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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먹고 싶어요-43화 (43/227)

43. 크로스반 영주성에 감금되다 (5)

차와 쿠키를 가져온다던 헤더라스는 공중으로 분해되었거나 증발한 게 틀림없다. 그가 올 낌새가 전혀 보이지 않기에 하는 수 없이 클로에의 시종을 불렀고, 곧이어 온 근육질 시종의 안내를 받으며 만찬실로 갔다. 그냥 방에서 먹어도 되는데 여기까지 올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만찬실 테이블 위에 차려진 휘황찬란한 음식을 보고 마음이 바뀌었다. 시종이 안내하는 자리에 앉아, 식탁 위에 있는 음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늘 무슨 파티해?”

“황자님이 오셔서가 아닐까요?”

붉은색의 테이블보가 깔린 테이블 위에는 다양한 음식들이 식탁을 꽉 채우고 있었는데, 음식들이 전부 눈이 아플 정도로 화려했다.

호박과 사과를 갈아 만든 애피타이저 수프, 말린 크랜베리를 올린 파릇파릇한 산 채소 위, 레몬제스트와 후추를 갈아 넣은 올리브오일을 곁들인 샐러드, 메인 요리로는 두껍고 붉은 생선살 위에 올려진 산초 절임과 허브를 통째로 넣어 버터와 구운 관자 요리, 브로콜리와 에멘탈 치즈를 갈아 올린 가리비, 허브를 속에 넣어 구운 돼지고기 스테이크, 식용 꽃을 올린 살치살 오일 파스타. 이것으로도 충분하건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근육질 시종은 닭인지 오리인지 모를 큼직한 새의 통구이를 식탁 정 가운데에 놓았다.

왠지 다음 식사 시간에도 지금처럼 막무가내로 메인 요리가 죄다 나올 것 같아 돌아가려는 시종을 붙잡고 최대한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늘은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는 이렇게 내오지 말았으면 하네. 다 먹지 못하니 곤란해.”

“하, 하지만 황자 전하께 올리는 음식을 허투루 내올 수는 없습니다.”

“됐네. 난 영주에게 폐를 끼치기 싫고, 애초에 많이 먹지도 못하니 음식이 아깝군. 그러니 앞으로는 적당히, 간단하게 내오길 바라네.”

“…예, 알겠습니다.”

내 강경한 눈빛에 꼬리를 내린 시종이 물러가고, 얌전히 포크를 들고 기다리던 클로에와 함께 가득 차려진 음식을 향해 눈을 빛냈다.

에피타이저로 나온 수프는 고소한 호박 맛이 강했지만 끝 맛에서 사과의 달달함이 느껴졌다. 여기 수프 맛집이네. 로테 별궁에 있었을 때 주방장의 실력이 이 정도만 됐어도 행복했을 텐데. 아, 지난 일은 떠올리지 말자.

수프를 싹 긁어 먹은 뒤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레몬제스트 샐러드와 가리비, 관자 요리를 먹었다. 이것 또한 대단한 맛이었다. 상큼한 맛의 레몬이 크랜베리의 단맛을 잡아 주고 끝 맛으로 쌉싸름한 후추의 풍미까지. 샐러드 콘테스트가 열린다면 단연 1등에 올라설 수 있는 대단한 샐러드였다. 관자와 가리비는 또 어떻고. 버터의 풍미와 알싸한 허브로 비린 맛을 완전히 휘어잡은 관자 요리와, 부드러운 치즈 속 브로콜리 알갱이가 톡톡 씹히는 독특한 식감의 가리비 요리도 압권이었다.

“존맛ㅌ…. 큼.”

“네?”

“아니야, 맛있다고.”

“다행이네요. 주방장이 좋아하겠어요.”

“이게 다 주방장 요리야?”

“그럴걸요? 제가 듣기로는 어떤 왕국에서 잘나가던 주방장이었는데 도망쳐 나왔다더라고요. 아, 이거 비밀이에요.”

“그래? 맛만 좋으면 됐지 뭐.”

주방장이 도망쳐 나오든 죽어서 나오든 음식 맛만 좋으면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 그나저나 음식 퀄리티 진짜 쩌네. 브로콜리와 치즈의 조합, 그리고 레몬과 크랜베리, 후추의 조합도 신선했다. 아직 안 먹은 음식도 많은데, 다 먹게 되면 주방장과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 봐야겠다며 당장이라도 주방장을 이곳으로 데리고 나오라고 명령 내릴 것 같단 말이지.

어디 가서 쉽게 먹을 수 없는 맛과 요리 센스였다. 내가 고급 레스토랑의 셰프였다면 당장이라도 스카우트하고 싶을 정도로.

