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크로스반 영주성에 감금되다 (7)
병도 모르는 아픈 애한테 건강에 좋다고 이름 모를 향도 피우고, 약도 무분별하게 먹게 하는 게 말이 되나? 게다가 아무 맛도 안 나는 죽은 무슨, 아무 맛이 안 나는 게 아니라 미각을 잃은 거다. 저게 독이지 뭐야. 무슨 독인지만 알면 해독제는 금방인데.
“아니다. 그거 받아서 먹지 말고 숨겨 놔, 알았지?”
“왜 내가 당신 말을….”
“죽기 싫으면 들어. 밖에 있는 의사보다는 내가 더 믿을 만할 거다.”
전부 매수당했거든. 너네 엄마한테.
반년 전부터 앓기 시작했으면 강한 독은 아닐 테고, 꾸준히 받아먹었으니 지금 이 상태겠지? 꾸준히 쓸 수 있으면서 약한 독이 뭐가 있지? 4황자의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이세스, 리아티스, 덴탈린, 자카비스, 초망…. 구할 수 있는 거라곤 자카비스랑 초망 정도일 텐데.
“넌 너네 엄마랑 언제부터 친했어?”
“오자마자요. 오빠는 줏대가 없어서 부인이 오자마자 좋아했어요.”
성이 난 클로에가 로이 대신 말해 줬다. 그러게, 정말 줏대 없는 자식이다.
“부인이 언제 왔는데?”
“3년 전이요.”
“오래도 됐네.”
언제부터 먹였는지를 모르니 독을 구별하기가 어렵다. 의문이 있다면 로이는 이렇게 망가졌는데 왜 클로에는 멀쩡하냐는 거다. 클로에가 부인을 싫어한다고 해도, 영주성의 모두와 친밀한 부인이라면 독을 넣을 수 있는 상황은 꽤 많았을 거다.
“왜 너만 아플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 쿨럭!”
아까까지는 그저 기침만 했는데, 방금 기침을 하며 피를 토했다. 피의 색이 어두운 거 보면 진짜 독이 맞는데….
“그거 닦아 내지 말고 기다려.”
방을 둘러보다 한눈에 봐도 무거워 보이는 서랍 속, 은으로 만들어진 브로치를 꺼냈다. 혹시나 로이의 피에서 독의 반응이 나오면 확실해질 테니까. 로이가 뱉어 낸 피를 시종을 시켜 가져온 은 브로치에 묻혔다. 순식간에 브로치가 검게 변하자 지켜보던 클로에가 깜짝 놀라 소리가 나오려는 입을 가렸다.
“이, 이건….”
“독이야. 병은, 개뿔.”
검게 변한 브로치를 바닥에 던졌다. 슬슬 환기도 다 된 것 같아 열었던 창문을 닫았다.
멍하니 브로치를 보던 로이는 눈을 찌푸리며 나를 보았고, 브로치를 보며 동공 지진을 하던 클로에는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을 듯 내게 다가와 절절하게 소리쳤다.
“화, 황자님! 저희 오빠 살려 주세요!”
“네 동생은 머리 회전이 빠르네.”
“….”
“황자님! 제발요! 저희 오빠 살려 주세요! 흐어어엉…!”
급기야 울기 시작하는 클로에를 가만히 바라보다 로이의 상태를 확인했다. 로이는 내가 황자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 멍하니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언뜻 혼이 나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로이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살고 싶어?”
“당연하지! 아니, 살고 싶습니다!”
눈을 부릅뜨고 소리치는 로이에게 다가갔다. 넌 운 좋은 줄 알아라.
“내가 널 살려 주면 넌 나한테 뭘 해 줄 수 있어?”
“오빠! 영주성을 드린다고 해! 아니면 오빠의 100년!”
“뭐어…?”
세상에 공짜는 없다. 무려 그게 목숨이면 값이 더 나가겠지.
클로에는 영주성과 본인의 100년이면 뭐든 해결될 거라 생각한다. 그치만 클로에, 영주성은 너한테 받기로 했고, 난 아직 로이의 장점을 모르니 100년을 받아도 쓸데가 없어.
“제 충, 충성을 드리겠…. 쿨럭!”
“됐다. 아픈 애한테 뭘 바라냐. 너네 아빠한테 받아야지.”
이러니까 인질을 잡아 목숨 값을 내놓으라 하는 악당 같다. 아니, 악당 맞나? 아니지, 따지자면 난 피해자다. 이렇게 자유롭게 다니기는 하지만 영주성에 감금당한 상황인걸. 젠 보고 싶다. 젠, 언제 와….
