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자님 먹고 싶어요-49화 (49/227)

49 크로스반 영주성에 감금되다 (11)

“우리 노반 화 풀어 줘야지. 귀여운 노반 생각하며 하루하루 편지를 썼어~ 하면서 달래 주면 덜 화내지 않을까? 옥중 서신, 얼마나 감동적이야. 내심 날 가둔 영주한테 고마워할지도 몰라.”

“과연 그럴까요….”

“내기할래? 노반은 내가 숨만 쉬어도 좋아해.”

“그건 미르 님이 노반을 볼 때 아닌가요?”

“…어쨌든 난 노반한테 사랑받고 있어. 편지 써 주면 덜 화낼 거야.”

머리를 다 말린 젠이 먼저 침대로 가 누웠다. 난 젠이 누운 옆자리에 조심스레 앉아 편지를 썼다.

<노반에게

노반, 나는 지금 크로스반 영주성에 있어. 젠은 토벌을 나갔고, 나는 젠을 기다리면서 혼자 있어. 그래서 조금 심심했는데 클로에라는 아이를 만났어. 클로에는 붉은 머리에 녹색 눈을 가지고 있는데 눈동자에 숲이 들어가 있는 것처럼 예뻤어. 노반도 나랑 같이 클로에를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오늘은 로이를 봤어. 로이는 클로에의 쌍둥이 오빠야. 로이도 클로에처럼 붉은 머리에 녹색 눈인데, 노반도 알다시피 로이가 많이 아파. 그래서 숲 같은 눈이 어두워지고 붉게 타는 머리카락도 어두워졌더라. 난 그게 너무 안타까웠어. 그래서 로이가 나을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중이야. 꼭 찾았으면 좋겠다.

점심으로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섞어 구운 함박 스테이크를 먹었어. 요리 실력이 뛰어난 주방장인가 봐, 정말 맛있었거든. 딱 노반이 좋아할 맛이라 노반이 너무 보고 싶었어. 돌아가면 해 줄게.

오늘은 주방장을 만났는데, 미네르바라는 이름을 가진 할머니였어. 이 할머니가 나한테 레시피를 준다 했으니 노반한테 맛있는 걸 해 줄 수 있을 거야.

미네르바의 손자를 만났어. 이름은 세르비스래. 키가 젠만큼 크고, 젠보다는 아니지만 잘생긴 사람이었어. 이 사람도 실력 있는 요리사래. 내가 먹어 봤는데 정말 맛있더라. 그 할머니의 그 손자인가 봐. 솔직히 미네르바보다 세르비스의 요리가 더 맛있었어. 미네르바한테는 비밀이야.

세르비스가 우리 저택으로 와서 같이 지내게 될 거 같아. 지금은 아니고 나중에. 세르비스가 노반한테 더 맛있는 요리를 해 줄 수 있겠다. 난 노반이 세르비스의 음식을 먹고 지을 귀여운 표정이 기대돼.

미르가>

없던 일을 지어서 쓰지는 않았지만 시간을 뒤죽박죽 섞어서 썼다. 잉크가 마르기를 기다렸다 잘 접어 아공간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를 치우고 이제 잠을 자려 몸을 돌리다 나를 보고 있던 젠과 시선이 마주쳤다.

“안 잤어?”

“네, 편지 쓰는 거 보고 있었어요.”

“재미없었을 텐데.”

“미르 님 표정이 재밌었어요.”

“내 표정?”

그는 작게 웃고는 추우니까 안으로 들어오라며 덮고 있던 이불을 들어올렸다. 아까는 같이 자기 싫다고 옆방 간다고 했으면서 지금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한 침대에서 한 이불을 덮고 자자고? 개콜이지. 젠이 마음을 바꿀까 얼른 이불 안으로 들어가 옆에 딱 붙어 누웠다.

“추워!”

개뻥이다. 어디서 히터가 나오는지 방 온도는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딱 적당했다.

“근데 무슨 표정? 나 이상한 표정 지었나?”

“아뇨, 그냥….”

“그냥?”

“웃는 거라든가, 미간 찌푸리고 입술 내미는 거요. 시시각각 변해서 보고 있으면 안 질리고 재밌어요.”

내가 그랬나? 아, 고약한 릴리아 부인의 이야기를 쓸까 말까 고민하긴 했었다.

그는 내 얼굴을 빤히 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렇게 웃는 건 또 처음 본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새로운 모습을 많이 보는 것 같다. 질투할 땐 상대를 향해 혀를 찬다든가, 눈썹을 올려 의문을 표하는 얼굴이라든가, 아이같이 장난스러운 미소, 그것들 전부 새로웠다.