“평소에도 이렇게 먹는 거야?”

“아뇨, 저희는 간단하게 먹어요. 먹는 것에 고집도 없고. 간단하게 빵이랑 잼? 점심은 고기나 생선 요리로 끝내고 저녁은 안 먹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

주방장 낭비 오진다. 그럴 거면 주방장 내놔. 내가 데려갈 테니까!

“오빠가 아픈 뒤로는 잘 먹지도 않았어요. 영주님 얼굴 보셨죠?”

아, 그 해골. 아파서 그렇게 마른 줄 알았는데, 단순하게 안 먹어서 마른 거였구나.

“아마 이렇게 성대하게 차린 것도 주방장이 신나서 그런 거 아닐까요? 오랜만에 음식을 제대로 먹어 줄 사람이 왔으니까요.”

“…이따가 주방장을 만나 볼 수 있을까?”

“주방장을요? 아! 칭찬해 주시려구요?”

레시피를 물어보려 했지만. 그래, 칭찬도 해 줘야겠지.

“응, 너무 맛있어서.”

“네, 말해 볼게요.”

“고마워. 마저 먹자.”

클로에와 대화를 끝내고 산초 절임이 올라간 붉은 살 생선을 먹었다. 산초는 알싸한 맛이 강했는데 그 알싸함이 지방이 많은 붉은 살 생선의 느끼함을 잡아 줬다.

생선 요리 다음으론 식용 꽃을 잔뜩 올린 살치살 오일 파스타를 먹었다. 꽃은 아무런 맛도 없었지만 오일에서 느껴지는 고소한 향이 무미의 꽃과 어울렸다. 연보라색의 꽃과 살치살, 파스타를 함께 먹으니 살살 녹는 부드러운 살치살의 식감과 느끼하지 않은 담백한 오일 파스타의 맛을 정통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건 딱 마린이 좋아할 것 같은데, 주방장이랑 만나면 레시피를 얻어야지.

중앙에 놓인 커다란 새의 통구이와 허브와 함께 구운 돼지고기 스테이크는 먹지 않았다. 먹지 않은 게 아니라 못 먹은 거다. 배가 엄청 부르기도 하고, 이상하게 좋은 곳에서 먹는 고기는 댕기지 않는다. 로테 별궁 주방장의 트라우마일지도.

“아, 배불러.”

“저두요. 아, 황자님, 주방장 곧 올 거래요!”

“그래?”

다 먹었지만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주방장을 위해 자리를 지켰다. 곧이어 푸른색의 보타이를 맨 시종이 검은 셰프복을 입은 할머니를 데리고 왔다.

“황자님, 이자를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아, 그대가 주방장인가?”

“그렇습니다.”

“좋군. 주방장과 단둘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자리를 피해 줄 수 있나? 클로에도.”

클로에는 알겠다는 뜻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볼일을 다 보고 천천히 나오라 했다.

시종과 클로에가 나가고, 텅 빈 만찬실엔 나와 주방장 할머니만 남아 있었다. 혼자 앉아 있는 게 불편해 주방장 할머니를 의자에 앉게 했다.

“비루하나, 크로스반 영주성의 식사를 담당하는 미네르바라고 합니다.”

“세네카의 4황자 도브로미르다. 내 오늘 그대의 요리를 너무 잘 먹었기에 인사차 불렀네. 가문의 이름이 따로 있나?”

“성은 버린 지 오래입니다.”

“그렇군.”

하얗게 센 머리카락을 쫙 올려 묶은 미네르바는 아직 정정해 보였다. 그런데 왜 곧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지 모르겠다. 어디 아픈가? 내가 신도 아니고, 그런 걸 알 리 없는데 말이야.

“내 그대를 부른 이유는 저 음식의 레시피를 알고 싶어서라네. 알려 줄 수 있겠는가?”

“레시피 말입니까?”

“그래. 특히 식용 꽃을 잔뜩 넣은 오일 파스타의 레시피를 알고 싶네. 내 친구가 좋아할 것 같아 꼭 알아 가고 싶군.”

“…그거라면 제가 아닌 제 손자의 요리입니다.”

“그럼 이 요리는 누구의 요리지?”

치즈와 브로콜리가 들어간 가리비 요리는 누구의 요리냐 물었더니 단단했던 미네르바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그것 또한 제 손자의 요리입니다.”

“그렇담 이 붉은 살 생선의 요리는?”

“그 요리도 제 손자의 요리입니다.”

