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크로스반 영주성에 감금되다 (4)
“넌 커서 뭐 할 거야? 다른 귀족 영식에게 시집가려나?”
“아뇨, 결혼은 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약혼도 미루고 있고.”
“그럼 뭐 할 거야?”
“가능하다면 여행을 갈 생각입니다. 영주님이 허락해 주실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미래의 클로에에겐 돈이든 뭐든 물질적인 것을 뜯어내긴 힘들 것 같다.
“그럼 이렇게 하자. 네가 성인이 되고, 여행을 갈 수 있다면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곳의 기념품을 나한테 선물해 줘.”
“좋아요!”
“좋아, 계약서 쓰자.”
신이 나서 자신에게 불리할지도 모르는 계약서를 작성하는 클로에를 보고 속에서 우러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여행을 가긴 뭘 가, 계약서의 중요성도 모르고 있는데. 여행을 다니면 못된 놈들을 만나 가진 거 다 털릴 기세다.
불쌍한 중생 하나 살린다는 마음으로 어른스러운 젠의 말투를 따라 하며 나긋하게 말했다.
“클로에, 계약서는 함부로 막 쓰고 그러면 안 되는 거야.”
“네?”
“배울 게 아직 많구나. 그래, 다 세상 경험해 보면서 배우는 거지.”
“네?”
“아니야. 쓰던 거 계속 써. 만약 약속 못 지키면 크로스반 영주성 내 꺼.”
“네!”
“뭘 ‘네!’야! 네 것도 아니잖아. 그러지 말고, 못 지키면 100년 동안 내 수발들기로 하자.”
“네!”
새엄마를 피하느라 한동안 보지 못했던 로이를 볼 수 있다는 것과,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 여행을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으로 머릿속이 꽉 찼구나. 그 무뚝뚝하고 똑 부러지던 애는 어디 가고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불공정 계약을 하고 있는 너는 누구니?
“클로에… 너한테 공부 가르쳐 주는 사람 있어?”
“스승님이요? 네, 있어요.”
“데려와. 아주 작살을 내 버려야지.”
“네?”
전담 스승도 있는데 이런 식이면 안 되지. 그 스승 아주 날로 먹고 있어. 스승 데려와!
“내가 지금 너한테 하는 건 사기라고 하는 거야, 사기.”
“황자님께서 사기요?”
“그래. 내가 황자고 뭐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착하기만 한 건 아니야. 황제도 사기를 칠 수 있다고.”
황제도 사기를 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클로에는 말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황제가 되어서 어떻게 사기를 칠 수 있냐고 물었다. 오스먼드의 실체를 낱낱이 까발려 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황족 시해죄로 끌려가게 될 것 같아 꾹 참았다. 사실 오스먼드 황제가 싫다고 했을 때도 조금 위험했지.
“생각해 봐, 내가 너한테 해 주는 건 아주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야. 내가 네 동생을 봐야 하니 잠깐 자리 비켜 달라 하면 너네 부모님은 싫어도 비켜야 돼. 왜? 난 세네카의 황자니까. 나한텐 이렇게 간단한 일인데, 넌 나한테 무엇을 주려 했지? 영주성? 너의 100년?”
“아.”
“뭐든지 수지가 맞아야 계약을 하는 거야, 알겠니?”
“네!”
“그래, 알았다니 다행이네. 그래도 못 하면 100년은 내 수발을 들어야 해, 알았지?”
“네!”
클로에는 나무판자가 맞았는지 대놓고 치는 사기에도 해맑게 웃으며, 심지어는 고개까지 끄덕이며 대답했다.
하아, 방금까지 나는 나무판자에게 이야기를 한 건가? 차게 식은 눈으로 클로에를 바라봤다. 그 차가운 눈빛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클로에가 내가 원하는 대답을 내뱉었다.
“아! 안 돼요!”
“다 널 위해서야.”
“아닌 거 알아요!”
“그래, 그렇게 하는 거야.”
하나님, 제가 오늘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양을 구했습니다. 잘했다는 상으로 우리 젠 안전하게, 아무 탈 없이, 얼른 돌아오게 해 주세요. 시간이 조금 남으신다면 여기서 절 꺼내 주셔도 괜찮고요. 조금 더 시간이 남으신다면 제 발기 부전 좀 어떻게 해 주실 수 없을까요. 남자 자존심이 있지, 아무리 야한 생각을 해도 안 서요!
“황자님, 계약서 다 썼어요!”
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클로에는 무언가를 끄적거리더니 계약서를 썼다며 다 쓴 계약서를 두 손으로 내밀었다. 상기된 표정의 클로에가 건네주는 계약서를 받아 꼼꼼하게 읽었다.
<계약서
나 클로에 크로스반은 세네카의 4황자님께 여행 기념품을 주지 못하게 되면 남은 생 100년을 황자님의 수발을 들며 살아갈 것을 약속합니다. 그것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크로스반 영주성을 황자님께 드리겠습니다.>
아주 가관이다.
“클로에….”
“네!”
“하아….”
“황자님?”
“난 네가 똑똑한 아이인 줄 알았는데… 실상은 붕어였구나. 그래도 넌 귀여우니까 비단잉어로 하자.”
마주친 녹색의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 빛났다. 옛적부터 붉은 머리카락과 녹색 눈동자는 똑똑하다는 전설이 있다. 클로에는 지혜의 상징인 붉은 머리카락과 지성의 상징인 녹색 눈동자 둘 다 가졌으면서 이렇게 멍청할 수가.
