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크로스반 영주성에 감금되다 (2)
똑똑똑.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그 소리에 멀어졌던 정신이 돌아왔다. 잠깐 눈만 감고 있으려 했는데 깜박 잠이 들었나 보다. 많이 피곤했나.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시선을 조금 올리자 침대 등받이에 기대어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젠과 눈이 마주쳤다. 내가 눈을 뜬 것을 본 그는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흘러내린 이불을 덮어 주었다.
“더 주무셔도 돼요.”
“밖에 누가….”
“저녁 식사 물어보러 온 것 같아요. 배고프신가요?”
“난 괜찮은데… 젠은?”
“저도 괜찮아요. 주무세요.”
“으응….”
짧게 하품을 한 뒤 다시 눈을 감았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조심히 넘겨 주는 그의 손길이 느껴졌다.
“좋은 꿈 꾸세요.”
* * *
아침 새의 지저귀는 소리로 하루를 시작하며 눈을 떴다.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내 옆에 있었던 젠은 새벽에 떠났는지 머물렀던 옆자리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모처럼 같은 곳에서 잤으니 같은 시간에 눈을 떴으면 좋았을 텐데.
볼일도 없는데 얼른 팔찌를 받아서 저택으로 돌아가 노반의 털을 쓰다듬고 싶었다. 붉은색의 캐시미어 가운을 벗고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새 옷을 입었다. 누가 준비했는지는 몰라도 새 옷을 가져다 놓은 건 센스가 있네.
방 밖으로 나왔다. 이상하게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고 썰렁했다. 시종이 지나다녀야 할 텐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 영주성의 본관으로 걸어갔다. 본관에는 내가 있던 복도와 달리 여러 시종들이 있었는데, 나를 발견한 보라색의 보타이를 맨 시종이 당당하지만 품위 있는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황자님. 저는 이 영주성의 시종장 헤더라스라고 합니다. 간밤엔 편하게 보내셨는지요.”
“덕분이다. 마물 토벌대는 떠났는가?”
“예, 오늘 새벽에 떠났습니다. 아침에는 직접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황자님께서 일어나시기 전까지 깨우지 말라는 이프리트 경의 당부가 있었습니다.”
그냥 깨워도 될 텐데. 낯선 사람이 들어와서 놀라지 않게 배려해 준 건가? 사소한 부분에서도 다정한 게 젠다웠다.
“그랬군. 그런 거라면 미안해하지 않아도 좋아. 영주는 어디에 있지?”
“영주께서는 공자님의 병간호를 하고 계십니다.”
“불러 주게.”
시종장 헤더라스는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내 명을 따르려 영주를 부르러 갔고, 헤더라스와 같이 있었던 푸른색의 보타이를 맨 시종이 혼자 남게 된 나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어제 젠과 함께 들어갔던 응접실에 혼자 들어가니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적진에 무기 없이 들어온 느낌이랄까. 조금 불안한 것 같다.
영주가 오면 팔찌와 의사 이야기를 한 뒤 바로 저택으로 보내 달라 할 요량이었다. 영주의 죽을 것 같은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세네카의 4황자님을…. 쿨럭쿨럭! 죄송합니다. 세네카의 4황자님을 뵙습니다. 쿨럭…!”
“…그대 꼴이 말이 아니군. 어제보다 더 심해진 것 같아. 병간호를 얼마나 정성스레 하면 사람이 이렇게 되는 거지?”
“아닙니다. 신경 쓸 일이 많아 잠깐 쇠약해진 것뿐입니다.”
이래서는 의사를 풀어 달라고 강하게 말할 수도 없겠다. 긴장했던 게 무색할 만큼 영주는 약해 보였다. 한 대만 때려도 뒤로 넘어갈 것 같은데. 저 뒤에 서 있는 근육빵빵맨만 없으면 가능한데.
“그래, 그대 건강이니 그대가 알아서 잘하겠지. 아크레나의 팔찌를 받으러 왔네.”
