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북쪽 땅으로 쫓겨나다 (24)
“응?”
“명색이 과일 가게인데 과일은 다 팔려서 없네요. 그 대신이라 하기엔 그렇지만.”
왜 또 꽃을 준대. 게다가 하필 장미.
시아가 들고 있는 장미의 꽃잎이 파릇파릇하게 살아 있었다. 줄기에 나 있는 가시는 전부 잘라 냈는지 매끈했다.
“아니야, 괜찮아.”
“답례로 드리는 거예요. 별 뜻 없으니 받아 주세요.”
“응…. 고마워.”
장미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저 선량한 눈 때문에 받아 준다.
결국 물물 교환이 되어 버렸다. 유자청과 장미라니. 그러고 보니 저번에 받은 배꽃도 마커스 집에 있을 텐데. 기껏 준 꽃인데 남의 집에 놓고 왔다고 하면 미안하니 그건 비밀로 해야지.
“그럼 가 볼게. 나중에 또 보자.”
“네, 황자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목적을 이뤘으니 미련 없이 돌아섰다. 한시라도 빨리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어 마린과 노반이 있을 달리의 인형 가게로 갔다. 과일 가게에서 인형 가게로 가는 길은 알고 있으니 딱히 헤매지 않아도 잘 찾아갈 수 있었다.
인형 가게로 가는 길, 시아에게 받은 장미꽃을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할까 고민했다. 우리 노반 목욕할 때 향 좋으라고 꽃잎을 따서 넣어 줄까, 아니면 말려서 장식을 해 놓을까. 조금 아깝지만 침대 위에 뿌려 놓아도 예쁠 것 같은데.
“좋으시겠어요, 꽃도 받으시고.”
조금 언짢은 듯한 젠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까지는 괜찮더니만 갑자기 왜 이래?
“좋지? 일단 선물이니까.”
“영지민들이 준 선물은 받기 싫다고 거절하셨잖아요.”
“그건 영지민들이고, 시아는 다르니까.”
그렇군요. 나직하게 읊조린 그는 그 뒤로 입을 열지 않았다. 뭐야, 설마 질투?
“질투해?”
생각만 한다는 게 입 밖으로 나왔다. 난 입으로 망할 게 틀림없다.
“질투…. 글쎄요, 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어요.”
“아니면 말고….”
질투를 해 본 적이 없다니,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감정 중 하나인 질투를 해 본 적이 없다고? 아니, 냉정하게 생각해서 젠 이프리트는 그럴 수도 있겠다. 그는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고, 훈훈하게 생긴 사람과도 비교 못 할 정도로 잘생겼지, 키 크고, 몸도 좋지, 게다가 오우거도 한 방에 쓸어 버릴 정도로 검을 잘 다루지. 결정적으로 미워한다는 나한테까지 다정하잖아. 아, 이젠 미워하는 것조차 모르겠다고 했지. 것 봐라, 다정하고 착하다.
“하 씨, 뒤지기 전에 연애는 해 보고 뒤져야 되는데.”
“연애요?”
“아, 속으로 생각한다는 게…. 크흠…! 젠은 연애 안 해 봤어? 인기 많았을 거 같은데.”
말하고 나서 또 후회했다. 좋아하는 놈 연애 경력은 들어서 뭐 하겠다고. 어휴, 어휴! 이 띨빵한 놈.
“안 해 봤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혼담 피하려 수도 밖으로 나돌았으니까요.”
“아하….”
얏호! 저 잘생긴 놈이 과거가 없대요! 전 애인이 없대요! 돌아다니느라 바빠서 연애를 안 했다네요!
이미 마음속에선 천사들이 나팔을 불고 폭죽이 터지며 난리가 났지만, 겉으로는 기쁘다는 것이 티 나지 않도록 담담하게 행동했다.
“미르 님은요?”
“이 몸 원래 주인은 연애는커녕 사랑도 못 해 봤고, 나는….”
