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자님 먹고 싶어요-44화 (44/227)

44. 크로스반 영주성에 감금되다 (6)

“응? 뭐라고?”

“이프리트 경도 같이 있다는 것이요?”

“아니아니, 볼모가 전부 죽었다고?”

“아, 하긴, 기밀이니 잘 모르시겠군요. 프레오나 제국은 볼모로 온 자를 죽여 전쟁을 일으켜 땅을 넓혀 가지요. 이미 망한 왕국의 볼모들은 전부 죽었습니다.”

조금 충격적이다. 오스먼드와 거래를 할 땐 그냥 입 밖으로 나오는 대로 씨부린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다. 세네카의 황제가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날 죽이면 세네카의 황제만 기뻐하는 일이다, 나를 죽여서 전쟁을 일으키는 것보다 더 급한 일부터 해라, 등등 대충 상황을 피하려 했던 말들이 전부 진실이었다니. 아니, 근데 한낱 북방의 주방장이 왜 그런 것까지 알고 있는 거야?

“그대는 대체 정체가…. 아니! 말하지 마!”

“소식을 전해 주는 새가 있습니다. 눈과 귀가 되어 주는 똑똑한 새지요. 어쨌든 제 손자를 데려가 보호해 주시면….”

“으악! 할망구, 계속 그럴래? 난 힘이 없다니까?”

“있는 거 다 압니다.”

“아니, 없다니까? 그냥 운이 좋았던 것뿐이야. 타루스 황태자가 나를 막 이렇게 저렇게 함부로 대한 건 알아? 내가 그 트라우마가 좀 심해서 황궁에서 못 살 것 같아서 나온 거야.”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타루스 황태자는 죽기 직전까지 황자님을 겁탈하지 않았다 주장했습니다. 다른 악행은 다 인정했는데 황자님의 일만 인정하지 않았다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차피 황자님은 저와 연이 닿았습니다. 제가 죽기 전, 황자님의 이름을 제 흔적에 남길 거니 안전하고 오래 살고 싶으시면 곱게 제 손자를 데리고 가시지요.”

“…할망구 진짜 짜증 나는 성격이다.”

협박을 아주 찰지게 해. 할망구한테는 레시피가 아니라 협박하는 법을 배워야 할 판이다. 갑자기 오스먼드가 보고 싶다. 할망구에 비하면 오스먼드는 개좆밥이었는데. 큼! 아, 말을 이쁘게 해야지. 오스먼드는 완전 내 발밑이었는데.

급격한 어지러움에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하아, 괜히 주방장 불러오라 했어. 후회하고 있는 내 표정을 본 미네르바는 자상한 할머니의 표정을 지으며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다.

“손자를 위해선 못 할 게 없으니까요.”

그렇겠지. 문제는 그로 인해 귀찮아지는 건 나인 거고.

“그래, 내가 할망구 손자를 보호한다 하자. 근데 내가 손자를 노예 부리듯 막 부리고, 짜증 나면 식칼 꺼내서 찌르려 하고, 막 대하면 어떡하려고. 할망구는 내 뭐를 믿고 손자를 맡기려는 거야?”

“제 손자의 요리를 맛있게 먹지 않았습니까. 그것으로 충분하지요.”

“그런 어린이 동화 같은 이유로 나를 믿겠다고?”

“어린이 동화라뇨, 충분히 설득력 있는 이유입니다. 제 손자의 요리를 한번 맛보면 끊을 수가 없을 테니까요.”

음식으로 조련하겠다 이거야? 할망구 똑똑하네. 날 너무 잘 알아. 끈질기게 나를 바라보는 미네르바의 굳센 눈을 피했다. 하지만 눈을 피해도 강렬하게 느껴지는 시선까지 피할 순 없었다. 결국 나는 꼬리를 내렸다.

동방예의지국에 살았던 인간으로서, 노인 공경은 해 줘야 하겠지. 할머니만 아니었어도 냉정하게 내치는 건데.

“손자를 데려가 줄 순 있어. 내 저택엔 방이 많거든. 그치만 할망구 손자를 물리적으로 보호해 줄 순 없어. 무슨 말인지 알지?”

“그것까진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제 울타리를 벗어나 주기만 하면 되니까요.”

“그래, 데리고 가 줄게. 대신 할망구도 약속 지켜. 레시피!”

“그럼요, 만족하실 겁니다.”

밝게 웃는 할망구의 미소에 한숨을 쉬었다. 당하는 입장이 되니 이전의 오스먼드가 지었던 찝찝한 표정의 의미를 알 것 같다. 그래도 오스먼드와 나는 합리적인 거래였고, 이건 거의 강매인데…. 제엔장.

원하는 바를 이루었는지 한결 편해진 표정의 미네르바와 반대로 떨떠름한 미소를 지은 나는 퉁명스러운 말투로 미네르바에게 물었다.

“근데 할망구 손자한테는 말해 놨어? 나 따라가라고?”

“아뇨, 아마 말하면 길길이 날뛰겠지요.”

