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크로스반 영주성에 감금되다 (9)
“도브로미르.”
“도브로미르, 이름이 꽤 길군요. 짧게 도비라고 부르겠습니다. 도비는 몇 살이시죠?”
“스물하나…. 잠깐, 왜 도비….”
“전 스물여덟입니다. 제가 더 어른이니 고민이 있으면 머뭇거리지 말고 상담하러 오십시오.”
정신이 없다. 손수건이 있다면 주둥이에 쑤셔 넣어 조용히 시키고 싶을 정도로 정신이 없다. 게다가 도비는 또 뭐야. 자유로운 집 요정이야? 자유롭긴 개뿔이. 나도 자유롭고 싶다!
“도비가 아니라 미르라고 부르게. 그리고 난 그대의 이름을 못 들어서 그런데, 이름이 뭐지?”
“할머니가 안 알려 줬었군요. 전 세르비스라고 합니다. 편하게 셀비스라고 부르면 됩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내가 세네카 제국의 황자인 건 알고 있는 건가?”
정말 혹시나 하고 물었다.
“아뇨, 지금 처음 알았습니다. 황자님이셨군요. 어쩐지 곱게 자란 것처럼 보였는데 그것 때문이었군요. 원하신다면 황자 대우해 드릴까요?”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보통 황자라고 하면 머리를 조아리거나, 알아보지 못하고 실례를 해서 죄송하다고 그러지 않나? 하지만 셀비스의 태도는 처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보통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구나.
“됐네. 할 말이 뭔가?”
“할머니가 당신께 전해 달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제가 들어야 하는 말이 있다고 그러시던데, 해 주시겠습니까?”
이 할망구 혹시….
“무슨 말…?”
“제가 누구보다 잘생겼다는 말?”
“하하, 꺼ㅈ…. 꿈도 꾸지 말게.”
방긋 웃는 셀비스의 능청스러운 말을 웃으며 되받아쳤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냥 꾹 참고 젠보다 할망구 손자가 더 잘생겼다고 말해 주려고 했는데 마음이 바뀌었다. 셀비스도 잘생겼지만 우리 젠이 더 잘생겼다.
“그나저나 도비는 예의가 참 바르시군요. 제 무례한 태도에 화도 안 내시고.”
셀비스는 의외라는 듯 싱긋 웃으며 말했다. 무례하게 대한 건 알고 있구나.
화를 안 내는 게 아니라 그냥 귀찮은 거다. 화내는 것도 에너지가 필요한데, 저런 마이웨이인 사람을 상대로 화를 내 봐야 내 에너지만 깎이는 거다. 화를 내도 통할 것 같지도 않은데 뭐 하러 화를 내.
“미르라고 불러 주게. 도비는 마음에 들지 않는군.”
“싫습니다. 도비의 이름을 딱 듣자마자 도비가 떠올라서 이젠 바꾸려 해도 어색해서 안 됩니다.”
“…그래, 마음대로 하게.”
셀비스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대신 나 모르는 척하기. 나는 침대에 앉아 있는 셀비스를 향해 한숨을 쉬었다. 스물여덟이나 먹고 애 놀리는 게 재미있나 보다. 그는 품을 뒤적거리다 작게 접힌 종이를 내게 들이밀며 말했다.
“눈 딱 감고 한 번만 말하시면 됩니다.”
“….”
“정말 필요 없습니까?”
로이의 독에 관한 정보다. 나에게는 절박하지 않지만, 클로에와 로이에게 있어선 절박한 것이다. 그래, 애는 살리고 봐야지. 프레오나 제국의 미래 후작 각하인데 빚을 지워 두면 나쁘진 않을 거다.
“이프리트보다 할망구 손자가 더 잘생겼다.”
“잘하셨습니다.”
흥, 난 젠이라고 안 했다. 이프리트라고 했지. 이프리트 성을 쓴 누군가는 셀비스보다 못생긴 사람이 있지 않을까? 아, 근데 그 집 사람들 외모가 워낙 뛰어난지라. 하지만 셀비스도 잘생겼으니 그 집안 인물 중 한 명 정도는 제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뾰로통한 내 대답에 입꼬리를 올려 웃은 셀비스가 넘겨준 종이를 서둘러 펼쳤다. 종이에는 작은 글씨로 ‘블라도’라고 쓰여 있었다. 블라도…. 블라도! 왜 잊고 있었지?
“아! 짜증 나 뒤지겠네, 진짜.”