“로이, 넌 너네 엄마가 주는 거 가능하면 먹지 말고 남겨 놔. 정 뭣하면 먹는 척하다가 옷에 뿜어. 엄마한테 네가 알고 있다는 거 들키지 말고.”
“네! 알겠습…. 쿠, 쿨럭!”
“말하지 말고, 누워서 자. 내일 올게.”
울려는 건지 화를 내려는 건지 모를 표정의 클로에를 로이의 방에 놔두고 돌아갔다. 클로에와의 계약은 제대로 지켰고, 지금 로이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다. 무슨 독인지는 알아야 해독약을 만들지.
클로에가 이곳을 지키고 있을 테니 나까지 있을 필요는 없다. 방 앞을 지키는 시종에게 볼일이 끝났다고 대충 잘 말해 놓고 내 방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미네르바의 손자가 올지 몰라 기다려 봤지만 오지 않았다. 손자는커녕 시종의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젠이 시종에게 명했던, 내가 머무는 방이 있는 복도로는 한 발자국도 오지 말라고 한 것 때문인가 보다. 시종들에게 당연하다는 듯 담담하게 명했을 젠을 생각하니 그가 보고 싶어졌다. 일주일은 너무 긴 거 아니야?
* * *
영주는 드디어 정신을 차렸는지 잔뜩 밀렸던 서류 일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로이의 옆에서. 환자 옆에서 더 환자 같은 몰골로. 마치 3일 내내 야근하다가 영양실조로 쓰러졌는데 또 야근을 하고 있는 회사원의 모습이었다. 아들이 걱정되는 건 알겠지만, 저래서야 아들보다 영주가 먼저 골로 가겠다.
릴리아 부인이 로이에게 항상 먹이는 미음을 클로에가 다른 공병에 빼돌려 전달받았다. 클로에는 몰래 가져오느라 걱정을 엄청 했지만 다행히 들키지는 않았다고 했다.
“근데 이걸로 어떻게….”
“먹어 봐야지.”
공병에 담긴 미음을 새끼손가락으로 찍어 먹었다. 너무 약해서 무슨 독인지 모르겠지만 혀가 반응하는 걸로 보아 독이 들어 있는 건 맞나 보다.
“헉! 그걸 드시면 어떡해요!”
“괜찮아.”
이 몸은 독에 내성이 있다. 단순한 독으로는 죽을 일이 없으니 무대포로 나가기는 하지만, 아마 방금 일을 젠이 알았다면 엄청 잔소리했을 거다. ‘미르 님, 제정신이세요? 아무리 내성이 있다 해도 독을 먹다니요. 손을 묶어 놔야 정신을 차리시겠어요?’라든지. 정말 손을 묶지는 않을 테지만, 은근 과격한 면이 있으니까 무모한 행각을 걸리면 정말 큰일이 날지도 모른다.
“무슨 독인지는 모르겠다, 너무 약해서.”
“황자님은 괜찮으세요? 약해도 독이잖아요!”
“어렸을 때부터 독 먹고 자라서 이런 독은 아무렇지도 않아.”
“헉…!”
“황족은 독에 내성이 있어. 난 좀 심각한 수준으로 있고.”
네 이놈, 퍼디스. 부들부들….
내 말에 깜짝 놀란 클레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안 죽어. 여기서 죽으면 내 목숨이 너무 아깝잖니. 난 죽어도 우리 잘생긴 젠이랑 귀여운 노반이랑 예쁜 마린의 옆에서 죽을 거야. 아, 그건 너무 잔인한가…. 그냥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혼자 객사해야 하나?
“어쨌든 난 이 정도로 안 죽으니까 걱정 말고 네 오빠 걱정이나 해. 아무래도 좀 길어질 것 같다.”
“….”
“부인이 아끼는 시종 있어?”
“이 영주성의 모든 시종은 부인을 좋아해요.”
“하긴, 그 순한 얼굴로 다정하게 대해 주면 다들 좋아했겠네.”
“네에….”
그런 면에서 클로에의 고집은 정말 대단한 거다. 똘똘하고, 고집도 세고, 사람을 무의식적으로 이용해 원하는 것을 끌어내는 클로에는 절대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될 아이다. 넌 정치하면 진짜 잘할 것 같은데.
“해독약은 나도 만들 수 있으니까 괜찮은데, 어떤 독인지를 알아야 돼.”
“부인 방을 뒤져야 한다는 건가요?”
