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자님 먹고 싶어요-37화 (37/227)

37. 북쪽 땅으로 쫓겨나다 (23)

“노반….”

“아직 다 안 했어! 나 약속 안 어겼어!”

“내 입을 붙여 놔야겠어.”

“아니야, 미르! 그러지 마!”

“내 잘못이야. 내가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됐었는데….”

“안 할게! 이제 절대 안 해!”

고개를 돌리고 터져 나오는 웃음 참았다. 아아, 귀여워. 이런 맛에 놀리지. 다시 한번 노반을 바라보며 나오지 않는 눈물을 짜냈다. 그에 다음에는 절대 나쁜 말 하지 않겠다며, 밥은 먹어야 하니 입은 붙이지 말라고 설득하는 노반의 눈을 피해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렸다.

밥은 먹어야 하니 입을 붙이지 말라니. 크흡. 노반이 너무 귀여워 헤벌쭉 입꼬리를 올려 웃다, 파스타를 먹으려던 젠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창피해져 볼을 긁적였다. 그는 마주친 시선을 피하지 않고 부드럽게 웃어 줬다. 그러고는 들었던 포크를 내려놓고 노반에게 말했다.

“노반이 약속 안 지키고 나쁜 말 했으니까 미르 님 입을 딱 붙여 놔야겠네요. 접착제를 어디서 구할….”

“안 돼!”

“흐윽, 이 맛있는 것을 먹지 못하고 입을 붙여야 한다니….”

“미르…!”

젠이 내 입술을 향해 손을 뻗으려 하자 노반이 펄쩍 뛰며 안 된다고 소리쳤다.

“두 분 다 노반 그만 놀리고 이제 드세요.”

가만히 보고 있던 마린이 상황을 정리했다. 덕분에 나는 푸하하 크게 웃으며 피자 한 조각을 들어 크게 베어 먹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피자가 어떻게 이런 맛이 날 수가 있지? 고소한 치즈의 맛을 느낄 틈도 없이 토핑들의 조화로운 맛이 입 안을 사로잡았다. 게다가 무슨 방법을 사용해서 구운 건지 모르겠지만 밑바닥에 깔린 빵이 바삭했다. 어떻게 밑바닥 빵이 바삭할 수가 있지?

“여기 피자 대박이다. 황궁에서 이렇게만 나왔어도….”

“피자는 서민들 음식이라 황궁에서 먹을 일은 없었을 거예요.”

“그랬구나. 귀족들은 재미없게 맨날 고기 구운 것만 먹나 봐.”

“사실….”

“응?”

우물쭈물하던 마린이 로테 별궁 요리사들의 실체를 까발렸다. 주방장이 낙하산이라 할 수 있는 요리가 굽는 것밖에 없었다고.

“허…. 진짜로?”

“네, 그래서 제가 하려고 했는데 그놈 고집이 원체 세서 주방에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

놀랍다. 내 ‘음식 거부 병’이 전부 고집스러운 낙하산 요리사 때문이었다니.

“벼락 맞을 새끼.”

“제가 부족해서 죄송합니다. 그놈이 운이 얼마나 좋은지 설치해 놨던 함정들을 다 피하는 바람에….”

“아니야. 마린이 죄송할 게 뭐가 있어. 다 그 벼락 맞을 낙하산 새끼랑 빌어먹을 타루스 새끼가 자꾸 불러내서 스트레스 줘서 그렇지. 마린 없었으면 진작 그딴 황궁 도망쳤을 거야.”

요리사 망할 놈. 어쩐지 바게트는 치아보다 딱딱했고, 수프는 바닷물을 사용한 것처럼 짰으며, 샐러드 소스는 괴상하더라. 가끔 마린이 구워 오는 쿠키가 아니었으면 굶어 죽었겠지. 진작 생식을 했었어야 했다.

“손가락 하나라도 잘라 냈어야 하는 건데.”

“그러게. 나 다음으로 거기 묵게 될 사람이 너무 불쌍하다.”

“그래도 황태자 놈이 죽었으니 살 만은 하겠죠.”

“그럼 뭐 해, 오스먼드 놈이 황제가 됐는데. 그놈이 야밤에 발코니로 쳐들어올까 걱정하느라 잠도 못 잘 거….”

아.

“…네?”

“아니야. 아냐. 잘못 말했어.”

“황자님!”

이놈의 입. 입조심!

장담하는데, 나는 입으로 망할 팔자다. 경악하는 마린의 얼굴을 보니 내가 또 무의식적으로 쓸데없는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았다는 게 느껴졌다.