“뭐야, 상호 합의가 안 된 거였어? 어찌 됐든 난 젠이 돌아오면 돌아갈 예정이니까 그 안에 설득해 놔. 그래야 따라오든 말든 하지.”

“제놈이 가기 싫다 해도 어쩌겠습니까. 제가 가라 하면 가야지.”

“손자한테도 손자의 의견이 있는 거야. 할망구 그러다가 미움 받는다. 말년에 손자한테 미움 받는 게 얼마나 절망적인 건데. 잘해, 손자한테. 그래야 노잣돈이라도 받지. 나 이제 갈게, 클로에 오래 기다렸겠다. 손자한테 마음 정하면 나 찾아오라 전해 줘.”

고개를 끄덕이며 잘 전해 놓겠다는 미네르바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만찬실을 나갔다. 주방장을 부르지 말았어야 했다.

“클로에.”

만찬실 바로 앞에 있는 소파에서 책을 읽고 있는 클로에를 불렀다. 클로에는 내가 영주의 서재에서 가져왔던 《대륙의 역사》 책을 읽고 있었는데, 자신이 로이와 이야기할 때 심심하지 않을까 싶어 내가 읽던 책을 가져왔단다. 정말 착하고 그 마음도 고맙지만, 그 책 지루해서 안 읽으려고 했는데.

“가자. 영주랑 부인은 어디 있대?”

“오빠랑 같이 있을 거예요. 딱 붙어서 떨어지려 하지 않거든요.”

“그럼 편하겠네.”

클로에의 안내에 따라 로이의 방을 향해 걸었다. 로이의 방에 가까워질수록 약초 냄새가 심하게 난다. 병원이라 해도 믿겠네.

로이의 방을 지키고 있던 시종이 내가 왔다는 것을 방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렸다. 곧이어 해골로 착각할 정도로 마른 영주와 순하게 생긴 영주의 부인이 나왔다. 영주는 나를 보자 저승사자라도 본 듯한 얼굴을 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황, 황자님, 이곳엔 어쩐 일로….”

“그대의 아들을 보러 왔네. 해를 끼칠 생각은 없으니 걱정 말고 자리를 비켜 주게, 지금 당장.”

“예…?”

“그대의 꼴을 보니 당장 내일이라도 거꾸러질 것 같아서 그러네. 가서 쉬다 오게.”

“그, 그럴 수는….”

“명이다. 당장 쉬고 오게. 환자의 옆에 환자가 있어서는 좋은 효과를 볼 수 없어. 부모가 건강해야 아들도 건강해지지 않겠나.”

“….”

“그, 그래요. 전하의 말씀대로 당신은 쉬어야 해요. 제가 잘 보고 있을 테니 걱정 말고 쉬다 오세요. 부탁이에요.”

옆에서 부인이 입을 다물고 있는 영주를 설득했다. 설득하든 말든 황자의 명인데 딱 들어야지 뭐 하는 거야? 난 같잖다는 얼굴로 뒤에 서 있는 시종에게 말했다.

“시종, 당장 영주에게 음식을 먹이고 휴식을 취하게 하라. 부인도 같이.”

영주의 옆에서 고개를 조아리던 부인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왜 자기까지 보내냐는 듯한 눈빛을 보냈지만, 그에 답하지 않은 채 클로에와 함께 로이의 방 안으로 들어간 뒤, 거절은 받지 않겠다는 의사로 문을 쾅 닫았다. 아, 맞다. 여기 환자 방이었지. 정숙해야 하는데 까먹고 있었네.

복도에 진동하던 약 냄새가 이 방에서 나는 냄새였는지 방 곳곳에 퍼져 있어 코가 아릴 정도였다. 영주의 꼴이 왜 그런지 알 것 같기도 하다. 이 냄새를 종일 맡고 있다간 없는 병도 생기겠어.

“오빠!”

“크, 클로에….”

거대한 침대에 누워 있는 남자아이를 보았다. 클로에보다 왜소한 몸을 가지고 있고, 클로에같이 붉은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지만 투병 생활이 많이 고된지 타오르는 붉은색이 아닌, 칙칙한 붉은색의 머리카락이었다.

로이 크로스반, 크로스반 영주의 혈육 중 유일한 남자이자, 아이답지 않게 똑똑하다 알려졌단다. 붉은 머리칼에 녹안을 가진 사람이 똑똑하다는 설을 정확히 만족시키는 아이라고 미네르바가 말했다.

미네르바는 도대체 뭘 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다. 영주성을 속속들이 알고 있고, 그것을 넘어 프레오나 황실의 기밀도 알고 있으니. 혹시 스파이 같은 그런 건가? 그렇다면 나는 정말 터무니없는 일에 손을 댄 것이다.

미네르바의 생각은 그만두고, 로이와 클로에 주연의 눈물 펑펑 재회 시간을 모른 척하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침대 옆 테이블에 놓인 갈색의 향초가 끊임없이 타고 있는 것이었다. 코가 아플 정도의 약 냄새에 저 향초도 한몫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산처럼 쌓인 약들도 눈에 띄었다. 병이 뭔지도 모르면서 약을 닥치는 대로 먹는 건가? 그럼 안 좋을 텐데.