그랬다. 나도 모쏠이었지. 분명히 말해 두는데,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거다. 초등학교 때의 연애는 연애로 치지도 않고, 중학교 때는 공부하느라, 고등학교 때는 병원에 있느라, 건강해져 퇴원하고서는 그동안 미뤘던 공부를 하느라 바쁘기도 했고, 대학생 때는 워낙 학구열이 높은 대학으로 가서 연애는커녕 책에 파묻혀 살았었다. 나 진짜 고달픈 인생이었네.
“말 안 해 줄 거야.”
“왜요?”
“생각까진 괜찮은데, 입으로 말하면 조금 많이 쓸쓸해질 것 같아.”
하하, 그가 작게 웃었다. 언제부터인지 조금 언짢았던 젠의 심기가 많이 풀려 있었다. 다행이라 해야 하나? 본인은 모르겠다고 했지만, 누가 봐도 그건 질투였다. 질투하는 젠을 조금 더 보고 싶다. 이런 기회 쉽게 오지 않을 텐데. 아무리 흔하지 않은 젠의 질투가 보고 싶다고는 해도 찜찜한 마음은 풀어 줘야지.
“난 장미꽃 안 좋아해. 워낙 얽힌 게 많아서 그런지 정이 안 가더라.”
“그런가요?”
“응, 이렇게 화려한 꽃은 싫어.”
장미처럼 화려한 꽃보다는 민들레같이 수수한 꽃이 더 좋다.
젠과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며 달리의 인형 가게에 도착했다. 보고 싶었던 노반과 마린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고, 은색 갑옷을 입은 기사 두 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발견하고 힘찬 걸음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고 인사를 했다.
“세네카의 4황자님을 뵙습니다.”
“4황자님을 뵙습니다.”
젠이 기사들을 경계하며 내 앞에 섰다. 그러곤 허리에 찬 검집 위에 손을 올린 채, 하대의 어투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기사들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
“크로스반 영주께서 세네카의 4황자님과 젠 이프리트 님을 뵙기를 청하셨습니다.”
나를 본다는 건 그렇다 치고, 젠까지 보고 싶다 했다. 젠은 유배를 나온, 한마디로 쫓겨난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보겠다고 기사를 보냈다고?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지만 좋게 보이지 않는다.
“황자님의 일행이신 여자와 아이는 먼저 영주성으로 모셨습니다.”
내 일행인 마린과 노반은 먼저 영주성으로 모셨다는 그의 말에 잘 쥐어 잡고 있던 정신 줄 한 가닥이 끊어진 느낌이었다. 마린과 노반이 내 일행인 건 어떻게 알고 데려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마린은 신용하지 못할 기사의 말에 잠자코 따라갈 정도로 둔하지 않았다. 나를 가리고 있는 젠을 옆으로 끌어당겨 시야를 확보한 뒤 기사를 바라봤다. 그리고 표정을 구기며 기사에게 물었다.
“그대는 내가 누구로 보이는가.”
“세, 세네카의 4황자님이십니다!”
“내 볼모로 온 몸이기는 하나, 그대의 영주보다 낮은 신분이 아닐 터. 이 영지에는 높은 사람을 이런 식으로 불러내는 관습이 있는 것인가?”
“송구합니다! 크로스반 영주님께서는 공자님의 병세 때문에 자리를 뜨지 못해 부득이하게….”
“그것은 내 알 바가 아니다. 내게 용무가 있다면 영주 본인이 직접 맞이해야 할 것이다.”
맞지도 않는 높은 사람 행세를 하며 기사를 돌려보냈다. 재수 없는 윗놈이 아랫사람을 내려다보며 사용하는 말투는 잘 모르지만 대충 예의 바른 척하는 퍼디스를 따라 해 봤는데 잘 먹힌 것 같다. 퍼디스가 도움이 될 때도 있네.
“이제 영주가 오려나.”
“아마 그러겠죠.”
“가기 싫은데. 완전 귀찮아.”
“안 가셔도 돼요. 황자님이시잖아요. 마린과 노반은 잘 돌려보내 줄 거예요.”
“아니야, 가 봐야지. 땅 주인이 오라는데 안 갈 수도 없고. 그리고 가능하면 의사 좀 풀어 달라 하게.”
