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크로스반 영주성에 감금되다 (1)
영주와 함께 온 영주성은 우리가 살고 있는 저택보다 몇 배는 크고 웅장했다. 가장 비슷한 것을 찾아보자면 타루스의 에테네 궁과 가장 비슷했다. 무언가로부터 방어를 하려는지 성벽은 높게 쌓여 있고, 일정한 간격으로 대포도 설치되어 있었다. 성벽의 방어력만큼 성벽을 지키고 있는 기사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전부 우락부락하고 신체가 건장했다. 마치 올림포스에 나오는 남성 신들 같은 근육질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응접실로 보이는 곳으로 안내받아 들어갔다. 응접실의 인테리어가 인상적이었는데, 좋게 말하면 깔끔했고 솔직히 말하면 정신 병원처럼 새하얬다. 내가 응접실을 두리번거리며 살피자 이쪽 성채에는 아직 응접실이 없어 꾸미고 있는 중이라 했다. 다른 성채에 응접실이 있으면 왜 거기로 가지 않았냐는 질문에 최근 들어 응접실을 쓸 일이 없었고, 다른 쪽 응접실을 오래 비워 둬 더러워서 부득이하게 이곳에 모셨다는 대답을 들었다.
조금 꺼림칙했지만 그러려니 하고 자리를 찾았다. 시종이 안내하는 대로 신분이 가장 높은 내가 상석에 앉고 젠이 오른쪽, 영주는 왼쪽에 앉았다. 영주의 뒤를 지키고 있던 기사들 중 유독 각이 져 있는 기사 한 명만 남고 나머지는 전부 나가자 그제야 영주는 우리를 찾은 이유에 대해 입을 열었다.
“북쪽은 옛날부터 마물이 들끓는 곳이었습니다. 몇 달 전까지는 조금 잠잠하다 싶더니 얼마 전부터 오크를 비롯한 다양한 마물이 빈번히 마을에 나타났습니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저희 영주성의 기사단이 잘 처리하긴 했지만 무언가 찜찜한 느낌에 조사단을 파견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조사단이 이틀 전 충격적인 소식을 들고 돌아왔습니다.”
“무엇인가.”
말을 한 번도 끊지 않고 따발총처럼 쏘아 댄 영주는 제일 중요한 부분에서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100년 동안 지은 성이 한 번에 와르르 무너지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영주에게는 미안하지만, 영주의 상태가 해골 같아 방금의 그 암울한 표정이 잘 어울렸다.
나는 그 충격적인 소식이 정말 궁금하지 않았다. 조사단이 충격적인 소식을 들고 오든 말든 별개로 나는 오늘 행복하게 샤브샤브를 먹고 있었을 거라고. 다 먹고 칼국수도 넣어서 먹을 거고, 죽도 끓여 먹었을 건데!
“자그라트산 깊숙한 곳에 오크 군대가 있었다고 합니다.”
아, 젠장. 샤브샤브는 개뿔, 제사상을 차려야 했다. 자그라트산이라면 우리 저택 뒷산과 이어져 있는 산이었다. 한마디로 우리 저택으로 오크 군대가 올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안 되지. 절대 안 돼.
“그래서, 나를 부른 이유는?”
“젠 이프리트 경이 북쪽으로 왔단 소문을 들었습니다. 황자님께서 이프리트 경을 설득하여 부디 저희에게 힘이 되게 해 주십시오!”
마물을 쓸어 버리는 데는 젠 이프리트만큼 뛰어난 자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영주는 젠이 영주성의 제 기사들과 함께 오크 군대를 토벌하러 나서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근데 왜 나한테 설득해 달래. 영주의 바로 앞에 젠이 있는데. 야, 쫄았냐? 쫄았어?
젠은 내가 가 달라고 하면 가 주긴 할 거다. 어차피 우리 생활과 직결되어 있는 사항이기도 하고, 나도 마나가 충분히 있었다면 오크 두세 마리 정도는 전투 불능으로 만들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군대라면 말이 좀 달라지지. 나는 끼어들지 않겠다는 뜻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에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젠이 영주에게 물었다.
“오크 군대의 병력은 얼마나 됩니까?”
“조사단의 말에 따르면 400마리는 족히 넘어 보인다 합니다.”
“더 있을 수도 있다는 소리군요.”
“예, 그렇습니다.”
영주의 대답을 들은 젠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그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황자님께서 가라 하시면 가겠습니다.”
내가 가라 하면 간다니, 내가 젠 너를 귀찮게 할 리가 없잖아. 아, 일부러 나한테 정해 달라고 하는 건가, 가기 싫어서?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돼. 우리 일이 아니잖아.”
“저희 저택과 가까운 곳이 위험 지역이니 불안하긴 합니다.”
“….”
“황자님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나한테 왜 그래? …그냥 가기 싫으면 가기 싫다고 하지. 젠이 무슨 의도로 행동하는지 모르겠기에 그저 그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 가지 말라고 잡아 달라 하는 눈빛은 아닌데. 진짜 나한테 정하라고 하는 건가?