방을 지키는 건 클로에에게 맡기고, 테이블에 놓인 약을 들고 밖으로 나가 대기하고 있던 의사를 불렀다.

“세, 세네카의 4황자를 뵙습니다! 의사 모로단이라 합니다!”

“그래, 모로단. 저 아이의 병이 정확히 무엇이지?”

“그, 그게… 공자님의 병은 처음 보는 병입니다. 심한 감기인 것 같으면서, 피를 토하시고… 시력도 안 좋아지고, 시간이 지날수록 걷는 건 물론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기력을 잃어 갑니다.”

몸살인가 싶다가도 다른 부수적인 병을 보면 몸살은 아니다. 시력이 안 좋아지고 숨도 못 쉴 정도라고?

“그럼 이 약들은 무엇이지?”

“각 의사들이 처방한 약입니다. 그저 고통을 완화시키고 기력을 보강하는 약입니다.”

“한마디로 쓸데없는 약이라는 거군. 기력이 없다면 아이는 무엇을 먹지?”

“물과… 약을 먹습니다.”

이 나라 사람들은 밥이 보약이라는 말을 모르나 보다.

“그럼 방 안에 피워 놓은 향초는 무엇이지?”

“그건 릴리아 부인이 공자님을 위해 건강에 좋다는 향초를 공수해 오신 겁니다.”

“내용물은?”

“자,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릴리아 부인은 공자님을 향한 정성이….”

“됐네. 가 보게.”

내 눈을 피하는 의사를 뒤로하고 다시 로이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쾅 열고 들어가자 로이와 클로에가 깜짝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쪼꼬미 둘이 소곤소곤 놀고 있는 게 꽤 귀여웠지만 해야 할 건 해야겠다.

테이블 위에 놓인 향초에 물을 부어 불을 꺼트렸다. 그러곤 옷을 벗어 향을 담아 놓은 그릇 위에 연기가 빠져나가지 않게 올려놓았다. 닫혀 있는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킨 다음 눈물 펑펑의 재회극 주연인 로이에게 다가갔다. 눈이 사나운 게 얌전하고 차분한 제 동생과는 다르게 성깔이 있어 보였다.

“뭐, 뭐야!”

“뭐긴 뭐야. 짝퉁 의사다.”

로이의 이마에 손을 올려 열을 재 보고, 이불을 끌어내려 입고 있는 상의를 벗겼다. 눈에 띄는 발진이나 멍은 없고, 심하게 마른 정도.

“뭐…. 콜록! 뭐 하는 짓이야!”

“짝퉁 의사가 뭘 하겠냐, 진찰하는 척하는 거지. 숨 쉬어 봐.”

상체에 손을 올려 심장의 박동을 확인한 뒤 폐를 확인하려 숨의 고르기를 들었다. 숨을 쉬기 어렵다고 하더니 정말 약하긴 했다.

“이거 몇 개?”

“두, 두 개…. 아니! 너 뭐 하는 쿨럭! 빨리 안 꺼져?”

“오, 오빠, 이분은…!”

“클로에, 쉿. 내버려 둬.”

내가 누군지 모르는 것 같은데, 나중에 자신이 막 대했던 자가 황자인 걸 알고 나면 지을 표정이 궁금했다. 성격이 나쁜 어린애는 한번 크게 당해 봐야 정신을 차리지.

클로에를 조용히 시키고 로이의 상태를 진찰했다. 의사가 또 뭐라고 했더라. 피도 토하고, 힘도 없다 그랬지?

“밥은 먹었고?”

“어머니가… 쿨럭…. 주셨어!”

로이는 릴리아 부인한테 어머니라 부르는구나. 병간호해 주는 거 보다 보니 마음이 약해지고 친해졌나.

“소리 지르지 마. 빨리 죽고 싶으면 질러도 되고.”

이상하네. 아픈 곳이 이렇게 많은데 병명이 모호할 리가 없다. 병이 아니라면 독을 먹은 것 같기도 한데… 의사들이 그걸 모를 리는 없을 테고.

“폐렴인가. 그건 아닌데. 야, 너 갑자기 춥고, 열나고, 토할 것 같고, 옆구리 아프고 그럴 때 있어?”

“아니…. 됐으니까 너 나가!”

폐렴은 아니다. 게다가 상태가 좀 많이 이상하다. 어제까지 사경을 헤맸다는 아이가 오늘은 눈을 뜨고 소리까지 지르니.

“야, 너네 엄마가 너한테 밥 언제 주냐?”

“저녁에.”

“뭐 주는데?”

“아무 맛도 안 나는 죽.”

“그거 아직 안 먹은 거지? 앞으로 먹지 마.”

백퍼 독이다. 아이의 직감은 무서운 거라고, 클로에가 새엄마를 괜히 싫어하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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