귀찮음을 무릅쓰고서라도 영주성에 가는 이유다. 의사 좀 풀어 주라고. 망할 놈이 의사를 전부 데려가 버려서, 이 영지와는 아무 상관없는 내가 귀찮아지는 미래가 보였다. 이번에도 내가 감기약을 전해 주지 않았다면 정말 끔찍하게 귀찮은 일이 벌어졌을 거다.
그리고 마린과 노반이 영주성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으니 가기 싫어도 가야 했다. 그 얍삽한 놈들이 말은 안전히 모셨다고는 했지만 인질을 잡고 있다는 뜻이니까. 물론 강압적으로 신분의 차이를 들먹이면 젠의 말대로 잘 돌려보내 주기는 할 거다. 하지만 영주가 생각보다 개념이 없을 수도 있으니까.
하루 종일 걸어 다녀서인지 다리가 아파져 단단한 젠에게 기대어 크로스반 영주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이놈, 오기만 해 봐라. 날 기다리게 한 것에 대해 호되게 혼을 내 주마! 오늘 저녁은 샤브샤브였는데!
“내 샤브샤브….”
“돌아가서 먹으면 되죠.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샤브샤브는 해 떠 있을 때 시작해서 해가 질 때까지 먹는 게 제맛인데….”
샤브샤브 육수에 고기를 넣어 맛을 낸 뒤 채소 그리고 고기 순으로 넣어 주면 국물이 끝내주게 완성된다. 고기와 채소를 데쳐 먹는 게 끝나면 칼국수 면을 넣어 칼국수를 먹고, 그다음은 찬밥과 김 가루를 넣어 볶음밥을 만든다. 고대하고 고대하던 샤브샤브인데.
샤브샤브를 먹지 못하게 되자 시무룩해져 있는 내 모습을 본 젠은 딸칵거리며 검집에서 검을 빼냈다 넣었다를 반복했다. 그러곤 실망한 나를 어르며 달래듯 상냥한 어투로 물었다.
“그럼 다 없애 버릴까요?”
“응? 뭐를?”
“영주성이요.”
샤브샤브를 못 먹어서 영주성을 없애 버린다고?
“그럴 거까지야….”
“싫으면 말해 주세요. 언제든지 없애 드릴 테니.”
“응…. 마음이 놓이네….”
“저기 왔네요.”
젠은 달리의 인형 가게가 있는 거리의 끝을 가리켰다. 그의 말대로 고풍스러운 옷을 입은 중년의 남성이 수십 명의 기사를 대동하고 멀리서 다가오고 있었다. 다짐했던 대로 호되게 혼을 내 주려고 했지만, 영주의 얼굴을 보니 혼내기는커녕 들어가서 잠이나 처자지 왜 나와 있냐 걱정을 해야 할 판이었다.
다크 서클이 턱까지 내려온 걸로도 모자라 모가지엔 힘이 없어 너덜너덜했고, 얼굴 가죽이 뼈와 딱 달라붙어 있어 몇 달은 못 먹은 듯한 해골의 모습이었다.
“저거 살아는 있는 거지?”
“일단은 그래 보이네요.”
“와… 난 저 뼈다귀가 걸을 수 있다는 게 제일 놀랍다.”
“쉿, 이제 들리겠어요.”
영주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젠은 내 주둥이를 조용히 시켰다. 들어도 내가 황자인데 제가 뭘 어쩌겠다고. 그리고 아픈 건 아들이 아니라 영주 본인 아니야?
“세네카의 4황자를 뵙습니다!”
“그래, 그대가 크로스반 영지의 영주인가?”
“예, 전하! 알렉스 크로스반이라 합니다!”
허약한 몸 상태와 비슷하게 영주의 목소리에는 힘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았다. 간신히 말끝에만 힘을 주었을 뿐이었다. 그냥 편하게 말해라. 보는 내가 더 힘들다.
“그대가 나와 젠을 보자 했다지?”
“예, 그렇습니다. 송구하오나 이곳에서 할 이야기는 아닌 듯하여… 성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래, 그러지.”
영주의 상태를 보고 마음을 착하게 쓰기로 정했다.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길래 사람이 해골이 되어 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