“황자님, 그것이….”
팔찌를 달라는 말에 영주는 뭐가 마려운 듯한 얼굴을 하며 말꼬리를 늘였다. 설마 먹튀하려는 건 아니겠지? 내 사랑스러운 젠은 이미 토벌을 떠났는데 팔찌가 없다고 하기만 해 봐, 영주성 탈탈 털어 버릴 테니까.
“무엇인가.”
“금고로 간 기사가 마물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하아…. 그래서.”
“수색대에게 수색을 지시했으니 머지않아 소식을 듣게 될 겁니다. 팔찌를 찾지 못하게 되면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니 정말 송구하오나 그때까지 영주성에 머무소서.”
젠장.
“팔찌는 나중에 사람을 보낼 테니 그때 전해 주면 된다. 신경 쓰지 말거라. 내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마차를 쓸 수 있겠나?”
“송구합니다. 마물 토벌대와 수색대로 기사들을 보내서 남는 인력이 없습니다.”
그러니 수색대가 올 때까지 영주성에서 머무르라고? 어쩐지 뒷골이 슬슬 아파진다 했는데 이것 때문이었나 보다. 승마를 못 하니 말을 타고 갈 수도 없고, 마차를 몰 수도 없고, 저택에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다. 아, 기사가 없다면 영지민한테 부탁해도 되는 일일 텐데. 영주에게 마커스를 불러 달라 이야기를 하려 할 때 닫혀 있는 응접실의 문을 누군가가 급하게 두들겼다.
“영주님! 공자님께서 눈을 뜨셨습니다!”
“로이가 말이냐!”
시종의 힘찬 외침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보이지 않던 영주의 얼굴이 보였다. 피곤에 찌든 얼굴이었지만 그 사이의 기쁨이 보였다. 영주는 한시라도 빨리 가야 되는 듯 다급한 얼굴을 한 채 내게 서둘러 인사를 하고는 사라졌다. 소란스러웠던 응접실은 한순간에 고요해졌고 내 곁에는 시종장 헤더라스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여기 황자 취급 뭐냐.
“…아이가 많이 아픈가?”
“예, 반년 전부터 시름시름 앓으시더니 이젠 눈을 뜨는 것도 힘겨운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랬군.”
“여러 의사를 불러 보았지만 그들 모두 병명을 알지 못하고 간신히 공자님의 생만 유지하고 있습니다. 불쌍한 로이 공자님…. 흑.”
“….”
또르르, 우는 척을 하는 시종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봤다. 우는데 뭐, 어쩌라고. 같이 울어 달라고?
“엇…! 물론 공자님의 상태와 상관없이 황자님께서 이 크로스반 영주성에 머무시는 동안 최상의 보필을 하겠습니다! 영주성을 구경하시겠습니까?”
“구경은 괜찮네. 책을 읽고 싶은데 서재에 들어가 봐도 되겠는가?”
“아, 예! 영주님께선 황자님이 무엇을 원하시든 다 맞춰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영주님의 서재로 안내하겠습니다.”
아니아니, 아무리 황자라도 영주의 서재를 함부로 들어가면… 되겠지. 영주의 허락도 받았고, 난 황자니까.
헤더라스의 안내를 받아 영주의 서재로 들어갔다. 영주의 서재는 좋게 말하면 치열했고, 보이는 그대로 말하면 서류 지옥이었다. 천장을 뚫을 듯 가득 쌓인 서류가 책상은 물론 바닥까지 차지하고 있었다. 아들 챙기느라 일도 안 하고 있나 보다.
“여기선 책을 읽을 수 없겠군.”