젠을 향해 몸을 돌린 채, 그의 얼굴에 작게 난 상처를 바라보며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젠.”

“네.”

“젠.”

“네, 미르 님.”

“젠.”

“네, 여기 있어요.”

성가실 텐데도 무시하지 않고 하나하나 대답해 주는 다정한 그에게 옅게 미소를 지었다.

“한 번만, 연이라고 불러 줘.”

조금은 간절한 어투로 그에게 말했다. 내 이름을 불러 달라고. 전생이 사라져도 상관없다 했지만, 사실 조금 외로운 것 같다. 너에겐 진짜 나이고 싶어.

그는 내 부탁에 짓고 있던 웃음을 지우곤 불안해하는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깊은 금색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마음을 단단하게 잡아 주는 것 같았다. 그가 조심스레 내 뺨에 손을 올리곤 나직하게 말했다.

“연아.”

“응.”

그 다정한 목소리를 끝으로 눈을 감았다.

* * *

따듯한 무언가가 얼굴에 닿아 간지러운 느낌에 눈을 떴다. 뭔가 해서 보았더니 젠의 손가락이 아프지 않게 내 얼굴을 찌르고 있었다.

“일어나세요.”

“젠, 왜 이렇게 일찍…. 혹시 안 잤어?”

“미르 님이 옆에 있는데 어떻게 자요.”

“긴장해서 못 잔 거야?”

그런 거니? 그런 거야? 긴장해서? 젠 너도 이제 슬슬 나를 의식해 주는 거야? 응?

비몽사몽한 상태에서 오늘도 잘생긴 젠에게 맹구 같은 미소를 지었다. 아침 인사로 사랑스러운 표정을 지어 주었지만 그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칼 같았다.

“아뇨, 누가 들어올지도 모르니 잘 수가 없더군요.”

“….”

“이제 할 일 끝내시고 얼른 돌아갈까요?”

“응…. 그러자.”

무드 없는 자식. 젠이 나보다 더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저택에 보물 숨겨 놨어? 물론 노반과 마린이 있지만.

무심한 젠을 속으로만 씹으며 침대에서 일어나 입고 있던 가운을 벗고 준비되어 있는 옷을 입었다. 날씨를 보니 영주성에서 지냈던 그 어떤 날보다 화창했다. 어쩐지 몸이 개운하더니 날씨가 좋아서 그랬나 보다.

“빨리 끝낼게. 한 시간만 기다려 줘.”

“딱 한 시간이에요. 늦으면 몰래 못 나갈지도 몰라요.”

“나가는 건 걱정 마. 클로에한테 부탁하면 들어 줄 거야. 걔가 되게 똑똑해서 가끔은 내 뒤통수를 치는 대답을 할 때도 있다니까?”

젠에게 클로에와 쓴 계약서 이야기를 해 줬다. 로이를 만나게 해 주는 대가로 수지에 맞지 않는 보답을 하겠다는 계약서를 쓰고, 그 계약으로 영주를 협박해 나와 약속한 기념품을 사러 가기 위해 여행을 갈 거라는 장대한 계획.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뒤통수가 얼얼했다.

아, 미네르바가 했던 협박만큼 뒤통수가 아픈 건 없지. 자기랑 연관됐다고 떠벌릴 테니까 죽기 싫으면 자기 손자 데려가라고. 허참…. 말하고 보니 영주성에 와서 이익은 없고 손해만 보고 가는 느낌이다. 게다가 아직 팔찌도 못 받았잖아.

“생각해 보니까 이번 주의 난 너무 착하게 살았던 것 같아.”

“호구가 아니구요?”

“…맞아, 호구.”

어제처럼 장난스럽게 웃는 젠이 좋으면서도,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호구가 된 내 상황이 안타까웠다.

“젠도 같이 가자.”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다녀오세요.”

“너한테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

“누구요?”

누구긴 누구야, 자기 손자가 최고라는 고집 센 할망구지. 우리 할망구 시력 개선시켜 주러 가자.

젠이 돌아왔다는 걸 영주가 알아도 뭘 어쩌겠냐는 마음으로 당당하게 젠을 데리고 복도로 나갔다. 시종들이 말을 잘 듣는지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복도를 벗어나 중앙 성으로 들어가자 오순도순 모여 있던 시종들이 젠과 나를 힐끔거리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그래, 우리 젠이 아침부터 보기엔 많이 황공한 외모지? 그 마음 잘 알아. 난 눈 뜨자마자 봤는걸. 할망구가 이 광경을 꼭 봐야 하는데.

