“시아한테는 유자청 줄 거야. 유자 좋아한다고 했었거든.”
과일을 싸게 사기도 했고, 좋은 과일을 사용한 덕분에 좋은 맛이 나왔다. 페라 꽃도 받았고, 감사의 의미를 포함해 시아에게 전해 줄 유자청을 따로 만들어 놨었다.
마린도 달리와 약속이 있다 해서 마을로 내려가기로 했고, 이왕 셋이나 가는 거 다 같이 가서 외식이나 하고 오자고 소파에 앉아 책을 읽던 젠도 끌어들였다. 젠은 괜찮다고 사양했지만, 외식한다는 말에 이미 신이 난 노반이 극구 끌고 가겠다 엄포를 놓아 젠은 두 손 두 발 들고 일어났다. 안 들어 주면 한동안 삐져 있을 게 분명하니 조금 덜 귀찮아지는 선택을 한 거다.
잘 선택한 거다. 저 어린놈은 삐지는 방식이 너무 과격하다. 뒷산에 자라 있는 나무에 몸통 박치기를 해서 울분을 푼다든지, 막무가내로 <성장 능력>을 사용해 채소를 무분별하게 키워 낸다든지, 한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다든지 다양한 방식이 있었지만, 그중 가장 과격했던 방식은 단식 투쟁이었다.
사랑스러운 여우가 파들파들 떨며 아무것도 먹지 않고 삐져 있는 걸 볼수록 내 마음은 찢어지게 아픈데, 노반이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을 했는데도 여우의 고집은 태산과도 같아 꿋꿋하게 먹지 않았다. 덕분에 나도 그 나쁜 버릇을 고쳐 준다고 한동안 음식을 먹지 않았었다.
어린 드로이프는 자신은 며칠 안 먹어도 죽지 않지만, 인간은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이대로 미르 님이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면 미르 님은 곧 죽을 수도 있어요.’라는 젠과 마린의 이야기를 들은 노반은 점점 야위어 가는 내 몰골을 본 뒤 소스라치게 놀라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면서 내 입에 알리타 열매의 과즙을 쏟아부었다.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울며 죽지 말라 애원하는 노반에게 다신 고집부리지 않겠다는 약속도 받아 냈다. 기특하게 젠과 마린이 영상 구슬로 증거를 찍어 놨다. 두 개나 찍었으니 두 번 혼낼 수 있다.
“우리 뭐 먹을 거야?”
“뭐 먹고 싶어? 노반이 먹고 싶은 걸로 먹자.”
“음, 그럼 호호반 아저씨네 가게로 가자! 그 아저씨 피자가 대륙 최고래.”
“피자? 좋아.”
이제 위장도 정상으로 돌아왔고, 스트레스를 안 받아서 그런지 느끼한 서양 음식도 가끔 먹으면 잘 넘어간다. 노반이 먹고 싶다는데 먹어야지.
젠은 흑마를 탔고, 노반과 나는 마차 안, 마린은 마부석에 앉아 있는 마커스의 옆에 탔다. 왜 굳이 힘들게 거기 있냐, 같이 마차 안으로 들어가자고 권했지만 마린은 마커스에게 마차를 모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거절했다. 저번 외박 사건 때 나를 데리러 가고 싶었지만 마차를 몰 줄 몰라 한탄스러웠다면서 황자님을 위해 꼭 배우겠다며 의지를 불태웠다.
결국 마린을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고 노반과 단둘이 마차를 탔다. 마린이 마차를 모는 법을 배우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마차는 천천히 달렸다. 덕분에 시간이 조금 더 걸렸지만 마린이 좋다면 다 괜찮았다.
오랜만에 온 상점가는 전처럼 활기가 넘쳤다. 저번보다 사람이 더 많은 것 같기도 하고.
“황자님!”
“억! 깜짝이야.”
“황자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응? 내가 뭘 했다고 감사하대? 한 주민의 말을 시작으로 주변에 있던 모든 주민들이 ‘황자님, 감사드립니다!’를 외치기 시작했다. 너네 기억해야 할 게 있는데, 난 세네카 제국의 황자야. 너네는 프레오나 제국의 국민이고.
“앗! 황자님! 저번에 주신 감기약, 정말 유용했습니다!”
“아, 그거.”
“정말 감사합니다. 크로스반 영지에 감기가 쫙 퍼졌었는데 황자님의 비약 덕분에 초기에 잡았습니다! 의사도 없어 큰일 날 뻔했는데 이게 다 황자님 덕분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아, 다행이네.”
정말 다행이었다. 그 감기를 초기에 못 잡았으면 마커스든 누구의 부탁으로 내가 또 마을에 내려와서 의사인 양 이 집 저 집 돌아다녔을 게 눈에 선하다. 어후, 끔찍해. 그때 네이든에게 약을 준 것이 신의 한 수였다.
감사 인사를 받는 것까진 좋았다. 하지만 그 후부터 내 약의 효과를 본 사람들이 다가와 내게 무언가를 안겨 주기 시작했다.
“황자님, 이건 저희 가게에서만 파는 특별한 조미료입니다. 수프에 넣으면 감칠맛이 확 올라옵니다!”
“이건 저희 가게에서 자랑하는 옥으로 만든 팔찌입니다! 나쁜 기운을 몰아 주는 부적 같은 것입니다!”
“기분이 좋아지는 향초입니다! 저희 가게 대대로 내려오는 향이라 저희 가게에서밖에 못 사는 겁니다!”