블라도는 더운 지방에서만 나는 약초로, 북쪽에선 구하기 힘들지만 두통에 효과가 정말 좋은 약초다. 이 약초가 어떻게 독으로 쓰이냐 물어본다면 답은 간단하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블라도를 뜨거운 물에 담가 두면 성질이 변화해 독성을 띤다. 아주아주 소량이라 몸에 무리가 가진 않지만 그걸 몇 년 동안 처먹이면 말이 달라지지.
해독약? 없다. 만들어지지 않았다. 아주아주 소량이라 그걸 먹고 죽은 사람이 없을뿐더러, 놔두면 알아서 사라지기 때문에 아무도 해독약을 만들어 내지 않은 거다. 한마디로 내가 만들어야 한다.
“많이 곤란한가요?”
“그래, 아마 간단히는 집에 못 갈 듯하네.”
“다행이군요. 저도 못 가거든요.”
“응?”
“전 이 말을 하러 왔어요. 보호해 주겠다 하셔서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보호를 사양하겠다고 말한 셀비스는 진지한 얼굴을 했다. 갑자기 진지해지니까 조금 어색했다.
“보호는 거창한 말이고, 그냥 우리 저택에 와서 같이 사는 것뿐이야. 보면 알겠지만, 난 자네를 보호해 줄 힘이 없어.”
셀비스를 향해 가는 팔을 내밀었다. 이 팔로 너한테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단다. 내가 검을 잡아 봤어, 활을 잡아 봤어. 마법은 가능하지만 마나도 없고, 공격 마법은 내 전공 분야도 아니고, 해 본 적이 없어 서툴다.
내가 내민 팔을 빤히 바라보던 셀비스는 해괴한 생물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조심스레 팔을 잡고 주물럭거렸다.
“뭐 하는 건가?”
“도비, 지금껏 굶었습니까? 영주성 사람들이 밥 안 줘요?”
“무슨 소리인가, 이제껏 그대가 한 요리를 엄청 잘 먹었는데.”
“도비는 지금 먹는 것보다 더 잘 먹어야겠네요. 너무 말랐습니다.”
“이것도 찐 건데….”
정말 잘 먹고 있었다. 프레오나에 온 뒤로 제일 잘 먹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서양 음식도 간이 좋고 맛있으면 물리는 것 없이 잘 들어간다. 문제는 로테 별궁의 주방장이었다. 그 쌉새끼 만나기만 해 봐, 진짜 손모가지 잘라 버릴 거야. 그놈은 요리를 해서는 안 된다.
로테 별궁 주방장의 손모가지를 어떻게 잘라야 잘 잘랐다고 소문이 날까 고민하던 와중, 창문이 깨지며 누군가가 들어와 멍 때리던 나를 낚아챘다.
“으악!”
“윽…! 도비!”
짧은 신음을 내며 떨어져 나간 셀비스가 나를 불렀고, 나는 누군가에게 안겨 침대 근처에서 멀리 떨어지게 되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살펴보기도 전에 익숙한 얼굴이 눈앞에 드리워졌다.
“젠…?”
“괜찮으세요? 어디 다친 곳은….”
“언제… 아니, 왜 창문으로 들어온 거야?”
나를 낚아챘던 괴한은 젠이었다. 젠은 세상 모든 풍파를 혼자 다 맞은 듯 너덜너덜한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젠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상처가 나 있었다.
“이, 이거 뭐야? 다친 거야? 여기 좀 봐봐!”
“별거 아니에요.”
“별거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 얼굴이 어떤 얼굴인데! 목에 이건 또 뭐야. 많이 다쳤잖아!”
드러난 목과 찢어진 옷 사이로 자상이 보였다. 서둘러 아공간 주머니에서 상처에 좋은 연고를 꺼내 젠에게 덕지덕지 발랐다. 특히 얼굴을 집중적으로 발랐고, 그것도 모자라 없는 마나를 쥐어짜서 흉터가 남지 않는 마법도 걸었다.
“저보단 미르 님이 더 중요합니다. 저놈이 미르 님께 해를 끼친 건가요?”
“아니, 해는 무슨. 헉! 셀비스!”
잊고 있던 것이 떠올라 깜짝 놀라며 셀비스를 찾았다. 셀비스는 아까까지 자리했던 침대에서 저 멀리 떨어진 구석으로 날아갔고, 입고 있던 하얀색 옷 위, 선명하게 신발 자국이 난 배를 부여잡고 있었다. 젠이 나를 낚아채면서 셀비스를 발로 밀쳐 낸 것이었다. 그래도 칼을 안 쓴 게 어디야. 셀비스한테는 미안하지만, 목숨 건진 걸 감사하게 생각하자. 젠은 날 위해서 타루스 놈도…. 아, 그건 날 위해서가 아닌가. 아니면 뭐 어때.