“접착제….”

접착제가 절실히 필요했다.

“설마 그놈도 황자님한테 찝쩍거린 거예요? 심지어 밤에 쳐들어와서…! 허!”

“아, 아니야. 노반도 있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마린…!”

“어쩐지 가끔 걸음이 어정쩡하시더니, 그게 전부 그놈 때문에!”

“무슨, 무슨 소리야! 그건 제대로 잠을 못 자서…. 아니, 진짜 말 그대로 잠을 잘못 자서 그랬던 거야.”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마린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나는 노반의 귀를 막고 젠의 눈치를 봤다. 마린의 입을 막기엔 이미 늦었으니 그가 이상한 오해를 하지 말았으면 했다. 오스먼드랑 나랑? 그건 진짜 아니다. 걔랑 나랑 엮이면 싸움밖에 안 난다고.

“마린, 진정해. 그런 거 진짜 아니야. 그냥 오스먼드가 야밤에 쳐들어와서 나 좋은 곳으로 보내 준다고…. 아니, 말을 못 하겠네. 그러니까….”

“좋은 곳이요…?”

“그래!”

“좋은 곳…. 야밤에 갈 수 있는 좋은 곳이….”

하, 미치겠네! 음란 마귀는 내가 아닌 마린한테 끼었었나 보다.

머릿속이 점점 하얘지면서 이제는 내가 제대로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눈이 팽글팽글 돌아가는 와중, 차분하게 지켜보고 있던 젠이 나직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내 어깨를 토닥이며 달아오른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마린, 진정하고 미르 님 말 들어 봐요. 미르 님도 진정하고 천천히 설명해 주세요.”

분명 웃고 있는데 왜 눈은 가라앉아 있는 거지.

“그러니까….”

흡사 도깨비의 얼굴을 하고 있는 마린과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차갑게 가라앉아 서늘한 눈빛을 하고 있는 젠에게 사건의 개요를 제대로 설명해 줘야 했다. 하지만 이걸 전부 말하려면 내가 젠을 죽이려고 계획했다는 것도 말해야 하는데….

“간단하게….”

“네.”

마린은 꼭 지금 들어야 한다는 듯, 평소의 자애롭던 표정은 딱딱하게 굳히고, 다정했던 말투는 꽤나 단호했다.

“오스먼드가 찾아왔는데, 자기가 대륙의 하나뿐인 황제가 되겠다는 거야. 나 죽여서 세네카랑 전쟁을 다시 한다고 하길래… 프레오나의 황제부터 되라고 도발했지. 그러다가….”

“네.”

“그러다가… 걔가 나 북쪽으로 보내서 죽인다고 해서…. 아까 말했던 좋은 곳은 북쪽을 말한 거고!”

“아, 그곳이 아니었군요.”

“마린이 말하는 그곳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오스먼드한테는 내가 타루스 해결해 줄 테니까 나한테 신경 끄라고 했지.”

“그게 전부예요? 그놈이 수작 부리진 않았고요? 황자님을 보는 그놈 눈빛이 꼭 초식동물을 잡아먹으려는 맹수 눈빛이었는데! 황자님이 무슨 수로….”

그렇지. 오스먼드 눈에는 내가 얼마나 쉬워 보였겠어. 그저 하는 일 없이, 입만 다물고 있는 볼모였을 뿐이니. 하지만 그 덕분에 방심하고 있던 오스먼드를 뒤집을 수 있었던 거다. 그가 나를 철저히 경계하고 있었다면 역사기는 무슨, 그 자리에서 목 댕강이었겠지.

“이프리트 팔아서 산 거지, 뭐….”

“아.”

격양되었던 마린의 주변 공기가 순식간에 차게 식었다. 그러곤 조용히 눈알을 굴려 젠의 눈치를 봤다.

“죄송합니다….”

“마린의 잘못도 아니고, 알고 있었으니 괜찮아요.”

그 잘못의 당사자인 나는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정말 미안해…. 그때 그냥 나 죽고 너 죽는다 협박했어야 했는데….”

빳빳하게 들려 있던 고개가 땅굴을 파고 들어가도 될 정도로 숙여졌다. 그에 나를 본 젠이 부드러운 손짓으로 숙여진 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미르 님이 해결해 주신다 했잖아요. 그러니 괜찮아요.”

“응, 다시는 너 안 찾아오게 쫓아내 줄게.”

그게 황궁일지 천국일지는 모르겠지만.