“보, 보수는 제대로 드리겠습니다!”
“필요 없네. 돈은 나도 많아.”
“아, 아크레나의 엠버 팔찌를 드리겠습니다! 황자님이시라면 아크레나가 착용했던 팔찌의 가치를…!”
“허락하겠네!”
들을 것도 없이 바로 콜했다.
‘아크레나’, 마법사라면 모를 수 없는 이름이다. 수많은 마법 서적의 저자이자 세네카 마탑의 초대 마탑주. 그는 인간의 경지를 넘은 마법사라 불렸다. 마법사라면 누구나 가슴속에 그 이름을 품고 살아간다고 저자 아크레나의 《초보 마법사 1편》에 나왔다.
자서전도 아닌, 초보를 위한 가이드 책에서도 자기 자랑을 늘어놓길 좋아하는 늙은 마법사지만, 그 누구도 실력으로 왈가왈부할 수 없는 위대한 마법사. 그런 그의 팔찌라니, 당연히 돈을 주고서라도 사야 했다.
내가 아크레나의 오타쿠라 그의 팔찌를 수집하는 게 아니다. 아크레나의 액세서리는 전부 보통 마법사가 만들기는 어려운 유용한 마법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중에서 엠버 팔찌는 마법을 쓸 때 사용하는 마나의 양을 절반이나 줄여 주는 마법의 팔찌다. 마나를 생성하지 못해 한정적인 나에게는 꼭 필요한 물건이다. 근데 아크레나의 팔찌가 왜 프레오나에 있어?
“팔찌는 확실히 있는 건가?”
“예, 있습니다.”
“어째서 그 팔찌가 프레오나에 있는 거지? 아크레나는 일생 세네카를 벗어나지 않았는데.”
“제 아버지께서 아크레나의 제자를 도와준 대가로 받았다고 합니다. 저희야 마법과는 연이 없으니 무용지물이지만 전하께서는 세네카의 사람이니 사용 목적이나 수집 목적으로 좋은 물건이 아닐까 하여….”
영주 너 뭘 좀 아는구나. 나를 어떻게 꼬셔야 하는지 잘 알고 있어.
나는 젠을 향해 노반이 자주 사용하는 장화 신은 고양이 눈을 따라 하며 깜빡거렸다. ‘나 저거 가지고 싶어.’ 그 눈빛에 그는 아무 말 없이 영주를 본 뒤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줬다. 노반이 해야 통하는 건 줄 알았는데, 이게 먹혔네?
“출발은 언제지?”
“내일 새벽에 출발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나 빨리 출발하는 것인가?”
“예, 한시가 급합니다.”
영주는 죄송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사람 피곤하게 왜 그렇게 빨리 출발하냐 화내기도 뭐하고, 젠의 눈치를 보다 속상한 마음에 아랫입술을 말아 넣었다. 그냥 가지 말라고 할까. 복잡한 내 속마음과는 다른 무덤덤한 젠에게 토벌에 참여해도 정말 괜찮겠냐 의사를 물었지만 그는 그저 묵묵하게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젠은 영주성에서 토벌을 위한 전투 준비를 하기로 했고, 나는 내일 해가 뜨는 대로 저택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아크레나의 팔찌는 영주의 옛 성채에 있는 개인 금고 안에 있다 했다. 옛 성채에 가기 위해서는 산을 넘어야 해 시간이 좀 걸리니 내일 아침에 사람을 보내 가져오겠다며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알겠다며 시간을 벌어 줬다.
계약서도 썼으니 딴말은 못 할 테고, 가져온 팔찌가 모조품인지 아닌지는 마법을 사용해 보면 단번에 알 수 있을 테니 사기당할 걱정은 없었다. 영주가 황자인 나를 상대로 사기를 치려 하진 않을 거라는 예측도 포함해서 내린 결정이다. 마음이 넓은 사채업자가 된 느낌이다.
상황이 대충 정리가 되니 있어야 할 사람과 한 존재가 보이지 않았다.
“내 일행인 여인과 아이는 어디 있지?”
“그분들은 이곳이 불편하신 듯하여 기사를 대동해 거처로 보내 드렸습니다.”
마린과 노반은 저택에 있단다. 뭐야, 저택에 간 줄 알았으면 괜히 왔잖아. 아니지, 팔찌를 얻었으니 괜히 온 건 아니다. 아, 의사도 몇 명 돌려보내라고 말해야 하는데…. 다들 바빠 보이는데 내일 아침에 하지 뭐.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푸른색의 보타이를 맨 근육질의 시종이 정중한 태도로 우리를 안내했다. 이 영주성은 시종조차 몸이 좋다. 직원 채용 기준이 빵빵한 근육인가? 그렇다면 나는 광탈이다.