내 안전을 확인하는 젠을 끌고 셀비스에게 가까이 다가가 상태를 물었다.
“괜찮아?”
“아니요, 전혀 안 괜찮습니다.”
“…젠, 세게 밀었어?”
“네.”
그랬구나. 안 괜찮겠네.
“…제가 잘못한 건가요?”
젠은 담담한 어투로 내게 물으며 바닥에 누워 있는 셀비스를 바라봤다. 그 눈빛엔 미안하다는 감정은 들어 있지 않았다.
“일단은 그런 것 같은데…. 셀비스, 영주성에 의사들 많으니까 아픈 건 의사들한테 봐 달라 하고, 내가 내일 찾아갈게. 그때 마저 얘기 나누자.”
아파하는 셀비스에겐 미안하지만, 젠이 왔으니 이야기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어차피 할 이야기는 다 한 것 같고.
“아파서 못 일어나겠습니다. 일으켜 주세요.”
처음처럼 아프다고 일어나지 못하겠다며 내게 손을 뻗은 셀비스를 본 젠은, 작게 혀를 차곤 나 대신 셀비스의 손을 잡아 일으켜 줬다. 못마땅해 하는 얼굴의 젠을 본 셀비스는 젠이 눈치채지 못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내게 말했다.
“아무래도 결정은 보류해야겠습니다. 도비와 함께 지내게 될 그날이 너무 기대됩니다. 도비도 그렇죠?”
“세르비스, 당신 지금 살짝 맛이 간 거 같으니까 내일 맨정신으로 다시 얘기하자.”
“오늘처럼 정신이 번쩍 드는 날이 없었습니다. 저 완전 제정신입니다.”
“아냐, 당신 지금 많이 아파. 당장 의사한테 가.”
셀비스의 등을 떠밀어 방 밖으로 내쫓으려 했지만 그는 초강력 접착제로 발을 바닥에 붙여 놓은 듯 꿈쩍하지 않았다. 결국 가만히 보고 있던 젠이 움직이려 하자 그 모습을 본 셀비스는 작게 웃으며 내일 꼭 자신을 만나러 오라는 약속을 받아 내곤 제 발로 나갔다.
“저자는 누구죠?”
“세르비스라고 영주성 주방장인 미네르바의 손자인데, 말하자면 좀 길어. 나중에 알려 줄게. 그것보다 너는 왜 창문으로 들어온 거야?”
게다가 일주일은 걸린다는 토벌을 5일 만에 끝내고 돌아온 건가? 아, 설마 도망친 건가?
“토벌대 전멸한 거야?”
“그럴 리가요. 최대한 빨리 끝내고 저택으로 돌아갔는데 미르 님이 안 계셔서 찾으러 온 거예요.”
그의 말에 따르면, 400이 넘는 오크 군대를 거의 혼자 잠도 자지 않고 3일 만에 전부 처리한 젠은 전사한 기사의 시체와 몇 남지 않은 약한 오크들은 남아 있는 토벌대에게 맡기고 빨리 돌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저택에 도착해 보니 나는 없고, 노반과 마린은 내가 자신과 함께 영주성에 볼일이 있어 잠깐 머물고 있는 줄 알았다고 한다.
원래라면 아크레나의 팔찌와 함께 저택에 있어야 할 내가 돌아오지 않아, 무언가 잘못되었다 생각한 그는 쉬지도 않고 나를 찾으러 영주성으로 온 것이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문을 지키는 기사를 따돌리고 영주성 안으로 몰래 들어와 이 방을 살피는 도중, 이 야심한 시간에 낯선 남성이 내 손목을 지분거리며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게 되어 창문을 깨고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 찾으러 온 거네?”
“네.”
“지친 몸을 이끌고? 완전 피곤한데 나 때문에?”
“네.”
젠은 걱정스런 얼굴로 셀비스가 잡고 있던 내 손목을 살피고, 걸치고 있던 옷을 조심스레 벗겨 정말 해를 입지 않았는지 꼼꼼히 확인했다. 그의 다정하고 조심스런 손길이 느껴질 때마다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얼굴에 쥐고 있는 힘을 풀면 금방이라도 실없는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