“응. 최악의 경우에는 부인한테 직접 물어볼 수밖에 없어.”
“그게 왜 최악인 건가요? 그냥 바로 물어보면 안 돼요?”
“안 되지. 이제 와서 알려 줄 리도 없고, 로이의 독을 부인이 줬다고 까발리자니, 부인이 로이한테 들이는 노력이나 정성이 아주 극진하고 시종들도 좋아한다며. 너네 영주도 부인한테는 쩔쩔매던데, 부인이 로이한테 독을 준 거예요! 라고 하면 믿을 거 같아? 그리고 넌 부인을 싫어하잖아. 그럼 당연히 애가 거짓말하는 거라고 생각하겠지.”
“황자님이 말해 주시면 되잖아요!”
“신분이 높은 사람이니 더더욱 함부로 끼어들면 안 돼. 사소한 것 하나까지 종적을 남기거든. 만일 끼어든다 해도 증거를 내놓으라고 할 텐데, 이 미음은 너무 약해서 독 반응도 안 나와.”
릴리아 부인의 끈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을 정도다. 몇 년을 꾸준히 먹여야 이 정도 독으로도 사경을 해매는 반응을 보이는 건지 상상도 안 된다.
“이제 어떡해야 할까.”
“…부인의 시종을 잡아서….”
“고문하자고? 누가 해? 참고로 말하는데, 나 그런 거 못 한다.”
“제가 할게요.”
“네가 뭘 해. 부인 방은 내가 따로 찾아볼 테니까 넌 로이한테 붙어 있어. 부인이 싫어도 참고.”
“네.”
이번 일로 부인을 더 싫어하게 된 클로에에게 임무를 맡겼다. 로이의 곁에서 부인이 주려는 건 아무것도 먹이지 말라고. 덕분에 얼굴 보기 껄끄러운 미네르바한테 직접 부탁해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미음을 만들어 클로에가 조달하고 있다.
내가 저 남매 때문에 무슨 고생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평소라면 지금은 티타임 시간이니 우리 노반 낮잠 자는 거 구경하거나, 끊임없이 구애하는 마커스와 은근슬쩍 거절하는 마린의 모습을 보거나, 찡그려도 잘생긴 젠과 대화를 하고 있었을 텐데. 내 평화로운 일상 돌려주지 않을래? 나도 즐긴 지 얼마 되지 않았거든. 가능하면 이대로 1년은 평범하게 힐링할 예정이었는데 말야.
난 너무 착해서 문제야. 좀 더 못돼져야 할 필요가 있어. 젠이 토벌에서 돌아오면 못돼지는 특훈을 해야지.
“할망구 손자는 언제 오는 거야.”
“아직 마음을 못 정한 것 같습니다.”
“젠은 언제 오는 거야.”
“저야 모르죠.”
“눈과 귀가 되어 주는 새가 있다며. 걔네 보내서 좀 알아 와 주라. 빨리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젠이 안 와서 보내 주지도 않잖아.”
팔찌를 수색한다던 수색꾼들은 돌아오지 않고, 마차를 몰 수 있는 영지민을 데려오라거나,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 나가게만 해 달라는 부탁에도 오늘은 날씨가 안 좋다니, 마을 저장고가 터졌다느니, 죄송하다는 소리 뿐, 아무도 신경 써서 들어 주려 하지 않는다.
칼 안 찼다고 무시하는 것도 정도껏이여야지, 한번은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지었더니 달콤한 디저트, 유명한 화가의 그림, 잘 알려지지 않은 유물 같은 내 관심을 끌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동원해 나를 더욱 귀찮게 했다. 덕분에 닥치고 자의로 영주성에 감금당하는 것을 골랐다. 젠이 돌아오면 창문을 깨서라도 도망갈 거라는 마음을 품고. 나 혼자는 못 한다. 창문을 어떻게 깨고, 어떻게 창문 밖으로 나가.
책 읽는 것도 질렸고, 나와 놀아 줄 클로에도 아픈 로이에게 가 버렸으니 아는 사람이라곤 미네르바밖에 없었다. 오늘은 미네르바가 혼자 감자를 깎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옆에 눌러앉아 조잘조잘 떠드는 중이다. 이상하게 미네르바랑 있으면 편해진단 말이지. 이게 바로 할망구의 저력인가.
“새는 위험한 곳에 안 갑니다. 마물이라니, 바로 도망쳐야죠.”
“젠이 너무 보고 싶어.”
“황자님도 이프리트 경을 연모하고 있던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