파스타도 손자의 요리, 가리비 요리도 손자의 요리, 생선 요리도 손자의 요리란다. 그럼 주방장은 무슨 요리를 한 거지?

“그대의 요리는 무엇이지?”

“제가 만든 요리는 식전에 나온 수프와 스테이크와 오리 통구이입니다.”

“아, 그 수프 정말 맛있었네.”

“제일 잘하는 것 중 하나입니다. 황자님께서 즐겨 주셨다니 영광입니다.”

그래, 그 수프가 압권이었지. 뒤에 나온 요리들이 하나같이 화려한 요리들이라 까먹고 있었다. 그 수프 레시피도 알려 줬으면 좋겠는데 표정을 보니 안 알려 줄 것 같고.

“그대만 괜찮다면 요리의 레시피를 알고 싶은데.”

“…요리인에게 레시피는 목숨과도 같습니다.”

“거절이라면 어쩔 수 없군. 알겠네. 식사는 잘 먹었네.”

별게 다 목숨이란다. 어떤 요리인은 식칼이 목숨이라 하고, 어떤 요리인은 양념이, 어떤 요리인은 불이 목숨이라 하고.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지. 체념하고 일어나려 할 때, 내 발길을 붙잡는 미네르바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황자님께서 제 부탁을 들어 주신다면 못 알려 드릴 것이 없습니다.”

“레시피는 요리인의 목숨이라 하지 않았나?”

“요리인의 레시피보다 중요한 제 목숨 같은 존재를 황자님께서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흠?”

북쪽 마을 사람들, 너네는 세네카의 황자가 동네북이지? 여기저기서 이용해 먹으려는 사람들 천지네. 그래도 난 착하니까 이야기는 들어 줘야지. 절대 수프의 레시피를 얻기 위해 들으려는 건 아니다.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를 보내자, 미네르바는 무언가를 각오한 듯 강인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제 손자를 데리고 가 주시길 바랍니다.”

“그대의 손자?”

“예. 저는 이제 늙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할미의 억지로 지금까지 이 북의 땅에서 칼질을 한 아이입니다. 제가 죽으면 더 이상 아이를 보호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아직 정정해 보이는데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니. 그래서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죽음을 각오한 사람들의 얼굴엔 그 각오가 보이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그 손자가 보호가 필요할 정도로 어린가?

“손자의 나이가 어떻게 되지?”

“올해 스물여덟 살입니다.”

그렇지, 그럴 줄 알았다. 파스타도 하고, 가리비 요리에 생선 요리를 하는 사람이 보호가 필요할 정도로 어릴 리가. 그나저나 스물여덟 살이라니, 보호는 무슨, 나보다 나이가 많구만.

“스물여덟이면 진작 성인이 되었는데 누가 보호를….”

“저희는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왕국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곳에서 도망친 지 20년은 족히 넘었지만, 그곳의 비밀을 알고 있는 저를 그들이 포기하….”

“잠깐! 잠깐! 그렇게 위험해 보이는 말을 나한테 해도 되는 것인가? 아니, 그 전에 듣기 싫네! 난 귀찮아지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야.”

“늦으셨습니다. 끝까지 들으시지요. 그들이 제가 있는 곳을 찾아낸다면 제가 죽어도 제 손자에게….”

“아아아! 안 들을 거야!”

“쯧, 황자님, 정신 차리시지요. 이미 늦었습니다. 그들이 제 손자에게 접근하면 손자는 무사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니 전 제 손자를 황자님께서 보호해 주셨으면 합니다.”

귀를 막으며 눈을 감은 내가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찬 미네르바는 내가 돌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지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았다. 이 할망구 뭐야, 노망이라도 난 거야? 내가 볼모이긴 해도 일단 황자인데 이런 취급을 해도 되는 거야? 엉?

“….”

“부.탁. 드립니다. 제 손자를 보호해 주시죠. 그럼 제 인생이 담긴 레시피를 전부 전수해 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런 말을 나한테 해도…. 당신 내 상황은 알고 있는 거야? 모국에서 버려진 황자라고. 게다가 아무 힘도 없이 북쪽으로 내려온 볼모야. 이런 사람한테 무슨 보호야.”

“무슨 소리십니까. 그러니 더더욱 보호를 맡길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아무도 황자님한테 관심이 없을 것 아닙니까. 게다가 프레오나 황궁에서 살다 두 발로 걸어 나오시지 않았습니까. 지금껏 프레오나 제국의 볼모는 전부 죽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황자님에겐 무언가 대단한 게 있는 게 아닐까 추측을 해 봤습니다, 그리고 ‘그’ 젠 이프리트 경도 같이 있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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