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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먹고 싶어요-48화 (48/227)

48 크로스반 영주성에 감금되다 (10)

“나 멀쩡해. 셀비스도 나 걱정한 거였어. 나보고 굶었냐고 그러더라.”

“살이 조금 붙으셨네요. 별일 없이 잘 지낸 것 같아 다행이에요.”

“그치? 나 쪘다니까. 셀비스가….”

“그래도 미르 님은 더 먹어야 해요.”

“셀비스도 그렇게 말했어. 그래도 이번 주는 셀비스 덕분에 많이 먹었….”,

“제가 없는 동안 그자와 가까워진 겁니까?”

조금 차분해진 듯한 그가 물었다. 지금 셀비스한테 질투하는 건가? 며칠 만에 만난 자신을 두고 셀비스 이야기만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은 걸 수도.

“아니, 셀비스랑은 오늘 처음 만났어. 나랑 친해진 건 셀비스의 할머니.”

“그자가 미르 님을 도비라고 부르던데, 애칭 아닙니까?”

“그게 애칭이면 난 이 이름 버릴 거야.”

도비가 애칭이라면 난 이 이름을 버릴 거라는 단호한 말에 젠은 조금 부드러워진 얼굴로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줬다. 삐진 거 풀렸네.

“이름을 또 버리시면 안 되죠.”

“버린 거 아니야. 필요 없으니까 넘겨준 거지.”

“못 믿어요.”

부드러워진 그의 표정과 가라앉아 있던 입꼬리가 재밌다는 듯 살짝 올라갔다. 진짠데? 필요 없어서 준 건데?

“나 그렇게 호락호락한 성격 아니야. 나 찾아왔던 악마한테 욕도 했는걸.”

“못 믿어요.”

“진짠데? 웬만한 악마는 거의 다 내 발 아래에 있어.”

“그것도 못 믿어요.”

“이것도 못 믿어? 그럼 젠, 보고 싶었어.”

예쁘게 미소를 지으며 보고 싶었다 말했다. 그에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뜬 그가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그건 믿을게요.”

잡고 있던 손을 놓은 젠이 깨진 창문 유리를 발로 대충 밀어 두고 밖의 상황을 살폈다. 유리가 깨지는 큰 소리가 났으니 누군가가 상황을 확인하러 오고도 남았을 텐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아무리 젠이 내 방이 있는 복도로는 오지 말라고 했어도 이 소란을 듣고도 아무도 오지 않은 건 이상했다.

“왜 아무도 안 오지. 내가 안 중요한가?”

“근처에 아무도 없어서 그럴 거예요.”

“아무도 없다고?”

“네, 오늘 크로스반 영지의 축제날이거든요.”

“축제?”

축제라니. 영주성의 하나뿐인 공자가 아프고, 의사도 다 잡아가서 영주성의 지지율이 떨어진 이 시국에? 영주는 무슨 생각으로 축제를 하는 거지?

“축제…라기보단 영지민들끼리 모여서 즐기는 날인가 봐요. 기사들은 영지를 순찰하고 있고, 시종들은 축제를 즐기고 있어 바쁜 걸 거예요. 그래서 저도 쉽게 들어왔구요.”

“아, 그래서 할망구가 밖으로 나갔구나.”

“아까 친해졌다는 그분이요?”

“응, 셀비스의 할머니야. 미네르바라고 진짜 짜증 나게 협박하는 할머니 하나 있어.”

“협박이요?”

“말려들고 싶지 않으면 셀비스 데리고 살라고 그랬거든.”

젠에게 미네르바와 있었던 이야기를 해 줬다. 정말 고약하게 협박하는 할머니지? 그래도 요리 레시피를 준다니 다행이지. 그 할머니 요리 진짜 맛있거든. 특히 수프가 대박이야. 그리고 셀비스 데리고 가면 요리하라고 부려 먹을 생각이야. 어때, 너도 좋지?

“….”

“왜? 싫어?”

“아뇨, 괜찮아요.”

“싫으면 꼭 말해 줘. 나만 사는 공간이 아니니까.”

