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크로스반 영주성에 감금되다 (8)
“황자님도라니? 누가 또 젠을 연모하고 있대?”
어떤 놈이야. 얼굴 좀 보자.
“아뇨, 이프리트 경이 일방적으로 황자님을 연모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황자님도 이프리트 경을 연모하는 거 아니냐 물은 겁니다.”
“아아, 따지자면 내가 더 좋아할걸? 할망구는 못 봤겠지만 우리 젠 진짜 잘생겼거든.”
“오랜 인생 중, 제 손자만큼 잘생긴 놈은 본 적이 없습니다.”
“할망구가 우리 젠의 미모를 봐야 하는데. 내가 나중에 소개시켜 줄게. 진짜진짜 잘생겼어.”
“제 손자가 더 잘생겼습니다.”
“할망구 우리 젠 못 봤잖아! 진짜 잘생겼다니까? 보통 사람이랑은 비교가 안 돼.”
“제 손자가 제일 잘생겼습니다.”
“하! 우리 젠이 더 잘생겼다니까? 머리로 얼굴 가려도 잘생겼고, 올리면 더 잘생겼어. 얼굴 보면 자동으로 헉, 한다니까?”
“제 손자가! 더! 잘생겼다고! 말했잖습니까!”
“우리 젠이 더 잘생겼어! 세상에서 제일 잘생겼단 말야!”
칼을 든 미네르바가 눈을 부라렸다. 그에 꼬리를 내렸다. 젠, 미안해. 아무리 할망구여도 무기를 들었는데, 싸우면 내가 질 게 뻔하잖아. 비록 이번 판은 내가 졌지만 내 마음속에선 언제나 젠이 1등이야.
“흠!”
“할망구 나중에 우리 젠 보고 놀라지나 마.”
“황자님이야말로 제 손자 보고 놀라지나 마십시오.”
“흥!”
“저도 흥입니다!”
유치하기 짝이 없다. 제 새끼가 더 똑똑하다 잘생겼다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이럴 시간 없는데….”
“할 일도 없으시면서.”
“아냐. 나 부인 방 들어가 봐야 된단 말야.”
“릴리아 부인이요?”
“응, 독 찾아야 돼.”
미네르바도 대충 알고 있는 건지 독을 찾는다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아, 혹시 할망구라면 알고 있으려나.
“할망구도 알아?”
“릴리아 부인의 오라비가 무슨 짓을 하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아, 제발. 제발! 더 이상 나를 귀찮게 하지 말란 말이다. 부인이 범인이면 부인만 잡으면 되지, 왜 오라비까지 나와….
“말해 줘.”
“정보를 공짜로 줄 순 없습니다.”
“뭐야, 나한테 원하는 게 또 있어? 손자 데리고 가는 거면 충분하잖아.”
“이프리트 경보다 제 손자가 더 잘생겼다고 말하십시오.”
“할망구 진짜 못된 거 아냐? 그런 말을 내가 어떻게 해!”
미네르바는 명실상부 손자 바보다. 세상에 저런 손자 바보도 없을 거다.
“싫으시면 말고요.”
“씨잉….”
“그렇게 인정하기 싫으십니까?”
“말은 똑바로 해야지. 인정하기 싫은 게 아니라, 거짓말하기 싫은 거야.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건 우리 젠이라. 히익! 할망구, 칼 내려놔!”
진심으로 성을 내는 미네르바에게서 도망쳤다. 여긴 진짜 황자 취급이 길바닥에 굴러가는 돌보다 못한 것 같다. 이씨…. 4황자 불쌍한 것, 곱상하게 생겨서 무시당하는구나. 이건 전부 예쁘고 잘생긴 내 얼굴 때문이지, 절대 내 행실이 껄렁껄렁해서가 아니다. 영주성 시종들처럼 근육이라도 키워야 하려나….
* * *
영주성에 갇힌 지 5일째, 여전히 독은 발견되지 않았다. 은밀하게 릴리아 부인의 뒤를 밟아 봤지만 이상한 낌새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로이에게 미음을 주는데 독을 넣을 새도 없었으면서 독 반응은 꾸준히 나온다. 어떻게 독을 넣는 거지?
길을 잃은 척 릴리아 부인의 방이 있는 곳으로 갔다. 화려할 것 같았던 복도는 텅 비어 있고 크로스반 영지의 풍경화 하나만 걸려 있었다. 콘셉트가 자애로운 부인인가 보다.