“70년 장인이 만든 단검입니다! 부디 황자님께서 받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그린 그림입니다! 비록 조금 오래된 그림이지만 수도에서 대상을 받은 겁니다!”
등등, 상점가의 주민들은 우르르 몰려와 내게 뭐라도 주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오늘은 살 것이 없어서 아공간 주머니도 안 가져왔는데 이걸 전부 어떻게 들고 가.
“다들 진정하게. 응당 해야 할 일이었으니 이러지 않아도 돼.”
“아닙니다! 정말 감사해서 드리는 겁니다. 의사도 없고 약사도 없어, 어른들이 아팠으면 일도 못 하고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저희들 마음이니 제발 받아 주십시오!”
“그대들의 마음은 알겠어. 하지만 이것들은 도로 가져가게. 난 정말 이런 걸 바라고 한 일이 아니네.”
내가 거절하는 게 예의상 거절하는 것이라 생각하는지 억지로라도 쥐어 주려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주민들을 젠이 막아섰다. 젠이 막아서지 않았으면 내 비루한 몸뚱이는 주민들한테 깔려 엉망진창이 됐을 거다. 너네들 황자가 편하지, 아주? 으글으글 속을 갈고 있었더니 젠이 내 표정을 보곤 한마디 했다.
“명령만 내리십시오. 전부 목을 치겠습니다.”
“아니, 목을 칠 것까지야. 하아, 그냥 받자.”
고개를 끄덕인 젠은 노반을 시켜 달리를 만나러 간 마린을 불러왔다. 내 앞에 주민들이 모여 있는 걸 보곤 빠르게 상황 파악을 한 마린이 아공간 주머니를 꺼냈다. 안 가져온 줄 알았는데 마린은 준비성도 좋다. 아, 항상 들고 다녔었나? 하긴, 웬만한 귀중품은 전부 저 안에 들어 있으니 들고 다니는 게 마음이 편하지.
나는 고맙다는 주민들의 인사를 받고, 노반과 마린은 그 옆에서 선물을 받아 아공간 주머니에 넣었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검을 뽑은 젠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경계를 했다. 이러고 있으니까 사기 단체 같다. 물론 사기 친 적은 없지만.
“황자님, 정말 감사합니다!”
“하하, 그래.”
선물과 감사 인사는 고맙지만 나중에 날 부려 먹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다. 내가 너무 깊게 생각하는 면도 있지만, 이대로 영주 놈이 의사들을 잡아다가 풀어 주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이런 상황이 계속될 텐데 그때마다 이들에게 내가 약을 쥐어 줄 순 없지 않나.
“영주 놈을 잡아 족쳐야….”
“네?”
“아닐세. 그대가 마지막인가?”
“넵! 황자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제 아들놈이….”
마지막 주민은 말이 정말 많았다. 원래 높은 사람 앞에선 긴장하고 벌벌 떨고 있거나 경외를 하는 게 보통이다. 분명 처음 상점가에 왔을 때만 해도 나를 향한 주민들의 태도는 높은 사람을 대하는 낮은 사람의 자세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저 옆집의 마음씨 좋은 어르신을 대하는 것 같다. 언제부터 이웃 제국의 황자가 옆집 어르신이 되었지?
“선물은 내 긴히 쓸 테니 이만 가 보게. 장사꾼들은 시간이 금이 아닌가.”
“네! 정말 감사합니다, 황자님! 저희 가게에 오시면….”
“가 보게.”
“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말 많은 마지막 주민까지 전부 돌아가자 나는 곧바로 집에 가고 싶어졌다.
“하아, 힘들다.”
“황자님의 미담이 많이 퍼졌나 봐요.”
“미담은 개뿔. 호소에 감기약 뜯긴 게 전부인데 그게 뭐 대수라고.”
“그것 말고도 루독의 아이를 고쳐 줬잖아요.”
“그것도 호소에 져서…. 아아, 모르겠다. 당분간 상점가는 쳐다도 보지 말아야지. 피곤해 죽겠네.”
나중에야 알았지만 노반과 마린이 가는 곳마다 내 자랑을 하고 다녀서 다들 내가 친근해진 거였을 뿐이었다.
노반이 자랑하던 호호반 아저씨의 피자 가게는 상점가 중앙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유명한 가게였다. 인테리어 분위기도 좋고 깨끗해서 마음에 들었다. 우리가 들어오자 노반의 얼굴을 본 호호반 아저씨는 기다리고 있었다며 메뉴를 보여 주지도 않고 음식을 막 내오기 시작했는데, 자기도 내 감기약의 덕을 본 사람 중 하나라 음식 값은 따로 받지 않겠다고 했다.
치즈 소스가 올려진 감자부터 시작해 두툼한 새우가 들어간 크림 파스타, 신선한 닭을 한 입 크기로 다듬어 튀긴 뒤 비법 소스와 버무려 오븐에 한번 구운 치킨, 토마토 베이스의 페퍼로니와 올리브, 루꼴라, 모차렐라 치즈가 듬뿍 올려진 갓 구운 피자가 나왔다.
“대박 개쩌…. 읍!”
줄줄이 나오는 음식을 본 노반이 ‘대박 개쩔어.’를 외치려다 나와 한 약속이 떠올랐는지 화들짝 놀라며 스스로 입을 막았다. 그에 나는 젠과 마린의 눈치를 보며 상처받은 눈빛으로 노반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