《대륙의 역사》 저자 미상 책을 꺼내 들고 밖으로 나갔다. 어디 책을 읽기 좋은 장소가 없을지 헤더라스에게 물어보았지만 정원은 추워서 나가지 않는 게 좋다 하고, 내가 쓰던 방은 청소 중이니 나중에 들어가라 했다. 덕분에 정원이 가장 잘 보이는 방으로 안내받았는데 그 방이 이 영주성의 하나뿐인 영애의 방이란 걸 알았다면 들어가지 않았을 거다. 이곳에 있을 동안 외롭지 않게 친구 만들어 주려고 영애의 방으로 안내한 건 아닐 테고.
어색하니 당장이라도 마커스를 불러 달라 하고 싶지만 헤더라스는 차와 쿠키를 가져온다며 나를 영애의 방에 내버려 두고 자리를 떠났다. 젠장. 아까부터 내가 밖으로 나가려고만 하면 말을 돌리거나 시선을 피한다. 이거 일부러 그러는 거지? 공자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잡아 두는 게 틀림없다.
어색한 공기에 괜히 눈을 돌려 방을 구경하니 책상과 침대가 전부인 휑한 방이었다. 여자 남자를 떠나서 아이가 쓰는 방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텅 빈 방이었다.
“세네카의 4황자를 뵙습니다.”
“그래….”
“클로에 크로스반이라 합니다.”
“그래….”
“부디 편하게 쓰십시오.”
“고맙구나….”
아름다운 적발을 하나로 묶어 올린 여자아이는 병상에 누워 있는 로이 크로스반의 쌍둥이 동생이라 했다. 내가 소파에 앉아 책을 읽을 동안 클로에는 얌전히 책상에 앉아 공부를 했다. 무슨 공부를 하나 슬쩍 쳐다봤을 때, 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든 클로에와 눈이 마주쳤다.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그대는 나이가 어떻게 되지?”
“생일을 넘겨 열다섯 살이 되었습니다.”
열다섯 살이면 아직 아이의 태가 나야 하는데 클로에는 아이의 느낌이 전혀 나지 않는 아이였다. 잘은 모르지만 귀족 영애들은 친구들 만나서 차 마시고 뒷담 까면서 놀아야 하는 거 아닌가? 얘는 왜 방에 처박혀서 공부만 하고 있는 거냐.
“다른 일정이 없는 것인가? 영애들과의 티타임 같은.”
“공부하는 것이 일정입니다. 영애들과의 티타임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렇군.”
클로에는 보고 있던 책을 살포시 내려 치우고는 나와 시선을 맞췄다. 그러더니 담담한 말투로 내게 말했다.
“혹시 제가 있는 게 불편하시다면 나가 드리겠습니다.”
“…이 방은 그대의 방이 아닌가. 불편하다면 내가 나가야지 그대가 나갈 필요 없다. 그저 궁금해 물어본 것이니 신경 쓰지 말게.”
“네, 알겠습니다.”
다시 책을 들어 올린 클로에는 나를 신경 쓰지 않고 책을 읽는 것에 집중했다. 열다섯 살의 소녀가 내 얼굴을 보고도 차분하게 있을 수 있다니 믿기지 않았지만, 이곳의 시종들의 몸매가 전부 우락부락한 것을 떠올리곤 나처럼 허약 미인은 클로에의 취향이 아닐 거라 생각하며 위로했다. 그래, 요즘은 비실비실한 것보다 떡대 어쩌구가 뜨던데, 나였어도 비실이보단 떡대를 골랐을 거다.
심심하고 지루하다. 책을 가져오긴 했지만 전혀 흥미가 당기지 않았다. 《대륙의 역사》라니, 하필 가져와도 이런 책을 가져왔는지. 가져올 당시에는 재밌을 것 같았지만 막상 읽으려니 이것만큼 재미없는 책도 없다.
“하아….”
“황자님?”
“아, 미안하구나.”
나가고 싶다. 전력을 다해 나가고 싶다. 차와 쿠키를 가져오겠다는 헤더라스를 포함해 다른 시종들의 발자국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고, 클로에는 열다섯의 아이답지 않게 책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