“세네카의 4황자를 뵙습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타난다더니 막 방에서 나오던 릴리아 부인을 마주쳤다.
“그래, 좋은 아침이군.”
부인은 고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아침 인사를 했다. 이렇게 보니까 진짜 순해 보이네. 의붓아들에게 몇 년 동안 꾸준히 독약을 먹일 어머니로는 전혀 안 보인다. 하지만 사람의 외면과 내면은 같지 않지. 의외로 사납게 생긴 사람들 중 순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많다. 물론 나는 겉도 착하고, 속도 착하지.
“생활은 어떠신지요.”
“나쁘지 않네. 알아들을진 모르겠지만, 좋지도 않다는 뜻이지.”
“…죄송합니다. 크로스반 후작이 황자님께 악감정이 있어 그러는 게 아니라 오로지 영지민을 생각해서….”
“알고 있네.”
크로스반이 후작이었구나. 어쩐지 나한테 막 대한다 했더니, 작위가 높아서 그런 거였어. 후작이면 후작이라 불릴 것이지 왜 영주님이라 불린대. 영지를 다스리고 있으면 후작은 그냥 계급이라 이건가? 하긴,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니 영주가 더 맞는 호칭이지.
“산책을 하시는 건가요?”
“그냥 돌아다니고 있네. 어딘가 구멍이 뚫려 있지 않을까 해서.”
“영주성은 마물의 침입에 대비해야 해서 단단합니다. 믿으셔도 됩니다.”
“외부는 단단할지 모르나, 내부는 글쎄.”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릴리아 부인을 바라보았다. 부인은 그런 내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을 뿐이었다. 아, 짜증 나는 타입이다.
“내부 또한 단단합니다.”
“꼭 그러길 바라지. 난 무너지기 싫으니 말이야.”
떨떠름한 표정의 릴리아 부인을 스쳐 보냈다. 방의 주인도 사라졌으니 독을 찾으러 들어가 보려 했는데, 저 꼴을 보니 들어가기 싫다. 잘 생각해 보니 독이 방에 있지는 않을 것 같다. 신뢰하고 있는 시종이 가지고 있거나…. 아, 모르겠다. 그냥 집에 가고 싶어. 누가 나 좀 꺼내 주라. 당근을 흔들면 될까?
이렇게 찾아서는 끝도 없을 텐데 그냥 할망구한테 알려 달라 할까. 안 돼. 내 입으로 할망구 손자가 젠보다 잘생겼다고 말할 수는 없지. 그건 로이가 정말 위급할 때 써먹어야 한다. 지금도 위급하지만, 젠의 자존심을 뭉개면서까지 살리고 싶진 않달까. 아니야, 자존심보다 사람 목숨이 먼저지. 젠은 이해해 줄 거야. 이 할망구 지금 어디 있어?
미네르바가 항상 감자를 까고 있었던 곳에는 찾고 있던 미네르바는 어디 가고 근육 빵빵한 요리사가 눈물을 흘리며 양파를 까고 있었다.
“큽. 황, 황자님을… 뵙…습니다. 크읍.”
“이해하네. 많이 맵지?”
“괜찮습니다!”
요리사는 내게 인사하려 흘러내린 눈물을 닦다 양파를 만진 손이 눈가에 닿았다. 악.
“끄으아아!”
“…찬물에 씻게.”
“네, 넵!”
서둘러 흐르는 물에 눈가를 씻어 내린 요리사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저거 알지. 우리 귀여운 노반이 직접 재배한 양파를 까는 걸 도와주겠다며 열심히 도와주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겨준다고 내 얼굴에 손을 대는 바람에 한동안 눈도 못 뜰 정도로 고생했었다. 그래도 귀여웠으니까 됐지.
찬물에 눈을 씻어 내어 따갑던 눈이 진정된 요리사에게 찾고 있던 미네르바가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미네르바는 있는가?”
“주방장님이라면 아까 나가셨습니다.”
“나갔다고?”
“네, 시내에 다녀오신다고….”
“그렇군. 알겠네. 미네르바가 오면 내가 찾아왔었다고 알려 주게.”
“네, 알겠습니다.”
이 악독한 할망구! 밖으로 못 나간다면서! 시내로 나갈 수 있는 거면 나도 데리고 나가 주면 어디가 덧나나, 진짜. 거의 일주일이나 저택으로 못 돌아갔으니 마린이랑 노반이 걱정할 텐데.
