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크로스반 영주성에 감금되다 (3)
이럴 시간에 얼른 저택에 가서 노반의 털을 쓰다듬고 싶다. 우리 노반이 활짝 웃는 모습은 하루 종일 봐도 안 질리는데 왜 나는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인가 회의감이 든다. 그냥 당당하게 걸어서 나갈까. 황자가 나간다는데 누가 잡아.
“클로에, 내가 저택으로 돌아갔다고 영주에게 전해 주겠나?”
“혼자 가신다는 겁니까? 위험합니다.”
“이곳에 있는 건 시간 낭비이니 돌아가는 게 맞겠지.”
“아마 못 나가실 겁니다.”
영주성을 나가려던 나를 클로에가 붙잡았다. 클로에는 이 영주성을 곱게는 나가지 못할 거라 말하며 애잔한 얼굴을 했는데, 난 전혀 애잔한 상태가 아니었다. 따지자면 조금 귀찮아졌을 뿐이지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나갈 수 있었다. 마법을 사용해야 해서 조금 위태할 뿐이지만.
“그럴 것 같군. 나를 이곳에 가두려는 게 뻔히 보이니 성문도 닫혀 있겠지. 그래도 뚫린 구멍이 하나쯤은 있지 않겠나.”
“아, 알고 계셨습니까?”
“그래, 하는 꼴들을 보니 그러더군.”
내가 영주성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영주성의 시종들이 은근히 막고 있는 것을 클로에도 알고 있었다. 그래, 모를 리가 없었겠지. 나를 이곳에 넣은 것도 클로에를 이용해 나를 잡아 두라고 시켜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게 아니라면 어째서 어린 영애의 방에 미혼의 황자를 들이미냐고.
조금 놀란 듯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오는 클로에를 빤히 바라봤다. 조심스레 내 눈치를 보는 그녀에게 이미 대충 알고 있으니 큰 벌을 받기 싫다면 아는 것을 말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정중하게 부탁과 같은 협박을 하자 클로에는 잠시 생각하다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영주님의 생각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황자님이 당분간 영주성에 머물고 싶게 하라 했습니다.”
“아들 때문이 아닌가? 영지에는 내 의술이 뛰어나다 알려졌을 테니.”
“그건 아닐 겁니다. 영주님은 확실한 것만 믿으시니 단순한 소문 때문에 황자님을 잡아 두는 무모한 짓을 하진 않으실 겁니다.”
조금 부끄러워졌다. 지금까지 영주가 내 의학 지식을 노리고 잡아 온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아니라니 다행이긴 한데….
“그럼 젠 때문인가….”
“네, 그럴 겁니다. 북쪽은 옛날부터 마물의 수가 다른 지역보다 배는 많았습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이프리트 경의 도움을 받으려는 거겠죠.”
“젠의 도움이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이프리트 경이 황자님을 연모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아.”
그게 열다섯 살 아이한테까지 퍼졌냐. 하긴, 제국의 황태자가 살해당한 큰일이니 변방에 사는 아이한테까지 다 퍼졌겠지. 전 국민이 인정하는 공식 커플이 된 느낌이다. 실상 나와 젠은 사귀기는커녕 내가 젠의 계획을 다 망쳐서 밉다고 대차게 까였는데.
“어젯밤에도 서로 같은 방에서 주무셨다고 들었습니다.”
“….”
“시종들 사이에 소문이 파다합니다. 어젯밤에 이프리트 경이 새 옷도 준비해 놓으라고 하시고, 시종들에게 발소리도 내지 말라 하셨고, 방 문 근처에도 오지 말라고.”
“그랬대?”
“네. 그리고 저녁도 안 드시고, 문도 굳게 잠가 두셨다고, 밤새 무엇을 하셨길래…라면서 시종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습니다.”
“그걸 네 앞에서 떠들었다고?”
“제 앞에서는 아니고, 그냥 들었습니다.”
“하아….”
“전 편견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그건 고맙구나…가 아니라….”