안내받은 방은 5성급 호텔 스위트룸 못지않게 넓고 좋은 방이었다. 방도 좋고 온도도 좋고 이 방의 모든 것이 다 좋았지만, 혼자 들어가기 꺼려졌다. 낯선 곳에서 일행과 떨어져 혼자 잠에 드는 건 무섭다. 다 큰 어른인데 뭐 그게 무섭냐 하면 할 말은 없지만, 내 미모가 보통 미모가 아닌지라 아무리 안전하다 해도 경계를 안 할 수가 없다. 어쩔까 고민하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려는 젠을 붙잡았다.
“저기, 젠….”
“네, 미르 님.”
“오늘 같이 자면 안 될까?”
같이 자자는 내 말에 방에 들어가려던 젠은 방 앞에 멈춰 서서 침묵을 했고, 아직 물러가지 않은 보타이의 시종은 얼굴이 뻘개져선 서둘러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그 시종의 뒤꽁무니를 보고서야 생각이 났다. 저들은 나와 젠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알고 있을 거란 걸. 그래서 저렇게 꽁지 빠지게 도망간 거구나. 그렇지만 이상한 뜻으로 같이 자자 한 게 아닌데. 저 시종은 머릿속에 뭐가 든 거야?
의도치 않게 자리를 피한 시종 덕에 텅텅 비어 있는 복도에는 머쓱해진 나와 어색해진 젠 단둘이 남았다. 우리 사이에 흐르는 민망한 공기를 억지로 흘려보낸 뒤, 아직 방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젠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혼자 자기 무서워서….”
“….”
“나 코도 안 골고 잠버릇도 없는데….”
더욱 무안해진 듯한 느낌에 되는 대로 말을 쏟아냈고, 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곧이어 정적이 찾아오자 그는 한숨을 쉰 뒤 입을 열었다.
“전 안 무서우신가요?”
“응?”
“제가 나쁜 마음이라도 품으면 어쩌시려고요.”
“안 그럴 거잖아.”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젠은 내게 나쁜 짓 안 해. 하려 했다면 진작 했을 거다. 지금까지 기회가 얼마나 많았는데. 나의 단호한 부정에 그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난 너 믿어.”
확신을 담아 말했다. 믿는다고. 그에 맥 빠지는 표정을 지은 젠이 믿는다는 나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반박했다.
“제 무엇을 보고 믿으신다는 건지 모르겠군요.”
“내가 본 너를 믿는 것뿐이야.”
“당신이 밉다는 제 말은 기억나지 않는 건가요?”
“이젠 모르겠다며. 그럼 알아 가면 되지. 걱정 마, 손만 잡고 잘게!”
처음보다 분위기가 조금 풀어진 틈을 이용해 그의 손을 막무가내로 잡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말이 많은 남자는 인기가 없답니다. 물론 젠이라면 말이 많아도 좋았겠지만.
깨끗한 방 안으로 들어가니 세례라도 받는 듯한 느낌으로 씻어야 할 것 같았다. 어차피 상가를 돌아다니면서 흙먼지를 뒤집어썼을 테니 자기 전에는 씻어야 했다.
젠은 나와 함께 방을 쓰는 것에 대해 반쯤 포기한 듯해 보였다. 그는 무언가 꺼림칙한 게 없나 방을 살펴보고 있었는데, 나는 그런 그에게 수줍게 다가가 물었다.
“같이 씻을래?”
“미르 님.”
“농담 아닌데. 난 빨리 자고 싶고, 넌 새벽에 나가야 하잖아. 뭐야? 이상한 생각 했어?”
“전 괜찮으니 먼저 씻으세요.”
젠은 어지럽다는 듯 관자놀이를 짚으며 나를 욕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친구가 되려면 사우나를 가라는 말이 있는데, 아무래도 이곳에서는 이루기 힘들 것 같다.
방이 큰 만큼 욕실도 굉장히 컸다. 성인 남성 여섯 명이 충분히 들어갈 것 같은 크기의 욕조와 한쪽 벽을 전부 차지하는 거울이 있었다. 거울이라니, 이거 완전… 그거잖아.
생각하면 할수록 부끄러운 잡념을 떨치고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이런 큰 욕조는 시중을 들어 줄 사람이 없으면 사용하기 불편하지만 대충 잘 씻었다. 젖은 몸을 긴 수건으로 닦은 뒤, 욕실 안 행거에 걸려 있는 붉은색의 캐시미어 가운을 입었다. 축축하게 젖은 머리를 털어 내며 욕실 밖으로 나갔다. 내가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젠이 빈 욕실로 들어갔다.
침대는 두 명이서 자도 좁지 않을 크기였다. 아직 잘 시간은 아니었지만 할 것도 없고 하니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두툼한 이불과 입고 있는 캐시미어 가운의 보들보들한 감촉에 저절로 눈이 감겼다. 젠이 씻고 나올 때까지 눈만 감고 있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