방으로 다시 돌아가 미네르바가 찾아올 때까지 해독약에 관한 책을 읽으며 기다렸다. 해독제만 만들면 바로 저택으로 돌아가려고 무슨 독을 썼던 간에 해독약을 만들 수 있게 다양한 재료를 구해 놨다.
갇혀 있는 나는 불가능했지만 클로에의 도움으로 어찌저찌 잘 구했다. 클로에가 고생이었지. 새엄마 경계하랴, 로이 병간호하랴, 내가 구해 달라는 재료 구하랴. 어린 나이에는 고생하는 거 아니라지만 어쩔 수 없지 뭐.
로이가 먹은 독이 자카비스였으면 좋겠다. 비교적 만들기 쉬우니까. 먹은 독이 초망이라면 밤새서 만들어야 된단 말야.
해가 지고 나서도 미네르바는 오지 않았다. 나를 두고 혼자 시내를 나가? 만나기만 해 봐, 노인 공경이고 뭐고 갈궈 줄 거다, 이를 갈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할망구가 왔나 보다!
“미네르바!”
“억!”
힘차게 미네르바를 부르며 문을 열었지만, 힘 조절을 잘못했는지 문을 열며 무언가를 강하게 때려 넘어트렸다. 거대했던 무언가가 바닥으로 내쳐졌으며, 그것이 사람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헉! 괜찮은가?”
넘어진 사람은 몸집이 꽤 컸으며, 흩날린 은색의 긴 머리칼이 바닥에 널려 국수처럼 보였다. 배고파. 누군지 모르겠지만 첫인상이 꽤 화려하시네요.
“안 괜찮습니다. 일어날 힘도 없으니 잡아 주시겠습니까?”
“….”
“아야야, 팔도 아프려고 하네….”
독특한 놈이다. 물론 걱정해서 괜찮냐 물어본 거지만, 그럼 보통 괜찮다고 하지 않나? 게다가 잡아 달라고 팔도 뻗었다.
아직까지 바닥에 누워 있어 함께 널려 있는 은색의 머리칼 아래로 어두운 피부와 잘 어울리는 붉은 눈이 빛났다. 홍안이면 미네르바 손자구나. 미네르바가 잘생겼다고 해서 조금 기대했는데 그냥 잘생긴 또라이 아냐, 이거.
“…미네르바 손자분 되십니까.”
“네, 되십니다. 안 잡아 주실 겁니까?”
“혼자 못 일어나는가?”
“네, 누구 덕분에 넘어져서 다리에 힘이 없습니다.”
“….”
얘 진짜 상또라이네.
남자가 뻗은 팔을 잡아 올렸다. 손을 잡자 남자는 순식간에 일어섰는데, 맞잡은 손에 힘이 전혀 실리지 않은 걸로 보아 다리에 힘이 없다는 건 구라였다. 확 때릴까.
일어선 남자는 키가 굉장히 컸다. 젠보다 조금 더 큰 것 같기도 하고. 고개를 들어야 하는 게 조금 불편하지만 잘생겼으니까 봐준다. 원래 예쁘고 잘생긴 것을 보려면 이 정도 아픔은 감수해야지. 남자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나를 똑같이 빤히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할머니께서 당신에게 전해 달라는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들어가도 됩니까?”
“미네르바가?”
“네, 저도 해야 할 말이 있고.”
“알겠네, 들어오….”
들어오라는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남자는 나를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 황자잖아. 요즘 황자 취급을 못 받아서 그런가, 황자라는 자각이 사라진 듯한 느낌이다. 격하게 마린이 보고 싶다.
방 안으로 들어온 남자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저 잠만 자는 방이라 그런지 의자도 없고, 소파도 없다. 자신이 앉을 곳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남자는 이 방에 있는 유일한 가구인 침대로 가까이 다가갔다.
“여기 앉겠습니다. 괜찮으시죠?”
“상관은 없다만, 자기소개부터 해 주겠나?”
“제 소개가 듣고 싶다면 당신부터 해 주시겠습니까?”
“와, 이런 캐릭터 처음이네. 아, 생각만 한다는 게 입 밖으로 나왔네.”
“괜찮습니다. 자, 이제 자기소개 시작합시다.”
남자는 방긋 웃어넘기곤 자기소개를 시작하라며 입을 꾹 다물었다. 할망구 손자 좀 많이 독특하다. 앞으로 이 사람이랑 같이 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