“네, 그럴게요. 이제 돌아갈까요?”

창밖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자 내 허리를 잡고 창문을 뛰어내리려는 젠을 황급히 말렸다. 여기서 떨어지면 난 죽을지도 몰라! 그리고 난 아직 할 일이 있단 말이야. 에라이씨! 블라도만 아니면 지금 가도 아무 문제 없는데….

“잠깐! 나도 진짜 가고 싶은데, 아직 안 돼.”

조용히 내 눈을 바라보며 챙길 게 있냐 물어보는 젠에게 상황을 설명해 줬다.

“그… 사실 영주의 목적은 내가 아니라 너래.”

“알고 있었어요.”

그랬구나. 나만 몰랐네. 하하, 쥐구멍 어디 있지.

“그래? 어떻게 알았어?”

“이전에도 토벌을 도와달라고 전서구를 받았었거든요. 좀 끈질겨서 기억하고 있어요.”

“그랬구나…. 그래서 도와줬어?”

“아뇨, 바빠서 북쪽은 올 시간도 없었어요. 그리고 제가 없어도 토벌은 충분히 할 수 있었을 거예요.”

“병력을 낭비하기 싫어서 너를 부른 거구나. 이제 보니 정말 치사한 놈이네.”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맘에 들지 않는 영주 놈이라 생각했다. 그런 영주의 밑에서 클로에와 로이가 곱게 자란 게 정말 기적이다. 분명 엄마를 닮았겠지. 머리색도 눈 색도 엄마와 판박이일 거고. 영주를 안 닮아서 정말 다행이구나, 얘들아.

“네, 그런 거죠. 그래서 할 일이란 게 뭐예요?”

“아, 여기 공자님 아픈 거 알지? 사실 걔가 아픈 게 아니라 독을 먹은 건데, 내가 해독제 만들어 주기로 했거든.”

조금 뿌듯한 얼굴로 젠을 바라봤다. 그에 젠이 담담하게 받아쳤다.

“미르 님이 왜요?”

“음, 난 착하니까?”

착하기는 무슨, 애들한테 빚을 지우려는 못된 어른이다.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지. 말간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순수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나 착하잖아, 안 그래? 그에 입을 다물고 아무 말 하지 않는 그에게 눈을 부릅뜨며 대답을 강요했다.

“의도가 조금 불투명하긴 하지만, 미르 님은 항상 선했어요.”

“의도라니, 그런 거 없어.”

“….”

못 믿어요. 딱 그런 눈빛이다. 옛날에는 내가 귀찮아도 루독의 아이를 고쳐 줬으니 사실은 착한 사람이다 뭐다 그랬으면서! 이제 좀 같이 살았다고 내 내면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이라도 생겼나 보다.

“그런 거 없어.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한 행동이야.”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아이의 상태를 낫게 해 준 대가로 영주에게 뭘 뜯어낼 생각 아니신가요?”

“…넌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 빵!”

우산을 들고 손가락으로 총을 쏘는 시늉을 했다. 날 너무 잘 알고 있는 거 아니야? 만약 마린이었다면 ‘정말 착하세요, 황자님. 하지만 무리는 하지 마세요.’라고 말해 주었을 테고, 노반이었다면 ‘미르! 정말 착해! 내가 도와줄게!’라고 했을 거다. 그에 반해 젠은 내 계획을 다 꿰뚫어 보았다.

“미르 님이 살던 세상에서 유행한 건가요?”

“응, 비슷해. 원래 우산도 들고 있어야 하는데…. 어쨌든 당장은 못 가. 애들한테 해독약 만드는 데 시간 걸린다고 말해 둬야 하고 셀비스랑 미네르바도 한번 봐야 하니까,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가자.”

“그럼 옆방으로 가요.”

깨진 유리 조각 때문에 이 방은 더 이상 쓸 수가 없었다. 창문이 뻥 뚫려 찬바람도 들어오고, 침대에 유리 조각이 튀어서 위험했다. 결국 처음 영주성에 왔을 때 젠이 쓰려 했던 방으로 들어갔다.