노반은 귀가 막혀 있는 와중에도 입 안 가득 와구와구 음식을 먹었다. 그래, 죽기 전에 우리 노반 밥 먹는 거나 실컷 봐야지. 귀여워 죽겠네, 진짜.

피자 가게 주인 호호반은 통이 큰 사나이였다. 덕분에 카카오닙스가 가득 올려진 우유 아이스크림을 포함해 한 시간 동안 배가 터질 정도로 위장에 쑤셔 넣었다. 호호반은 야무지게 잘 먹는 노반과 삐쩍 꼴아 있는 내가 잘 먹는 게 기특하다며 끊임없이 음식을 내왔다. 게다가 주방에 있지 않고 밖으로 나와 다 먹나 안 먹나 뚫어지게 쳐다봐서 남길 수도 없었다. 덕분에 10인분은 거뜬히 넘어 보이는 양을 네 명이서 꾸역꾸역 먹었다. 한동안 피자는 쳐다보기만 해도 토할 것 같다.

얼른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상점가에 온 목적은 이루고 가야 했다. 마린은 내 소시지 베개의 답례로 달리에게 주려던 유자청을 들고 나 대신 그녀를 찾아갔고, 노반은 시아 형아는 이미 보고 왔다면서 이번엔 달리를 보러 가겠다며 마린과 떠났다. 나는 남아 있는 젠과 기억나지도 않는 길을 찾아 가며 시아가 있을 과일 가게로 갔다.

“여긴 무슨 미로도 아니고, 과일 가게 하나 찾는 게 이렇게 어렵냐.”

“누구한테 물어보고 올까요?”

“아냐, 또 감사합니다, 황자님! 블라블라 어쩌고저쩌고 감사합니다 중얼중얼할 게 분명해. 시끄러워질 것 같으니까 저기만 가 보고 없으면 그냥 집에 가자.”

“네, 그래요.”

“너도 귀찮았구나?”

“귀찮지는 않지만, 미르 님이 다치면 큰일이니까요.”

“네가 있는데 다칠 리가.”

사실 그냥 저택에 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하지만 내 바람과는 다르게 마지막 골목길을 돌아가니 가게 문을 닫고 정리하고 있던 시아가 보였다. 백 보 뒤에서도 환하게 빛나는 그의 금발이 눈에 확 튀었다. 저 머리색 때문이라도 미아가 될 일은 없겠어.

“시아!”

“황자님?”

정리하던 상자를 내려놓은 시아가 그의 화려한 금빛 머리칼만큼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반겨 줬다. 윽, 눈부셔.

“오랜만이야. 잘 있었어?”

“네, 잘 있었습니다. 황자님은 별일 없으셨죠?”

“응, 나야 똑같지 뭐. 아, 여기는 젠. 젠, 여기는 시아니스.”

서로 처음 보는 사이일 테니 인사를 위해 중간에 낀 내가 서로를 소개했다. 소개가 끝난 뒤, 젠이 내미는 손을 시아가 잡았다. 그들은 필요한 말만 나누며 짧게 악수를 하고 바로 떨어졌다.

“반갑습니다.”

“네, 반갑습니다.”

어색했다.

“이거 주려고 왔어.”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려 오는 내내 들고 있던 유자청을 시아에게 건네줬다. 시아는 두 손으로 공손하게 유자청을 받았지만, 이걸 왜 받는지 모르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과일 고르는 거 도와줬잖아. 싸게 주기도 했고. 그리고 항상 노반이 이것저것 얻어먹는다던데 고마워서.”

“아, 그럼 이게 그때 사 가셨던 과일로 만드신 거예요?”

“응. 마멀레이드로 빵이랑 같이 먹어도 되고, 차로 마셔도 되고.”

“네, 정말 맛있어 보여요. 황자님이 손수 만드신 거죠? 잘 먹겠습니다.”

“응, 그래 주면 고맙지.”

“아! 잠깐, 잠깐만 기다 주세요.”

시아는 잠깐 기다려 달라는 말을 남긴 채 닫았던 가게 문을 다시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얇은 헝겊으로 감싼 붉은색의 꽃다발을 들고 나왔다. 금빛 머리칼, 보석같이 푸른 눈, 그리고 붉은 꽃을 든 그의 모습이 참 잘 어울렸다.

잘생긴 남자와 꽃의 조화는 언제 봐도 옳다고 속으로 생각하던 중,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시아가 들고 온 꽃다발을 내게 내밀었다.

“받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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