지금까지의 강의가 무쓸모가 되어 통탄의 눈물을 흘리고 싶을 지경이었지만 클로에는 아직 어린 아이니 상처를 받을까 싶어 꾹 참았다. 남의 집 아이는 놔두고 우리 집 노반은 어디 가서 사기당하고 다니지 않게 조기 교육을 잘 시켜 놔야겠다고 다짐했다. 아, 공부는 싫어하려나. 젠과 함께 공부하는 것도 싫어하던데.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도 나쁜 아빠 할게.
비단잉어만큼 단순한 클로에에게 여행은 깔끔하게 포기하고 그저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방법만 알려 줘야 하나 고민했지만,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황자님은 제게 해를 가하지 않을 거잖아요.”
“그렇지.”
“그렇다면 이 계약서로 영주님을 협박해 여행을 가는 게 가장 편한 방법이라 생각했어요.”
멍청하기는커녕 나도 생각지 못한 창의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황자와 한 계약으로 영주를 협박할 생각이라니! 정말 깜찍한 계획이 아닐 수가 없었다. 멍청한 줄 알았더니 반만 멍청하잖아? 아님, 멍청한 척을 한 건가.
“황자님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신 것 아니신가요?”
“난 단순하게 생각했었어. 협박할 생각은 하지 않았거든.”
“영주님은 고집불통이니 이렇게라도 해야 보내 주실 거 같아요. 황자님껜 죄송하지만….”
“아냐, 나야말로 비단잉어란 말 취소할게.”
싱크빅이 따로 없다. 하지만 협박을 할 거라면 이런 허술한 계약서로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거다. 게다가 내가 해를 가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야 할 텐데 오늘 처음 본 나를 너무 잘 믿었다.
“생각은 좋았지만, 날 너무 믿으면 안 되지. 우린 오늘 처음 봤잖아. 내가 비록 황자라고 해도, 사람은 10년을 봐도 모르는데 내 뭘 믿고 너를 덥석 내줘. 그리고 영주를 협박할 생각이라면 계약서가 이렇게 허술해서는 안 돼.”
“그런가요…?”
“응, 줘 봐.”
클로에가 쓴 허술한 계약서를 찢고 좀 그럴싸한 새로운 계약서를 작성했다.
<계약서
도브로미르 세네카(갑), 세네카의 4황자와 프레오나 제국의 클로에 크로스반(을)의 계약을 다음과 같이 체결한다.
제1조 (목적)
1. 갑은 을의 부탁인 영주와 부인이 없는 곳에서 로이 크로스반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2. 을은 갑에게 여러 곳을 둘러본 뒤 가장 좋았던 여행지의 기념품을 선물해 주어야 한다.
제2조 (기간)
1. 갑은 크로스반 영주성을 떠나기 전까지 을의 부탁을 들어 주어야 한다.
2. 을은 성인(만 18세)이 된 후, 여행을 떠나 10년 이내로 선물을 주어야 한다.
제3조 (거래 위반)
1. 갑은 을의 부탁을 들어 주지 못할 시 크로스반 영주성에 남아 을이 성인(만 18세)이 되기 전까지 스승이 되어야 한다.
2. 을은 갑에게 선물을 주지 못할 시 크로스반 영주성의 소유권을 갑에게 주거나 향후 100년을 갑의 수발을 들며 살아야 한다.
제4조 (계약 파기)
1. 계약 성사 시, 이 계약은 자동적으로 파기된다.
2. 모종의 이유로 계약을 파기해야 할 때, 갑과 을의 동의가 있다면 언제든지 이 계약은 파기될 수 있다.
도브로미르 세네카 (인)
클로에 크로스반 (인) >
처음 써 보는 계약서지만 그래도 클로에의 것보단 괜찮다고 생각한다. 건네받은 계약서를 꼼꼼하게 읽어 본 클로에는 알겠다며 서랍에서 가져온 인주로 지장을 찍었고, 나는 손가락이 더러워지는 게 싫어 펜을 빌려 사인을 했다.
“원본은 잘 숨겨 두고, 사본은 너네 영주 보여 줘서 협박해.”
“네! 감사합니다!”
“이거 가지고 뭘.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야지. 네 인생은 네 것이잖아.”
나눠 가진 계약서를 소중히 품에 안고선 밝게 웃는 클로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똑똑한 클로에는 내가 ‘대륙 최고 호구 황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클로에가 머리를 쓴다 해도 나한텐 상대가 안 되지.
방금의 계약은 오로지 클로에를 위한 계약이었지만, 내가 뜯어낼 목표는 클로에가 아닌 영주 놈이었다. 그동안 뻔뻔스런 영주 놈한테 간접적인 괴롭힘을 당한 불쌍한 나를 위해 이 시답지도 않는 귀찮은 짓을 했다.
의사를 깡그리 데려가서 내가 마을로 갈 때 마다 귀찮은 일이 일어났다는 점, 마린과 노반을 데려갔다는 말로 나를 협박해 영주성으로 오게 만든 점, 나를 이용해 젠을 사로잡으려는 점, 오늘 팔찌 준다면서 마물 핑계를 대며 안 주는 점,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두고 봐라, 영주. 네놈의 딸이 시집도 안 가고, 네 말도 더럽게 안 듣는 소신 있는 똑똑한 딸로 자라길 바란다. 하하하!
“점심 먹고 로이한테 가자.”
“네!”
앞으로 이렇게만 똑똑하게 자라 주렴. 그럼 영주는 내가 귀찮았던 것의 배는 더 귀찮아지겠지. 흥! 꼬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