주방으로 다짜고짜 들어가 미네르바를 불렀다. 황자의 위엄? 미네르바한테는 그런 거 버린 지 오래다.

“미네르바!”

“엇! 황자님 오셨습니까? 아침에는 주방이 부산스러워 위험하니 밖에서 기다리시면 주방장님을 불러 드리겠습니다.”

근육이 빵빵한 요리사가 내게 말했다. 미네르바를 보러 오면서 이 남자랑 안면을 텄다. 첫 만남이 조금 화려했지. 양파를 까다 광광 울어서, 속으로 몰래 양파 요리사라 부르고 있다.

“알겠네.”

양파남의 말대로 아침이라 그런지 주방은 꽤 복잡해 보였다. 전쟁을 치르는 것 같달까, 열기가 대단했다.

“아! 세르비스도 함께 불러 주게.”

“네! 알겠습니다.”

바쁜데 불러내서 미안하지만, 나도 바쁘니까. 불렀으니 곧 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10분이 지나도, 30분이 지나도 미네르바와 세르비스는 오지 않았다. 이 사람들이 황자를 기다리게 해? 내가 권력 좀 휘둘러 봐? 5분 뒤에도 오지 않으면 직접 주방에 들어가 미네르바를 찾을 거다 다짐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양파 요리사가 돌아와 양해를 구했다.

“황자님, 정말 죄송합니다. 미네르바 주방장님과 세르비스가 식사를 드릴 때 뵈러 간다고….”

“알겠네. 그대는 가 봐.”

양파 요리사는 정말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이고 서둘러 주방으로 돌아갔다. 정말 바빴나 보네. 갑자기 미안해졌다.

“푸으….”

“미르 님, 정말 호구 다 됐네요. 그래도 일단 황자인데.”

“바쁘다니까 어쩔 수 없지.”

“발이 묶여 움직이지 못해도 황자님께서 부르시면 묶인 발을 잘라서라도 와야 해요.”

“발이 잘려 오는 사람은 사양하고 싶은데.”

“말이 그렇다는 거죠.”

차분한 얼굴로 잔인한 말을 한 젠은 주방을 향해 서슬 퍼런 눈길을 보냈다. 젠, 우리가 참자. 가능하면 그 가족은 안 건드리는 게 좋아.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말려드는 기분이거든.

부산스러운 주방을 벗어나 클로에가 있을 로이의 방을 찾아갔다. 아마 영주와 부인도 함께 있겠지. 젠이 돌아왔다는 걸 알려 주기 싫었지만, 팔찌를 제대로 받아야 하니 토벌을 잘 끝마치고 젠이 돌아왔다는 것을 보여 주는 쪽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로이의 방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의사들로 붐볐다. 내가 망할 저 의사들 다시 돌려보내겠다고 온 건데, 영주 놈은 제 아들이 죽을병에 걸렸다고 의사들을 잡아 두고 있다. 정 그러면 몇몇 의사만이라도 돌려보내라 했지만 별별 장황한 이유들을 들먹이며 거절했다. 미안해 죽겠다는 표정인 주제에 말은 어찌나 잘하던지. 눈을 막고 귀도 막고 있는데, 가장 쓸데없는 입만 뚫려 있었다.

“고하게.”

“세네카의 4황자님이 오셨습니다!”

시종 대신 할 일 없는 의사가 내가 왔다는 걸 알렸다. 그에 우당탕탕 소리가 나며 문이 활짝 열리고, 얼굴이 벌게져 씩씩거리는 클로에가 나왔다.

“황자님! 저 간악한 부인을 처단해 주세요!”

“응…?”

“부인이 오빠가 마시는 물에 이상한 풀을 담갔습니다!”

몸싸움이라도 일어났는지 바닥엔 깨진 그릇과 이상한 색의 액체가 흥건했고, 거의 비어 있는 물 잔을 내게 들이민 클로에가 부인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에 부인이 고개를 조아리며 차분하게 말했다.

“로이가 두통이 있다 하여 가져온 약초입니다. 아이의 몸에 부담이 되는 약초 또한 아닙니다.”

부인의 태도는 정말 차분했다. 그러곤 준비해 온 듯한 대사를 늘어놓았다. 그래, 두통. 블라도가 두통에 좋은 약초이긴 하지. 하지만 릴리아 부인, 많이 급했나 보네. 사람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먹이려고 하다니. 게다가 내 앞에서 약초에 관해 이야기하는 건 초등학생이 대학 교수한테 설명하는 거랑 다름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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