클로에는 혼란스러운 나를 향해 옅게 미소를 지었다. 지금껏 차분한 표정을 유지하던 클로에가 웃는 건 처음 보지만 하필 이런 대화할 때 웃어야겠어? 이 영주성은 시종들 입단속을 잘 시켜야겠네. 애가 뭘 배우겠어!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영주가 나를 잡아 두는 이유는 내 의학 지식 때문이 아니라 젠의 힘이 필요해서란 거지? 하기야 젠이 보통 사람은 아니지. 오우거도 한 방에 끝내 버리는 젠의 실력이라면 마물이 들끓는 북쪽 땅의 영주로서는 어떻게 해서든 잡아 두고 싶을 거고, 평소라면 제국의 이프리트 백작에겐 말도 걸지 못할 테지만 지금 상황이라면 훨씬 편하게 접촉할 수 있으니 지금을 이용하고 싶은 거겠지. 이해한다.
“이번 토벌이 끝나면 또 한 번의 토벌이 있습니다. 아마 그것 때문에 황자님을 영주성에 머무르게 하는 거겠죠.”
“그렇군. 그렇지만 후환은 어찌하려고. 날 잡아 둔 것을 젠이 알게 되면…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은데.”
“제가 황자님과 가까워지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을 겁니다.”
“아이를 이용하겠다, 그런 건가?”
“네, 그런 거죠.”
“누구의 의견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쓸모없군. 그나저나 넌 네 아버지를 영주님이라 부르는 건가?”
“네, 사이가 그리 좋지 않습니다.”
“왜지?”
심심한데 가정사나 들어 보자. 멀뚱히 서 있는 클로에를 소파에 앉혔다. 순순히 따라 앉은 클로에는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고민했다.
“영주님이 재혼하시고부터 사이가 안 좋아졌습니다.”
“새엄마? 새엄마가 너 괴롭혀?”
“아뇨, 부인은 오히려 잘해 줍니다. 그치만….”
“그치만?”
“그냥 싫습니다. 아무리 잘해 줘도 싫습니다.”
클로에는 새엄마가 이유 없이 그냥 싫다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별다른 이유가 없는데도 새엄마를 좋아할 수 없는 자신의 좁은 마음이 싫은 거다.
그나저나 조금 의외다. 딱딱한 말투도 그렇고 클로에는 또래의 아이들보다 성숙하고 철이 들었다 생각했는데, 새엄마가 싫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그제야 조금 어린아이 같아 보였다.
“그럴 수도 있지. 세상 모든 사람을 좋아할 순 없잖아. 나도 싫어하는 사람 많아.”
“정말이십니까?”
“응. 너한테만 말해 주는 비밀인데, 난 오스먼드 황제도 싫고, 우리 제국의 퍼디스라고 3황자도 싫어해. 또 누구 싫어하냐. 아, 세네카 황제도 싫고 황후도 싫다. 그리고 죽은 타루스도 싫고, 우리 노반 괴롭힌 새끼도 싫고, 꼰대 귀족들도 싫어. 그리고 내가 어렸을 때는 지금보다 더 이쁘게 생겨서 들러붙는 애들이 아주 많았는데 걔네도 다 싫어. 남녀 불문하고 호박같이 생긴 것들이 작업 걸어 보겠다고 찝쩍대는 게 얼마나 고통인 줄 아니? 이쁘거나 잘생기면 눈이라도 호강하지, 어휴.”
클로에는 내 입에서 줄줄 쏟아져 나오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처럼 순수하고 사랑스럽게 생긴 미인이 싫어하는 사람이 손가락으로 다 못 셀 정도로 많이 있다는 게 놀라운가 보다. 그래, 내가 좀 천사처럼 생겼지.
“많지? 그치만 좋아하는 사람도 많아. 그럼 된 거지.”
“네.”
“비밀이다?”
“네, 비밀 꼭 지키겠습니다.”
클로에는 작은 주먹을 꽉 쥐고 황자님의 비밀을 꼭 지키겠다며 굳게 약속했다.
* * *
“그러니까, 넌 새엄마가 싫은데 너네 아빠가 엄마라 부르라고 했고, 그게 너무 싫어서 아빠도 영주님이라 부른다 이거야?”
“네.”
난 그 이유가 맞다고 깔끔하게 인정하는 클로에의 당찬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강단 있네. 맘에 든다.”
“헤헤.”
친해질 때는 뒷담만 한 게 없다고, 클로에의 새엄마 이야기를 하면서 클로에와 친해졌다. 무뚝뚝했던 말투도 부드러운 아이의 말투로 바뀌었고, 각을 잡고 있던 자세도 많이 풀렸다. 역시 빠르게 친해질 땐 남 까는 게 최고다.
