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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먹고 싶어요-50화 (50/227)

50 크로스반 영주성에 감금되다 (12)

정말 블라도를 쓴 것인지 확인하려 클로에가 들고 있는 잔을 뺏어 한 모금 마셔 보려다 젠에게 저지당했다. 아, 젠이 있었지. 잠깐 나가 있으라 할걸 그랬다. 티가 나지 않지만 못마땅해 있는 젠에게 난 독에 내성이 있으니 괜찮다고 했지만 그는 절대 안 된다며 컵을 빼앗고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내성 있어서 괜찮아.”

“안 돼요.”

“나 진짜 괜찮은데.”

“그럼 제가 먹을게요, 저도 내성은 있으니.”

“안 돼!”

“이제 제 마음 아시겠죠?”

전보다 단호한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블라도인 걸 확인 못 하면 뭐 어때, 자백 받아 내면 되지.

“부인, 이 약초의 이름이 뭔가.”

“그 약초의 이름은 블라도라고 합니다. 제 오라비가 남쪽에서 구해다 주는 약초인데, 꽤 효과가 좋아 저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호오, 이곳에서 블라도를 구했다고? 나도 가끔 두통이 오곤 하는데, 남는 게 있으면 줄 수 있겠나?”

“…네, 황자님. 시종을 시켜 바로 가져오겠습니다.”

아싸 땡큐다. 돌아가서 연구해야지.

부인은 곁에 있던 시녀에게 자신의 방으로 가 블라도를 가져오라 시켰고, 클로에는 배신이라도 당한 듯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 지금 네 편 들어 주고 있는 거야.

“클로에.”

내가 부인의 편을 들었다고 크게 동요하고 있는 클로에의 이름을 불렀다. 침착하렴. 곧이어 정신을 차리곤 다시 얌전해진 클로에가 입술을 깨물고 로이의 곁에 가 앉았다.

블라도를 가지러 간 부인의 시녀가 하얀색 주머니를 들고 돌아왔다. 건네받은 주머니를 확인하니 주머니 한가득 들어 있는 블라도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르겠지만, 대부분이 다 자라지 않은 어린 풀이었다. 이건 뭐, 독초로 쓰겠다는 증거 그 자체인데.

“그대의 오라비는 약초와 독초도 구분하지 못하는 건가?”

“예…?”

“다 자라지 않은 블라도는 독으로 쓰인다네. 약초를 공부했다면 다 알고 있는 상식이니 앞으로 유의하게.”

“…송구합니다.”

여전히 침착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지만 손끝이 창백하게 질려 떨고 있었다. 그에 지켜보고 있던 클로에가 꼬시다는 표정으로 부인을 흘겨보았다. 클로에, 좋은 건 알겠는데 제발 침착하게 있자.

얼른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릴리아 부인을 바라보고 있는 영주에게 말했다.

“영주, 약속대로 이프리트 경이 토벌을 끝마치고 왔으니 이제 우린 돌아가겠네. 팔찌는 나중에 받으러 오지. 그때도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세네카 제국의 황자에게 사기를 친 죄를 물을 것이다. 알겠나?”

“예, 명심하겠습니다.”

“또한 그대가 데려온 의사들은 공자의 병이 독인 줄도 모르는 멍청이일 뿐이니 전부 돌려보내도록.”

그 말을 끝으로 젠을 데리고 방을 나갔다. 그리고 상기된 표정의 클로에가 뒤따라 나왔다. 기쁜 얼굴로 부인의 꼬리가 잡힌 것 같다며 기뻐했다.

“황자님! 감사합니다!”

“감사는 둘째 치고, 지금 문제는 저 독은 알려진 해독약이 없다는 거야.”

기뻐하던 클로에의 표정이 하늘이 무너지는 듯 내려앉았다. 클로에는 구명줄이라도 잡아야겠다는 마음으로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그, 그럼….”

“해독약은 어떻게든 만들어 줄 테니까, 내가 오기 전까지 부인이 주는 다른 약 못 먹게만 해.”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는 클로에에게 해독약은 최대한 빨리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너넨 진짜 나한테 잘해야 된다. 뜯어낼 게 꽤 많으니까 미래엔 큰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알았지?