이 방은 내가 쓰던 방과 비슷한데, 침대의 크기가 달랐다. 전에 쓰던 침대가 킹 사이즈였다면 이 방의 침대는 퀸… 아니, 더블 사이즈였다. 전에 쓰던 방과 마찬가지로 가구도 없고, 소파조차 없어 더블 사이즈 침대에서 성인 남자 둘이 딱 붙어서 자야 할 판이었다.

방을 둘러본 젠이 멍하니 침대를 보고 있던 내게 말했다.

“전 옆방 가서 잘 테니 미르 님은 여기서 편하게 주무세요.”

“난 괜찮으니까 그냥 같이 자자. 그동안 안 잤다며.”

“제가 안 괜찮아요. 주무세요.”

“나도 안 괜찮아. 그냥 자자.”

시종에게 새로운 방을 내 달라고 하면 되지만, 젠이 돌아왔다는 게 알려지면 복잡하게 되니 말하지 않았다. 내일 방을 치울 시종에게는 엄청 큰 새가 부딪쳐 창문이 깨졌다고 말할 셈이었다.

나가려는 젠을 붙잡고 아공간 주머니에 들어 있는 젠의 새 옷을 꺼냈다. 그에 젠은 어째서 자신의 옷이 그곳에 들어가 있냐는 표정을 지었다. 이게 다 마린의 철두철미한 준비성 덕분이다. 우리 마린이 얼마나 유능한지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야 한다.

“일단 씻고 와.”

결국 젠은 내게서 옷을 받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옷도 다 찢어지고 마물의 피도 굳어 있어 찝찝했을 거다.

젠이 욕실에서 나오기 전에 방 밖으로 나가 시종을 찾았다. 1층 복도를 활보하던 푸른색의 보타이를 맨 시종을 발견해 종이와 펜을 빌려 달라 한 뒤, 원래 쓰던 방 창문에 거대한 매가 부딪치는 바람에 유리창이 산산조각 나서 위험하니 옆방으로 옮겼다고 했다. 내일 말할 생각이었지만 만난 김에 해결해야지.

“정말 송구합니다. 다치신 덴 없으십니까?”

“난 멀쩡하니 걱정 말고, 방은 내일 치워 줄 수 있겠나? 오늘은 피곤하니 얼른 자고 싶군.”

“네, 알겠습니다. 그럼 더 큰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니네! 괜찮아! 그냥 옆방 쓰겠네. 옆방도 좋던데 뭘….”

다른 방을 안내해 주겠다는 정성스런 시종의 말에 화들짝 놀라 괜찮다 소리쳤다. 그냥 거기서 잘게. 너네들 번거롭지 않게 일 안 시키겠다는 거잖니. 내 갸륵한 뜻을 한 번에 알아들어 주라.

“아닙니다. 황자님이 쓰실 방인데!”

“괜찮네! 이만 피곤하니 가 보겠네. 아, 영주에게는 말하지 말게. 괜히 내 걱정을 하면 더 피곤해질 테니.”

“아, 알겠습니다.”

시종이 건네는 펜과 종이를 빼앗듯 받고 방으로 올라갔다. 방에 들어가니 그새 씻고 나온 젠이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고 있었다. 어디 다녀왔냐는 물음에 펜과 종이를 보여 줬다.

“편지 써야 해서.”

“편지요?”

“응, 노반한테.”

젠은 어차피 내일 볼 건데 왜 노반한테 편지를 쓰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는 뜻으로 한쪽 눈썹을 올렸다. 젖은 머리를 말리려 넘겨 올린 덕분에 보이는 새로운 표정이었다.

“노반이 화 안 냈어?”

토벌을 마친 젠이 곧장 저택으로 돌아갔다가 내가 없는 걸 알고 영주성으로 왔다면, 노반은 그런 젠의 행동으로 인해 내가 영주성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을 거다. 일단은 젠이 데리러 갔으니 참고 있겠지만, 돌아온 나를 보게 된다면 노반은 화를 내며 당장이라도 영주성 부숴 버리자고 말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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