슬슬 점심 먹을 시간이었다. 어제는 저녁을 먹지 않았고 오늘은 아침도 먹지 않았지만 워낙 위가 작아서인지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런 성대한 궁에서 밥을 먹는다 생각하면 프레오나 별궁에서 살았을 때의 기름진 고기 위주 식단이 떠올라서 먹기가 싫었다. 으엑.
“어쨌든, 젠이 올 때까지 난 못 나갈 거다 이 말이지?”
“네, 아마도 그럴 거 같아요.”
“그럼 어쩔 수 없지. 여기 밥 맛있어?”
“맛있어요. 저희는 바빠서 잘 안 먹지만.”
“채소는?”
“채소도 많이 줘요.”
“그럼 됐어.”
아직도 잊지 못한다, 기름진 고깃덩이만 덜렁 내오던 로테 별궁의 주방장을. 다시 한번 만나기만 해 봐, 요리할 때마다 재난이 일어나게 해 주마. 아니, 요리를 아예 못 하게 해 주마.
“토벌 기간은 일주일 정도지?”
“네, 바로 근처 산맥이니까 고전만 하지 않는다면 빠르게 끝날 것 같아요.”
“그럼 일주일만 버티지 뭐.”
나간다는 생각을 포기했다. 무거운 마음을 버리고 소파에 편하게 기대어 누웠다. 노반과 마린이 보고 싶다. 그들과 함께 있었다면 일주일이든 한 달이든 젠을 기다리며 얼마든지 영주성에 붙어 있을 수 있는데.
지금쯤 우리 노반은 뭐 하고 있을까. 오늘도 텃밭 정리한다고 방방 뛰고 있으려나. 유독 딸기청을 좋아하던데 마린이 잘 줬겠지? 나 보고 싶어서 우는 거 아니야? 우리 노반은 아직 어려서 부모의 품을 떠나면 안 되는데 내가 떠나 버려서 어떡하냐, 진짜.
“밥 먹고 영주성 구경 좀 시켜 주라.”
“영주성은 저보단 제 오빠가 더 잘 알고 있는데….”
“아, 로이?”
“제 오빠를 보셨습니까?”
클로에는 자신의 오빠 이야기가 나오자 눈을 반짝 떴다. 그러고는 작은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대답을 기다렸다.
“못 봤어. 다들 로이 이야기를 하길래 얻어들은 거지. 로이 공자님의 병세가 어쩌구저쩌구….”
“아아….”
“보러 가 볼까? 눈도 떴다던데.”
“정말요?”
“응. 못 들었어?”
“오빠 곁에는 영주님이랑 부인이 하루 종일 붙어 있어서….”
즉, 새엄마랑 아빠를 보기 싫어서 안 간다는 거다. 강단이 있는 만큼 고집도 엄청 세네.
“보고 싶어? 많이? 어떻게 해서든?”
“그럼요. 오빠 곁에서 부인만 떨어져 있으면 하루 종일 붙어 있을 텐데.”
“그럼 나랑 거래할까?”
“네?”
“내가 네 오빠한테서 일시적으로나마 그 부인 떨어트려 주면 뭐 해 줄 거야?”
어린아이랑 거래를 하는 건 조금 치사하지만 지금의 나는 무척이나 심심하니까.
“저한테 바라시는 게 있으신가요?”
“아니, 딱히 바라는 건 없는데, 난 세상에 공짜는 없다 생각하는 사람이거든. 조금 냉정하게 말해서 미안하지만, 내가 너에게 이유 없는 호의를 베풀기엔 우린 오늘 만났고.”
세상에 공짜는 없다. 모두 착한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니까. 베풀 수 있는 사람들은 베풀어야 한다고 배우지만 막상 베푸는 사람은 없다. 다들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고 조금이라도 더 가지고 싶어 한다. 욕망이 있는 한 세상에 믿을 사람 없다.
“전 황자님께 드릴 수 있는 게 없어요.”
“있을걸.”
“정말 없는걸요.”
“지금은 없어도, 미래의 너는 있겠지.”
“미래요?”
클로에는 한없이 순수한 눈으로 되물었다.
너는 영주성의 하나뿐인 영애이자 곧 죽을지도 모르는 후계자의 쌍둥이 동생이지. 미래의 너는 갖고 있는 게 많을 거야. 나는 그 미래의 너에게 삥을 뜯을 생각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