더러운 어른의 까만 속내를 숨기고 축 처진 클로에의 등을 토닥여 줬다. 부모 잘못 만나면 고생한다는 말이 딱인 것 같다.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아빠 엄마가 문제야. 그래도 넌 나처럼 맨몸으로 버려질 일은 없잖아. 그건 다행으로 생각하자.

“이제 끝나셨나요?”

“아니, 셀비스랑 미네르바 만나러 가야지. 밥만 먹고 가자.”

지금의 젠은 마치 에너자이저 연인의 쇼핑을 어쩔 수 없이 따라다니는 것과 같은 꼴이었다. 조금 다른 게 있다면 우린 연인이 아니고, 난 에너자이저가 아니라는 거다. 일어나서 한 거라곤 미네르바를 기다리다, 클로에를 찾아가 릴리아 부인에게 작은 엿을 먹인 것뿐인데 뭘 했다고 피곤해 죽겠는지 모르겠다. 저질 체력이 문제인가….

“체력을 길러야 할까 봐. 근육도 없고. 여기 시종들은 잡일을 하는데도 근육이 있던데.”

“미르 님은….”

“응?”

“단련을 해도 그 이상 체력이 늘거나 근육이 붙진 않을 것 같아요. 단련보다는 적당히 규칙적인 삶을 사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젠은 아주 조금 머뭇거리다 모르고 개고생하는 것보다 알고 있는 게 나을 거라 생각했는지 단호하게 말했다. 단련을 해도 크게 체력이 붙지 않을 것이고, 근육도 붙기 힘들다고. 한마디로 운동해도 안 될 몸이라는 거다.

“그 정도로 저질이야?”

“조금 노력한다면 붙을지도 모르지만…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근육보단 살부터 찌우세요.”

“나 엄청 먹고 있어.”

“거짓말은 나쁩니다, 도비. 항상 반은 남겼잖습니까.”

만찬실로 안내받는 도중, 셀비스의 목소리와 함께 듣고 싶지 않았던 이름이 들렸다. 그놈의 도비 맘에 안 든다니까!

“도비라고 하지 말라니까.”

“싫습니다. 마음대로 하라 하셨으니 제 마음대로 할 겁니다. 도비가 영주성에서 드시는 마지막 식사이니 다양하게 대접해 드리고 싶었지만 항상 남기셔서 오늘은 간단히 준비했습니다. 갑시다.”

거참, 남긴 걸로 되게 뭐라 그러네. 남기긴 했지만 진짜 많이 먹었는데. 평소에 밥 반 공기를 먹었다면, 셀비스의 요리는 한 공기 전부 싹싹 긁어 먹는 정도다.

내 중얼거림을 무시하며 셀비스는 나와 젠을 만찬실로 안내했다. 로이가 사경을 헤매게 된 뒤부터 밥을 잘 먹지 않는 영주보다 내가 더 만찬실에 많이 들어와서 그런지 영주성이 내 집이 된 것 같다. 원래 주방을 차지하면 그 집을 얻게 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없나? 없으면 내가 만들지 뭐.

만찬실로 들어가 안내받은 자리에 착석했다. 젠의 앞에는 여러 가지 맛있는 음식들이 있었지만, 내 자리엔 퍼런색의 영문 모를 수프와 새까만 덩어리가 놓여 있었다.

“…자리 바뀐 거 아니야?”

내 자리와 젠의 자리가 바뀐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데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는데. 1. 내가 저 할머니와 손자에게선 호구로 통하기는 하지만 일단 황자다. 2. 어제 셀비스의 복부를 강하게 찬 건 내가 아니라 젠이다. 3. 셀비스의 복부엔 최소 멍이 들었을 거다. 4. 손자를 끔찍하게 아끼는 할머니가 셀비스의 멍을 보았다면 곱게 나올 리가 없다. 5. 난 잘못한 거 없다.

“아뇨, 맞게 앉았습니다.”

“그럴 리가.”

“색이 조금 꺼려질 수도 있겠지만 맛은 보장합니다.”

지금껏 요리에 장난을 치지 않은 셀비스와 미네르바가 갑자기 내가 갈 때가 돼서 장난을 치고 싶어진 건 아닐 거고, 그럼 이 퍼렁이와 깜댕이는 어떤 연유로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일까.

믿어 보라며 싱긋 웃는 셀비스의 눈치를 보며 자리에 앉았다. 불안해 덜덜 떨리는 숟가락을 들고 파란색의 수프를 떴다. 입으로 넣기까지 많은 고뇌를 했다. 지켜보고 있으니 안 먹을 수도 없어 눈 딱 감고 수프를 먹었다.

첫 맛은 약간 단맛이었다. 그러곤 점점 달아지나 싶더니 어느새 고소한 맛이 돌았다. 밥맛이 없을 때 먹으면 집 나간 밥맛이 돌아올 만한 수프였다.

“여기 뭐 넣은 거야?”

“비밀입니다. 돈벌이 수단을 쉽게 알려 드릴 수는 없죠.”

“내가 맞히면 어떻게 만든 건지 알려 줄 거야?”

“그 안에 들어간 거 전부 맞히시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오냐, 딱 기다려 봐라. 파란색을 썼으니 블루베리인가? 식용 꽃 중에서도 파란색을 띠는 게 있을 것 같고. 단맛이 나니까 블루베리가 맞긴 한데, 고소한 건 뭐지? 캐슈넛을 갈았나? 아! 고구마다, 고구마! 아, 근데 견과류 맛도 나는 것 같고.

“대충…은 알겠는데.”

“알아내셨습니까?”

절대 모를 거라 자신하는 셀비스에게 추측한 것을 알려 줬다. 고구마, 블루베리, 캐슈넛, 그리고 향을 잘 혼합해 주는 허브를 넣었을 것 같다고. 그에 셀비스는 눈을 크게 뜨며 진심으로 놀라 했다.

“도비, 대단하네요. 거의 맞히셨습니다.”

“내가 놓친 게 있어?”

“크게 놓친 건 없지만, 소량의 알리움을 통으로 구워 갈아 넣었습니다.”

알리움이 뭐였지? 아, 마늘을 알리움이라 했었다. 마린도 그렇고 젠과 노반도 내가 쓰는 언어에 익숙해져 웬만한 채소의 명칭이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다는 걸 잊고 있었다.

“알리움?”

“네, 알리움을 구우면 매운맛은 사라지고 고소한 맛이 나 종종 씁니다. 감칠맛도 나구요.”

너 진짜 배운 사람이구나. 마늘을 구워 갈아 넣을 생각을 하다니. 여기 사람들은 마늘을 고기의 잡내를 지우는 데에만 쓰는데. 마늘을 사랑하는 한국인으로서 셀비스의 마늘 사용법은 정말 감동이었다.

파란색의 수프가 내 생각보다 훨씬 맛있었으니 옆에 있는 이 검댕이도 자동적으로 맛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크게 한입 떠먹었다.

세상에, 혹시 이거 쌀이야? 검은 덩어리의 정체는 빠에야였다. 새우와 관자, 그밖에도 다양한 해산물이 들어 있어 씹히는 맛이 일품이었고, 빠에야 특유의 육수의 맛이 쌀알 안에 배어 있어 재료 하나하나의 풍미가 느껴졌다.

“이 검은 건 오징어 먹물인가?”

“어떻게 아셨습니까? 잘 쓰지 않는 식재료인데.”

“난 모르는 게 없거든.”

고개를 하늘 높이 치켜들고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나를 보고 있던 젠은 자신의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썰며 잔잔히 웃었다. 셀비스가 자랑하는 작은 아이를 보듯 ‘그렇습니까? 대단하네요.’ 하고 치켜세워 주면서 물었다.

“그럼 누가 만든 건지도 아십니까?”

“이 퍼런 수프가 미네르바, 검댕이가 셀비스 아니야?”

“반대입니다.”

“셀비스도 수프 잘 만드는구나.”

“그럼요, 전 못하는 게 없습니다.”

아까의 나를 따라 하며 고개를 치켜 올린 셀비스를 살짝 흘겨봤다. 황자를 놀리고 있어.

“할머니는 언제 와? 얘기 좀 하려니까 어제부터 보이지가 않아.”

“도비에게 줄 선물을 가지고 온다 하니 곧 올 겁니다.”

“선물? 아! 레시피…는 아닐 테고.”

레시피는 셀비스를 데려가는 대가로 받는 것이니 셀비스가 가지 않겠다고 하면 받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셀비스는 나랑 같이 저택으로 간다는 거야, 만다는 거야?

“셀비스, 딱 정해. 나랑 같이 살 거야, 말거야.”

싫다고만 해 봐라. 포크로 콕콕 찔러 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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